5.18,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략전
5.18,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략전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0.01.04 16: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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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가를 붉게 물들인 모략전 '찢어진 깃발'

 
   
  ▲ 5.18 광주사태 당시 자료사진  
 

광주는 모략전의 휴화산

광주에 나돌던 유언비어 중에는 대검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 있었다. 대검으로 머리 가죽을 벗겨냈고, 유방도 도려냈고, 등에다 X자 상처를 내서 피가 줄줄 흐르게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검을 제대로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광주에서 ‘군인들이 저질렀다는 야만성’에 대해 흥분하는 어느 시민은 대검을 대나무로 만든 예리한 칼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최근의 극렬시위자들이 죽창과 죽봉을 가지고 경찰을 선제공격하는 그림을 연상했던 것이다.

대검은 훈련된 총검술의 힘으로 사람을 찌르기 위해 탄소강으로 제조된 무딘 칼이다. 날이 무디어서 그것으로는 사과 껍질조차 벗길 수 없다. 날을 예리하게 갈려고 숫돌에 백년을 문질러도 무딘 날은 그대로 있다. 날을 세우기 위해 그라인더에 갖다 대면 날이 깨져버린다. 이런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가죽을 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대검을 숫돌에 갈고 그라인더에 갖다 대보아야 할 것이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가지고 전라도 사람들의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지역정서를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광주시민들을 흥분시키고 분노하게 만드는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기록들에 의하면 광주에 파견된 7공수 여단은 40%가 호남출신으로 구성됐다. 전남대와 조선대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7공수여단 장교들은 소풍 가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배구공과 바둑판을 가져갔다 한다. 이들은 실탄도 없는 총을 거추장스럽게 등 뒤로 메고 부동자세로 열을 지어 시위대를 향해 계엄령이 선포됐으니 법을 준수하여 귀가하라고 타일렀다. 이렇듯 탄알도 없는 총을 등 뒤로 메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과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러 온 병사들의 모습이었을까? 누가 먼저 물리적 공격을 가했는가? 시위대가 먼저 했다. 시위대가 먼저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야유를 퍼붓고 돌멩이를 던져 피를 흘리게 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러 왔다면 어째서 5월20일 밤 절대다수의 시위대에 둘러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돌진차량에 깔려 죽을 때까지 실탄 한발 쏘지 못했는가? 정말로 싹쓸이를 작정했다면 손바닥만 한 지역에 집중돼 있는 광주시민 80만 거의 모두가 살해됐을 것이다.

공수대원들이 여인을 잡아 윤간을 한 후 죽였다는 끔찍한 유언비어와 주장들도 있다. 공수부대는 12명이 1개조다. 절대적 다수를 상대로 매타작을 당하며 이리저리 쫓기고 있던 상황에서 그런 목적으로 대열을 이탈할 수 있다면 그들은 초인적인 존재이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들이 검찰에 제기되어 조사했지만 모두가 허위주장인 것으로 결론 났다. 검찰조차 그런 주장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시민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무장시위대는 여름날의 시체 18구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시체놀음은 민주화를 내건 모든 시위대들의 단골 퍼포먼스다. 심지어는 미선이 효순이의 시체를 오랫동안 매장하지 못하게 하고 그 시체들을 가지고 반미감정을 선동했던 적도 있었다. 바로 이런 것이 민주화세력의 선동인 것이다. 선동은 군중을 모으는 핵심수단이고, 선동의 핵심수단은 유언비어와 시체놀이였다. 그리고 광주사태는 유언비어와 시체놀이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웅변해주는 가장 전형적인 교과서였던 것이다. 이러하기에 노동운동가 백태웅(필명 이정로)씨는 선동의 전문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1989년2월15일자 국민신문은 “다시 5월이 오면 우린 승리한다”는 제하에 으스스한 심층취재 기사를 실었다. 호남 일대의 대학들에 무서운 전투조직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목포대의 ‘동백대’,순천대의 ‘유월대’,호남대의 ‘전사대’ 등 수천 단위의 전투조직들이 힘을 키우면서 “다시 5월이 오면 우린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학생운동 출신의 광주-전남지역 20대 애국투사들 중 남대협 전투조직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하며 졸업생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수는 지금 상당수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존재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에 대해 언제든 제2, 제3의 5.18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일단 소요를 일으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그들의 뜻에 맞는 정권만 창출돼야 조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시 한 번’, ‘실수 없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노동계급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레닌 식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백태웅씨의 교시(?)를 그대로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상에 선(善)을 가장한 교묘한 속임수에 속지 않는 사람 별로 없다.

고위급 탈북자 강명도씨가 쓴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들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240쪽에는 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 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했다고 아쉬워하는 내용의 글이 있다. 구태여 강명도씨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강명도씨는 같은 책 241쪽에서 “북한의 가장 큰 대남 공작부 3호청사는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삐라를 만들어 광주로 보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북한이 광주에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보분야 전문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다. 광주소요가 조기에 종결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판과정을 보면 판사와 검사는 광주재진입작전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다.

80년대 대학가를 붉게 물들인 모략전 : 찢어진 깃발

‘찢어진 깃발’, 일반국민에는 단어이지만 이는 일본에서 들어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대학가에 확산됐다. 대학가마다 붙은 붉은 글씨의 대자보에는 어김없이 찢어진 깃발의 내용들이 소개됐다. 그리고 이를 본 학생들은 전두환과 군부에 대해 적개심을 누적시켜 왔다. 그 대자보의 내용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거짓들이었지만 이는 1980년대를 휩쓸고 간 대학소요에 가장 큰 원동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아래는 1989년11월에 발간된 단행본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의 158-165쪽에 있는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저자는 이명영(李命英)교수, 출판사는 (주)종로서적출판. 성균관대의 이명영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한 정치학 박사이며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아래는 그의 글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지하당의 소행으로 봐야 할 사건이 바로 1980년5월의 광주사태다(163쪽 중간). 광주사태 직후에 일본의 언론 및 교회 계통에 “찢어진 깃발” 이라는 팜프렛이 널리 살포됐다. 이 팜플렛에는 “목격자의 증언” 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필자도 발행처도 없었다. 그 내용은 실로 험악했다. 특전대 대원이 총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째서 태아를 꺼내 그 어미에게 던졌다. 특전대원들이 여대생 셋을 발가벗겨 놓고 뛰어가라 했는데 앉아버리니까, 총검으로 등을 찌르고 가슴을 열십자로 째서 청소차에 집어던져 버렸다, 도청 앞 광장에 475구의 시체가 전시돼 있었다는 등의 ‘증언’들이 실려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외국 특파원들이 5.19일부터 취재를 했지만 이런 내용들은 없었다. 그 후 광주 시민의 그 누구도 이런 증언을 한 사람은 없었다. 단지 도청 앞에 50여 구의 시체가 전시됐던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임산부와 세 여대생에 대해 군이 잔학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로 인해 시민들이 흥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유언비어였으며, 외신이 전하는 바와 같이 “계획적인 선동” 이었다(일본 조일신문, 1980.5.18). 누군가가 사태의 악화를 노려 유언비어를 퍼트려 놓고, 이를 다시 “찢어진 깃발”로 확대하여 해외에 유포시킴으로써 세계적인 반한-여론을 일으키려 한 대남공작이었음이 분명했다. 누구의 소행이겠는가. 한국의 전복을 노리는 혁명세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광주사태는 남한에 배치된 북한의 지하당 소행으로 보는 것이다(164쪽 중간).

이명영 교수는 찍어진 깃발의 극히 일부만 소개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언론인의 글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한국 또는 북한에서 고도의 심리적 차원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유포됐고, 다시 일본으로부터 한국사회로 역수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는 1992년 일본잡지(현대주간)의 주간이자 사장이며 한국통으로 잘 알려진 니시오까(西岡力)가 지은 저서 ‘일본오해의 심연’(日本誤解의 深淵)의 31-43쪽 내용을 일부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광주사태에 북한이 어떻게 간여했고, 계엄군을 어떻게 모략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설득력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1980년6월5일 ‘일본가톨릭정의’와 ‘평화협의회’가 가지회견을 갖고 “찢어진 깃발-한 기독교인의 목격증언” 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했다. 현지에서 보내졌다는 이 ‘깃발’ 이라는 문서(이하 깃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1974년1월 이래 한국기독교도들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하면서 일본의 대한(對韓)정책을 변경시킬 것 등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해 왔다. ‘한국문제기독교도긴급회의’(대표 나까시아 마사아끼 中嶋正昭, 진보파 장로교목사가 만든 조직) 역시 그 기관지인 “한국통신”제56호(동년 6월 20일 발행)에 “깃발”을 게재하여 그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취급했다. 또한 당시 아사히신문 외신부차장이었던 이까리이끼라(猪狩章 전 서울특파원)씨도 “깃발”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하여 “광주에서 여학생이 발가벗겨져 살해됐다. 이걸 보고 온 사람이 있다”고 썼다. 취재조차 시키지 않고 쓴 것이다. ‘깃발’은 광주사건을 목격한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쓴 것들이다. 이 중인(?)은 ‘깃발’의 사건이 시작된 다음날인 5월19일에 광주에 들어갔다가 5.24일에 걸어서 광주를 탈출했다고 쓰고 있다. 그 “목격증언”속에서 특히 주목이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이다.(이하 인용문은 “한국통신”제56호에서)

첫째로 데모진압에 투입된 계엄군이 노인이나 여학생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남녀노소 학생 일반시민의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얻어맞고 찔리고 때려 눕혔다.(생략) 이때 나의 눈은 무서운 현장을 잡았다. 미처 도피하지 못한 70세 정도의 노인의 머리위로 공수부대병의 철퇴가 내려쳐진 것이다. 노인의 입과 머리에서 분수 같은 피가 분출됐고, 노인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툭 쓰러졌다”

“공수부대원 두 사람에게 개처럼 끌려온 한 여인은 산월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이 여자 봉지 속에 든 것이 뭐야?’ 공수대원의 말이었다. 나는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몰라 그 여자의 손을 봤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뭔가 넣을 수 있는 봉지도 안보였다. ‘이 여자, 아무것도 모르나? 남아야, 여아야?’ 옆에 있는 자가 재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무얼 말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여자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 여자도 뭔가 잘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주: 봉지는 임신한 배를 가르치는 말)

“‘그럼 내가 알려주지’ 순간 여인이 반항할 틈도 없이 옷을 붙잡아 잡아당겨 찢었다. 여인의 원피스가 찢기고 살이 보였다. 공수병은 대검으로 이 여인의 배를 푹 찔렀다. 대검을 찌를 때 돌려가면서 찔렀는지 곧 장이 튀어 나왔다. 그들은 다시 여인의 아랫배를 찢어 태아를 꺼내서 신음하고 있는 여인에게 그 태아를 던졌다.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외면을 하고 전율하며 이를 갈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온 몸에 경련이 일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체도 병사도 그 자리에서 없어졌다. 옆에 서있던 아저씨 말에 따르면 마치 오물을 치우듯이 푸대 속에 쳐 넣어 청소차에 던졌다는 것이다.”

“어느 뒷골목을 빠져나가 큰 길 앞에서 나는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중략) 여대생으로 보이는 3명의 처녀들이 공정대 병사 등에 의해 옷을 벗기우고 있었다. 브라자와 팬티까지 모두 찢고 그들 공정대 병사들 중 가장 악랄해 보이는 병사가 군화로 처녀들을 걷어차면서 '빨리 꺼져! 이년들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데모 따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 화가 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처녀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가슴을 가리고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녀들이 빨리 도망칠 것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처녀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한 병사가 외쳤다. ‘이년들, 살기가 싫어. 살기가 싫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 그 순간 처녀들의 등에는 대검이 동시에 꽂혔으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넘어진 처녀들의 가슴에 대검으로 X자를 쓰고 생사의 확인도 없이 청소차에 던져 넣고 말았다. 암매장을 하는 것인지 화장을 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

두 번째는 사망자수에 관해 당국이 발표한 193명을 훨씬 상회하는 시체를 목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미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은 폐허의 도시, 살벌한 패전의 도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도청의 지하실에서 시체를 꺼내 광장에 쌓기 시작했다. 도청의 지하실에는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염방사기의 불길에 그을리고 탄 시체가 475구나 방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를 갈았다.”

“깃발이 한국으로부터 전달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가 발표한 것과 '한국통신'에 실려 있는 것을 비교하면 일부 번역상의 차이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는 어구, 표현의 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문이 한국어로 되어 있었을 것이란 점도 확실한 것 같다. 자신에게 배달된 문서를 그대로 믿을 것인가의 여부는 받은 측의 판단과 책임과의 문제다.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한국문제기독인긴급회의, 猪狩章, 아사히신문 외신부차장등은 각각의 판단과 책임 하에 이 문서가 전하는 내용을 사실이라고 인정, 일본사회에 공표했던 것이다.”

“깃발이 크리스챤단체와 아사히신문 기자들에 의해 일본사회에 공표한 결과 많은 일본인들은 그동안 갖고 있던 '한국은 무서운 나라' 라고 하는 선입견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에 기술하는 것처럼 깃발은 사실무근의 가짜문서였던 것이다. 깃발을 일본사회에 퍼뜨린 사람들의 책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그 후 6차례나 광주를 방문, 깃발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깃발의 내용을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수집할 수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임신부의 배를 찢었다는 등의 학살이 실제로 있었느냐에 대한 것이다. 83년5월 전남대 캠퍼스에서 사건 당시 전남대 1학년생으로 총을 들고 싸웠다는 학생은 필자에게 “분명히 그러한 소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자기 주변사람들도 누구도 그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말을 할 수는 없군요. 내가 본 가장 잔인한 장면은 중년의 부인이 곤봉으로 얻어맞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고 증언했다.

마찬가지로 83년5월 광주에서 만난 택시 운전기사도 “깃발이 전하는 것과 같은 학살을 목격한 적이 없다. 대학 근처에서 담소하고 있던 학생들을 군인이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연행해 가는 것은 목격했습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사망자 수에 관해서다. 앞에서 말한 학생은 깃발이 보았다고 하는 475구의 시체에 관해 “그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집회를 조직하는 측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희생자의 수를 확인하려고 나란히 눕혀진 시체 등의 수를 세었습니다. 그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50여구였기 때문에 475구라고 하는 숫자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단언했다.

84년5월 서울 연세대학 도서관 앞에 깃발이 전문 대자보가 되어 계시되어 있었다. 비에 젖지 않도록 투명한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도청 앞에 475구의 시체가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고 하는 문제의 부분을 보니 그 비닐 위에 만년필로 “거짓말이다! 그때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시체는 리어카 3대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좌익들의 모략전! 1960년 7월,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모략전을 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방 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하여 상대방 후보에 대한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다(1980.5.18. 경향신문). 1974년의 동아일보 광고 해약사태는 감첩들이 자행한 모략전의 극치였다. 간첩들은 서빙고 아지트를 이용하여 남산 정보부를 사칭했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와 광고대행업자 수십 명을 데려다 고문하고 협박하여 동아일보에 예약된 광고 모두를 취소시켰다. ‘당신 동아일보에 내고 있는 광고, 해약하라는 신호 받았소 못 받았소?’ 수십 명의 광고주들이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동아일보 광고 해약사태는 결국 남산 정보부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지하당의 모략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광고해약사태는 동아방송에도 확대됐다(소리 없는 전쟁 398-406쪽). 5.18에서도 모략전이 있었다. 시민군의 일부가 공수부대 유니폼과 비슷한 예비군 군복을 입고 아파트 등에 다니면서 나쁜 행위들을 저질러 놓고 이를 공수부대원들의 행위로 모략했다. 카빈, M-16, 기타 총기들을 가지고 시민들을 등 뒤에서 쏜 행위도 모략전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10년을 걸쳐 매년 30만 명씩의 대학생들이 이 찢어진 깃발의 모략에 의해 시민군을 숭상했고, 계엄군을 증오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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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2011-04-04 17:04:09
만원어치 가치도 없는 넘, 왜 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