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문제 덩어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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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문제 덩어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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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김일성을 추앙하고 있는 임헌영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4. 살인귀 김일성을 추앙하고 있는 임헌영

1) 누가 많이 죽였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근대사는 피로 얼룩져 있다. 먼저는 일제치하에서 처형 및 살육을 당한 수많은 의병들과 독립군 그리고 징병과 징용을 당해 끌려가서 참혹하게 죽은 국민들이 상당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세한 통계로는 나와 있지 않다. 이는 해방 직후부터 남북대치로 인해 정부수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한 와중에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입은 인적 피해와 재산적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3년, 1948년 8월 15일에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2년 후에 육이오사변이 터졌다. 남한 단독으로 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 한국인의 문맹률은 80%였고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불과 0.5%에 불과했는데 이들이 현재 친일자로 지목받고 있다. 0.5%에 불과한 지식인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이승만 정권은 이중에서 우익들을 중용했다. 대부분 유학파 출신들이었으며 영어권 유학파의 경우에는 미군정청에 중용되었다. 미군정청과 정부요직 그리고 각종 학교교사로 채용되었다.

▶ 일제치하에서의 한국인의 인적 피해

재일 한국, 조선인-역사와 전망」 의하면, 한일합방 이전의 재일 한국인의 대부분은 일본 유학생이고, 그것도 일시적인 체류자였다. 그런데 한일합방 이후의 재일 한국인의 구성은 그 대부분이 일본 노동시장의 하급노동자로 바뀌었음이 눈에 뜨인다.

합방 이전의 1909년에는 790명에 지나지 않았던 재일 한국인이 1945년의 5월에는 21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강제연행에 의한 이주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일본 본토로의 한국인 강제연행의 방법으로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모집방식,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관 주선방식 1944년부터 1945년까지의 징용방식에 의하였는데, 세 가지 모두 본인의 의시를 무시한 강권적인 연행이었다는 점에서 각각의 방식은 다를 바가 없다. 표8에서 볼 수 있듯이 1939년에 96만 여명이었던 재일한국인 수는 1944년에는 193만 여명, 나아가 1945년 5월의 추정으로는 210만 여명에 달한다. 즉 단 5년 동안 100만 여명이 증가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항저지제도의 철폐에 의한 '자유도항'에 더하여 1939년부터 시작된 강제연행에 의한 것이었다.

이상 필자가 조사한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2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이들의 사망 시기는 1944년에서1945년 사이가 가장 많다. 예를 들어 비바이 탄광의 경우 415명중 1943년에 101명, 1944년에 188명, 1945년에 113명이 각각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징병자와 징용자를 합쳐 약 40만 명으로 추계하고 있다. 징병을 당해 일본군이 된 한국인의 수는 10만 명으로 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굶주림을 피해 지원형태로 일본군이 되었다. 일본은 한국인 지원병을 극도로 경계하여 일본군의 형태로 징집을 하는 것보다 노동자로 징용하는 쪽을 선호했다. 일본 본토와 만주 필리핀 등의 탄광과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징용 당한 한국인의 수는 약 3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계하고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군수공장의 여공과 정신대로 차출되었으며 약 1만 명 정도로 추측된다. 해방 후에 돌아온 한국인의 수는 절반인 20만 명으로 추산했다. 이중에 사망했거나 현지에 남아 있는 한국인의 수도 절반인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며 사망자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강재언・김동훈(하우봉・홍석덕 옮김), 『재일 한국 조선인- 역사와 전망』,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 2000, 29-63쪽.”

▶ 6.25 사변으로 인한 인적 피해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남한의 인구는 1949년 정부에 의해 실시된 전국인구조사에서 남한인구 2천16만6천758명으로 집계되었다. 남한의 인적 손실은 모두 230만여 명에 달하였고, 북한의 인적 손실은 292만여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야후 백과사전)

소련이 근본도 없는 유령인간 김일성을 내세워 일으킨 육이오 남침으로 인해 미국은 178만 명의 미군을 파병하여 전사 3만 6940명, 부상 9만 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계 13만 7250명의 귀중한 생명이 사상 당했다. UN 연합군과 미군의 희생자의 총계는 474,000명에 달한다. 기실 따지고 보면 남의 전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만큼 억울한 죽음도 없다. 그만큼 억울한 죽음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대한 일이며 그만큼 값진 죽음이다. “한국의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해 전사한 미군과 UN군의 전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다. 대한민국의 역사 이래로 대한민국을 지켜주기 위해 한꺼번에 47만 4천명이라는 대군이 희생해 준 전례가 없다.

2) 진실을 왜곡하고 김정일의 대남공작을 지원하고 있는 사악한 친북자들

세계를 동서로 갈라놓은 공산주의는 1991년에 패망했다. 모스크바 광장을 굽어보며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레닌의 동상은 공산주의 해체와 동시에 해체되었다. 레닌의 동상에는 크레인과 쇠사슬이 동원되어 동상의 목에 쇠사슬이 걸리고 동상은 목과 몸체가 분리된 채로 레닌광장으로 불렸던 모스크바 광장에 내동댕이쳐져 부서지고 말았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군림했던 소련은 해체되고 소련은 손을 털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안에는 김일성과 북한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으로 행세하고 있다. 이들은 남한 내에서는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자를 부르짖고 한 편으로는 대를 이은 김일성 부자의 독재정권을 인정하고 오히려 위대한 지도자로 둔갑시키고 있는 가증스러운 자들이다. 현재까지 이들은 개혁자, 진보자, 경계인, 민주주의자로 위장하고 있다. 이들은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사악한 독버섯들이다.

이 독버섯들은 성매매사범과 같이 구릿하고 질겨서 도무지 끊어지지를 않는다. 이들은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면서 친일파 청산을 외친다. 다 죽고 무덤 속에 백골만 남아 있는 친일파를 대상으로 친일파 청산을 외쳐대는 이들의 속셈은 어디에 있을까? 근본도 없는 김일성이 역사에 등장하여 소련을 등에 업고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할 때 내걸었었던 간판도 친일파 숙청이었고 적화야욕을 품고 일으킨 6.25 남침의 명분도 남한을 해방시키고 친일파를 숙청하겠다는 명분이었다. 따라서 현재 친일파 숙청을 외치는 자들의 속내에는 김일성이가 들어있다.

3) 친일파 과거사 청산은 거짓 명분

김일성과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입에 올리고 있는 친일파의 과거사 청산 명분은 실상 북한의 김일성이 사용했던 인민재판을 통한 숙청에 해당된다. 대한민국은 김일성 부자의 왕국이 아니기 때문에 김일성식의 숙청이 통하지 않을 뿐, 친북자들에게는 여전히 김일성식의 숙청 방식의 전조인 인민재판이 성행하고 있다.

해방 당시에는 일본인과 친일파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워낙 많았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더불어 대개의 골수 친일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거나 아니면 타지로 도망가서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성난 민중의 눈에 보이거나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신분이 드러난 친일파들은 존재하지도 못했다.

일정시대 당시의 국민들은 일제가 주는 배급을 받기 위해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고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일본말을 해야 배급을 준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이 씨네노 돼지노 불알통이노 까라”하고 배급을 받아먹었다는 웃지 못 할 사례까지 등장했다. 그 세월이 35년이다. 35년이라는 세월은 강산을 세 번 반을 바꿀 수 있는 세월이며 조선 말기의 친일파 대신들은 당시에도 대개가 50살을 넘었었기 때문에 광복이 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죽었거나 오늘 내일 하고 있었다. 또 조선 말기에 30대에 불과했던 청년들도 벌써 환갑을 넘긴 시점이며 진갑에 가까운 나이들이다. 당시 평균수명은 60세가 되지 못했던 시절이라 진갑을 넘겼다면 최장수 군에 속했다.

나이에 대한 풍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습이 백령도에 있다. 백령도에서는 60 살인 환갑 때에 나무로 만든 관을 마련해서 윗목에 모셔두는 관습이 있다. 나무가 귀한 백령도에서 나무관에 장례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환갑을 넘긴 사람은 장수자로 대우를 받았고 마땅히 나무관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풍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백령도만의 효문화로 소개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시절에 70살인 진갑까지 넘긴 장수자라면 살아 있는 송장으로 불렸다. 죽을 날을 받아 놓았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을 숙청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4) 해방 후 한국의 실상

또 해방 당시 한국인의 약 80%는 제 이름 석자도 못 쓰는 문맹이었다.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이 중 신교육(新敎育)을 받은바 있는 전문학교 이상 대학 졸업자는 국민 전체의 0.2% 미만에 불과했다. 따라서 건국 후 이승만 정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문맹을 없애는 일이었다. 제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문맹자가 80%나 되는 데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국가의 장래를 열어 나갈 수 있겠는가.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교육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진통 끝에 1949년 1월에 미국식 초등학교 교과과정을 한국에 접목시킨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어 1950년 6월에 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국민이 6년간 의무교육을 받도록 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로 하여금 의무교육 실시에 필요한 학교를 설치하고 경영하도록 공포하였다. 공포를 하고 난 며칠 뒤에 육이오 전쟁이 터져 휴전 시까지 중단되어야 했다. 중단되었던 초등학교 의무교육은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이듬해인 1954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교육은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되었다. 1959년까지 전국 초등학생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 세계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교육열이었다. 전체 국민 80%가 넘는 문맹자들은 전쟁 후에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외국에서 보내오는 구제품을 배급 받아 간신히 연명해야 했다. 그 모습이 오늘 날 팔레스틴 가자지구에 있는 난민들의 모습과 같고 아프리카 난민들의 모습과 대동소이하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냈다. 시대가 이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빈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팔자로 여기고 살았다.

당시 대한민국의 자력으로는 일본을 상대 할 수 있는 능력도 되지 못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의 열방은 고종이 보낸 특사조차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왜소한 국가였다. 고종이 특사로 보낸 이준 열사를 비롯한 조선 대표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와 열국의 방관으로 빚어진 일이다. 영국은 인도 지배를 묵인 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을 지지했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의 여파로 일본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특사 파견을 적극 도왔으나 결국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정도의 처량 맞은 국력으로 어찌 일본을 상대할 수 있을까. 당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만주를 정복하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국가였다.

만약 세계2차 대전에서의 패배로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독립은 요원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일본의 식민지 국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 2차 대전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세계 전쟁’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세계 2차 대전의 결과 자체를 놓고 보면 한국은 세계 2차 대전의 최대 수혜국이며 한국민은 행운아들이다. 남한에 주둔한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군대를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강대국인 미국이 한국전에 전격 참가하게 되면서 미국이 중심이 되어 있는 UN 연합군도 자연스럽게 참전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군에는 맥아더 장군과 같이 역전노장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맥아더, 하지, 리지웨이, 벤 플리트 장군 등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 한국전에서 빛을 발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략면이나 실전에서 가공할만한 능력을 드러냈고 어뢰로 화천댐 수문을 폭파시키는 등의 기상천외한 전략적 발상으로 한국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미국은 178만 명의 미군을 파병하여 전사 3만 6940명, 부상 9만 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계 13만 7250명의 귀중한 생명을 희생했다. UN 연합군과 미군의 희생자 수는 474,000명에 달한다. 한국전에 참가한 474,000 명의 귀중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육이오 동란은 소련의 하수인에 불과한 김일성이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둔갑을 하고 나타나 남한을 적화 통일시켜 소련에게 바치기 위해 벌인 전쟁노름이다. 김일성은 남침의 명분을 미군의 압제에 시달리는 남한의 국민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한 해방 전쟁으로 묘사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낙동강까지 밀린 전투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국군은 물론하고 미군과 UN 연합군의 사상자도 엄청나게 발생했다. 그 수가 474,000명이나 된다.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목숨을 희생한 미군과 유엔연합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세계 경제권 10위의 중요 국가로서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5) 공산주의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어

공산주의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이에 대한 방증이 북한의 현재 모습과 소련의 붕괴에서 찾아진다. 그동안 공산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경제정책을 실행했던 소련은 멸망했고 동구라파와 북한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는 형편없이 추락했다. 더구나 캄보디아의 경우 폴 포트와 공산군인 크메르루즈의 대학살로 인구의 1/3을 잃었다. 이때에 학살당한 1/3은 대부분이 지식층이며 판사 및 운동선수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공황에 빠져 있고 국가의 발전은 고사하고 국가의 장래조차 불투명한 입장에 놓여 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본을 적으로 보는 공산주의의 특성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며 둘째는 분배론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분배이론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자고 하는 경제론으로서 제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할지라도 그 효력은 길어야 30년 정도밖에 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쓰자고 하는 공산주의의 분배론에는 경제창출에 대한 이론이 없다. 심지는 않고 뽑아 먹기만 하자는 공산주의의 원시적 경제론은 국가와 국민을 망치기에 딱 좋은 이론일 뿐이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서 보듯 공산주의 이론은 많이 가지고 있는 자의 소유를 빼앗아 적게 가지고 있는 자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떻게 해야 경제를 창출할 수 있다는 논리가 들어 있지 않다. 자본은 공산주의의 공적이며 부르주아는 공공의 적이 되는 공산주의의 토양에서는 창의력이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생명인 세계시장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생필품에 불과한 구닥다리 제품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있고 발전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창의성이며 창의성은 지식적 본능이다. 인간은 창의성과 지식 그리고 행위로 인한 결과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고 대가를 구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가치가 있다면 지식의 가치도 있다. 천재적인 학자가 있다면 노동을 할망정 죽어도 공부는 못하겠다는 노동자도 있다. 공산주의의 문제는 천재적인 학자나 노동자나 그 행위의 가치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데 있다. 이럴 경우 인간은 학문을 포기하고 손쉬운 노동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공산주의의 이론은 원시적이기 때문에 지식인 양성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1966년 모택동의 100만 홍위병으로 인한 문화혁명이나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에 걸친 폴포트의 크메르루즈 정부의 대학살 사건은 서구 학문과 지식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벌린 일이었다. 이는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이 지식인에 대해 얼마나 큰 거부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예이다.

6) 공산주의 이론은 파기해야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 이론은 지구상에서 파기해야 할 최악의 독이다. 박현채는 공산주의가 망했을 때, 자신의 민족경제론을 파기해야 했다. 그러나 박현채는 파기하지 않고 죽었다. 박현채가 죽고 난 뒤에 박현채의 무리들은 힘을 합쳐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김대중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야 말로 대한민국을 구원해 주는 바이블이나 되는 것처럼 선전해왔다. 박현채의 평생소원은 조선민주공화국에 의한 적화통일을 달성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박현채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라인은 세작들이며 그 수는 15만 명에 달하며 그 명단은 노무현이 빼내갔던 이지원 프로그램에 입력되어 있다. 이들 중 드러내놓고 친북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자들이 상당한데 이들은 김정일의 대남공작금으로 공부한 자들이다. 최근 들어 위장 탈북자 간첩 원정화 사건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7년 동안 간첩활동을 했던 대학강사 이범진 사건까지 발생했다. 특히 이범진은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국회 진출을 목적하고 정치활동을 펼쳐 평통자문위원까지 하고 있던 자이다. 그는 호기심 때문에 북한의 간첩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17년 전, 정치학을 전공한 이번진이 북한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 공작원의 회유에 대해 거부감조차 갖지 않고 간첩이 될 수 있는 토양은 김대중을 위시하여 박현채, 임헌영, 조정래, 백낙청, 고은, 리영희, 강정구, 홍세화, 한홍구 등 친북좌파들이 공작해 놓은 결과물이다. 결국 이들의 목적 있는 활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론은 두 갈래로 갈라져 충돌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시간과 돈을 번 김정일은 두 차례의 핵실험까지 감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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