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이룬 고속도로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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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이룬 고속도로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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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가 한국의 근대화에 끼

 
   
  ^^^▲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2장. 한국 경제의 동맥인 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및 경부고속도로의 기조는 위치상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에 위치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의 기본 골자는 전력·석탄의 에너지원과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을 근간으로 경제개발의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한 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을 극대화 시켜 식량 자급자족에 주력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출 증대와 기술력 향상을 위한 양동작전이 구사되었다. 이 계획은 최고 6%대의 경제성장률을 목표했으나 결과는 7.8%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이로 인해 국민 1인당 총생산(GNP)는 83달러에서 125달러로 증가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초과달성으로 이해 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운송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산업의 지방 분산화 및 단거리 수송의 기동성이 요구됨에 따라 큰 골격의 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제2차 및 3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인 1967~76년의 10년 동안에는 큰 골격의 경인, 경부 고속도로 공사와 진입로, 교차로 국도와의 연결 도로 등의 건설에 집중되었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의 건설을 시발로 경부·울산·호남·영동·남해·동해·구마·88올림픽·중부·중앙·서해안·서울외곽순환 고속도로 등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2002년까지 완공된 고속도로의 현황을 보면 전국 22개 고속도로에 총연장은 2,786km이다. 한국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국도이며, 부산 등 일부 대도시에는 시내 통과를 원활히 하기 위한 도시고속도로가 있다. 보통 왕복 4차선으로 구성되었고 차선의 너비 3.6m, 경제속도 80~120km이며, 구간에는 30~50km 간격으로 휴게소·주유소·소규모의 정비소 등을 갖춘 부대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절. 천지개벽

1. 신화창조

KBS는 다큐물 “신화창조의 비밀” 84편 ‘국토의 대동맥을 건설하라’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60년대 후반, 독일의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설립됐다. 수출중심의 공업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수송수단의 개발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우리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최저 비용으로 최단 기간 내에 완공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방식은 '선개통 후보완' 방식이다.

기반공사는 최소 공사비를 염두에 두고 갓길의 폭을 줄이고 도로의 하상을 낮췄다. 공사에 투입될 중장비는 폐차 직전의 낡은 미군 장비를 사용했다. 현대의 김영주상무는 기계를 수리하는 대신 개조하는 방법으로 선회했다. 개조 기술을 통해 기술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필요한 장비를 짜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는 장비를 자체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2. 한국적 공사방식

하루 18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으로도 공기를 맞출 수가 없었다. 한 겨울에도 얼어버린 땅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고, 각 단계의 공사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까지 안정화시키기 위한 시간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폭우와 홍수는 공사현장과 인부들을 덮쳤고, 낙반사고도 이어졌다. 하지만 멈춰 설 시간도,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공사는 강행되어야만 했다.

땀과 눈물, 뼈를 묻으며 닦아온 길. 마지막으로 당재 터널만 완공시키면 꿈에 그리던 전 구간 개통이 실현된다. 차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첩첩 산중의 공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험난한 산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개통 예정일을 맞추기 위해선 턱없이 모자란 시간, 특단이 필요했다.

개통 예정일은 점점 다가왔지만 공사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결국 공사기간, 적은 예산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공사 기간에 맞추기 위해 조강시멘트 사용과 시멘트의 육로 수송, 새로운 공사기법까지 더해졌다.

드디어 70년 7월 7일, 대한민국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었고 사람들의 생활도 변했다. 자동차 문화가 생겨나고 물류 혁명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희생이 이뤄낸 값진 결실이었다. 대한민국은 공업국가로 가기 위한 출발선을 뒤로 한 채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3. 시간과의 사투

"10개월 만에 수원까지 뚫어 12월21일 개통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朱源장관이 朴대통령에게 연말까지는 오산까지 개통하겠다고 보고했다. 오산 인터체인지 공사가 50%밖에 진행이 안 돼 있는 상태인데, 朱장관이 일종의 충성발언을 한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워가며 포장작업을 하는데 땅이 얼어 도저히 작업이 안됐다. 그래서 볏짚을 깐 뒤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도 보고, 대형 버너 수십 개를 트럭 꽁무니에 매단 뒤 끌고 다녀도 보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녹을 리가 있나. 할 수 없이 그냥 포장을 했다. 개통식이 열리기 3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차선 도색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마의 구간으로 불렸던 옥천구간인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지형적인 여건이 워낙 험해 공사 진척이 매우 더뎠다. 지형적인 조건이 워낙 열악하여 노선 선정 당시 최후까지 확정하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로 공중 답사하던 중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정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장비 진입로를 설치하는 데만도 여러 달이 걸렸다. 일부에서는 장비를 공중으로 운반하자는 묘안이 나올 정도였다. 더구나 대형 낙반사고가 발생해 희생자가 늘어나자 현장에서 사람들이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임금을 배 이상 올렸는데도 사람을 구할 수 없었던 최대 난공사였다.

2절. 국가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초과달성에 기여한 공로

1. 달라진 경제지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자 한국의 경제지도가 달라졌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난 이후인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의 목표는 중화학공업화 추진과 안정적 균형이었다. 이 기간에는 착수 직전인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에 의한 국제경제 질서의 혼란, 1973년 10월의 석유파동 등으로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었으나, 외자도입의 급증,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동 건설경기 등으로 난국을 극복하여 기간 중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유지하였다. 높은 성장률은 수출증대와 고용창출효과의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한국의 경부고속도로가 단기간 내에 최장의 길이로 개통되고 난 뒤에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경부 고속도로 개통 이후 1억 불 수출을 달성한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해외가 주목했다. 1964년에 힘겹게 1억 달러를 초과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966년에는 계획했던 것보다 근 2배나 되는 2억 5천만 달러를 수출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필두로 해외자본이 한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공업에 머물렀던 한국의 산업이 중공업으로 전이되면서 1970년에 축적된 기술력과 수출력을 바탕으로 한국은 성장동력이 우수한 국가로 주목을 받았고 1988년 세계 올림픽까지 유치하여 올림픽개최국으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2. 국민적 자긍심 고취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이를 기반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구호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전국의 군과 구는 각 마을의 성공사례를 수집하고 비교하여 성공양식을 추출하여 비교했다. 비교된 각 시도의 군과 군은 불명예가 씻기 위해 성공 사례를 찾아내기 위해 경부고속도로 위를 누볐다. 땅 끝 마을인 해남으로부터 서울의 천호동까지 전 국토가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전 세계에서 안 된다고 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 한국인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인식이 전 국민에게 박혔다.

국가적 지원은 시멘트를 공급해 주는 것과 지붕개량에 필요한 약간의 지원이 전부였으나 전국은 새마을 운동의 열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새마을 운동에 대해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行政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 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적 기조로서 근면·자조·협동을 설정하게 되고 그 추진 방법으로서는 우수한 지도자의 헌신적 봉사를 기조로 하고 동시에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지원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

3. 건설단가의 신기원

기네스북에 오른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당시의 건설비용이 1km당 1억 원에 불과한 최저비용으로 건설되었다. 최근 개통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무려 350억 원에 이른다. 2007년 현재 전국 고속도로의 평균 건설단가는 269억 원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며 유가상승과 건설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현실적인 건설단가는 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CNB 뉴스의 차영환 기자는,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까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우리 국민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정도이며, 교통사고 비용 절감 등 경제적 편익 또한 연간 13조 5천 5백억 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고속도로 건설로 인한 경제적 가치가 연간 13조 5천 5백억 원에 이른다는 의미는 만약 고속도로 건설이 안 되었거나 늦춰졌을 경우 그만한 가치가 죽어 있었을 것이라는 뜻과 함께 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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