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남과 여류 비행사 '권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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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과 여류 비행사 '권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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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권기옥 선생'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자료전시

 
   
  ▲ 환국 직전의 임정 인물들
ⓒ 학연문화사
 
 

지난달 31일에 국가보훈처는 금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이며 독립운동가인 권기옥 선생을 선정해 발표하고, 독립기녑관과 서대문교도소는 8월 한달 동안 별도의 전시실에서 그에 관한 자료와 사진을 전시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는 비행기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선생의 독립사상을 알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때 대개의 여성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등, 몸으로 하는 민중운동이 많았던 시기에 신식 무기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 돋보인다.

권기옥을 여류 비행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창남과 비교하게 된다. 그 당시 첨단 무기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점이 같고, 일년사이로 출생한 동년배라는 점이 같다. 하지만 다른 점은 안창남은 목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고, 권기옥은 몰락한 지주의 딸로 1901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비행기하면 안창남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떴다 비행기, 안창남' 이라는 노래까지 있었다. 그는 21세에 일본에서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권기옥보다 4년 정도 빠르게 우리나라의 최초 비행사가 되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30세에 죽었다.

하지만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은 25세에 중국 운남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여서 비행사가 되었다. 그녀가 비행사가 된 것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다. 3·1만세운동 만세사건 가담, 독립운동자금모금, 권총운송 등의 협의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6개월을 복역했다.

그 후에 출옥하여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가담했고,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1920년에 상해로 탈출하여서 비행사가 되었다. 그 후에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이 이끄는 부대에 들어가 공군복무를 시작하였다. 중국 공군으로 10년간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안창남은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 들어가서 굴욕을 참으며 비행기 기술을 배웠다. 그 후에 미국인 비행사 스미스의 시범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려고 결심을 하고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21세에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여서 비행사가 되었다.

그는 비행사가 된 후에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서 상하이로 탈출했다. 여운형의 소개로 옌시산 장군하에 있는 타이위안 비행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중국군의 혁명전선에 참전하여, 혁명군 중장으로 항일전선에서 분투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아깝게도 사망하여 해방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권기옥은 여류 비행사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고, 해방이 되는 것을 보고 1988년에 87세로 사망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대개는 몸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러한 시기에 이들은 그 당시 첨단 무기였던 비행기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라 더욱 빛난다.

독립운동, 선각의 눈을 가진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었다

권기옥 선생이 태어난 평양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기독교 여성 100여명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가 3.1운동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한 곳이다. 이 시위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죽었다. 1965년 신동아 3월 호의 내용을 보면 오신도 총재 외에 26명이나 된다.

이 들 중에는 평양 지역 이외의 여성들도 있었다. 대한애국부인회 각 지부에서 모여든 여성들로서 의주, 대동, 증산, 진남포, 순천, 강서 등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다. 이 여성 독립운동가 모임은 3.1운동 이전부터 있었던 조직으로 평양에서 주축이 되었다.

기독교 여성중심으로 이화, 숭의학교 출신의 부인들이 주동이 되어 활동해왔는데, 이들은 만세시위사건 말고도 금반지, 금비녀 등을 팔고, 삯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 2400여 만원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고, 독립군에게는 은닉할 장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또한 개성에서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만세시위운동을 했다. 이들은 3.1운동을 3월3일부터 4월 6일까지 10여 차례나 했다. 다소 늦게 시작한 것은 독립선언서를 늦게 받아서다. 개성역에서 33인중의 하나인 목사 강조원이 7세의 어린이 괴나리봇짐 속에서 받은 것이 2월 28일 오후다.

개성에는 호수돈과 미리흠 여학교가 있었다. 한쪽은 처녀들을, 다른 한 쪽은 과부와 기생들을 주로 가르쳤다. 만세시위운동에 호수돈 측에서 12명이 참가하고, 미리흠 측에서는 2명이 참가하였으며, 부속학교 학생 등, 모두 70여명의 여성들이 참가했다.

양 학교의 여학생 만세시위운동은 개성지방의 3.1운동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 만세시위 운동이 잇달아 일어나서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오히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는데 불을 붙였다. 이 사건으로 여성 독립운동가 8명이 옥고를 치렀다.

영국인 선교사 게일(J.S.Gale)은 항상 한국민족이 용기가 없음을 꾸짖었다. 그러나 3.1운동을 보고 난 뒤에 "일찍이 서양인들은 한국민족이 겁이 많고 비겁한 민족으로 알았으나, 현재의 한민족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용기와 자제력이 있는 민족이다."라고 칭찬하며, 재평가 했었다.

일제치하에서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주인공이었고, 그들이 나라를 지켜서 오늘날 우리가 잘살고 있다. 그러한 일을 한 여성독립운동가들 중에 선각자적인 위치에 있었던, 권기옥 선생 같은 분들의 역할이 매우 컸었다.

권기옥 선생은 여류 비행사로서 신식무기로 일제와 맞서서 싸운, 우리의 용감한 독립운동가로서 배울 점이 많다. 이 달에 전시되는 선생의 자료와 사진을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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