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파병의 역사를 찾아
월남 파병의 역사를 찾아
  • 김동문 논설위원
  • 승인 2008.09.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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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군이후 처음 십자군 파병

 
   
  ▲ 맹호부대 월남 출발
ⓒ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kr)
 
 

1964년 세계의 불씨를 안고 동-서 양대 진영의 냉전이 불꽃을 튀기는 열전장으로 변한 월남, 지난날 쓰라린 한국 6.25동란과 일란성 쌍둥이 같다는 월남의 내전은 세계의 이목을 폭양이 작렬하는 동남아의 한 모퉁이 정글 속에 집중 시킨체 점점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전화에 휩싸인 월남에서 베트공과 고전을 거듭하는 정부군을 도와 군사 고문단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월남 내전의 작전을 도맡고 있는 미국은 세계의 어떠한 여론이나 비난에도 월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세계 정세와 여론 때문에 전투 부대의 대규모 파견만은 할 수없어 미국의 고민은 심각했고 거기에 따르는 타격과 손실이 막대한 것이었다.

그레서 미국은 혼자 담당하기에 벅찬 월남전에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우방국들의 도움을 요청하여 비등하는 세계 여론을 미국의 월남전 개입의 북가피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끌면서 한국에도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전화로 휩싸인 월남에 비전투요원인 1개 야전 이동의과 병원을 파견한 바 있는 한국에 대하여 월남은 다시 공병과 수송병과를 중심으로 자체 방위를 위한 경비병을 포함한 정규군 1천여명의 파견을 요청해 왔고, 미국은 월남 파병 한국군의 봉급과 보급의 담당과 함께 월남전에 소요되는 군수품 중에서 국내생산 가능품목에 대한 한국에서의 구매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적극적인 월남전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따라 한국은 6.25당시 수많은 인명과 물자의 희생을 무릅쓰고 한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의 참전과 지원을 상기 하더라도 미국의 월남전 지원 요구를 의리상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을 뿐만 아니라 비대한 한국군의 유지와 장비 현대화 및 보강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한국의 처지로서도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병안 국회통과

1965년 1월 26일 박 대통령은 국회 월남 파병안 동의 여부에 관한 표결에 앞서"현재 월남을 불태우고 있는 공산 침략의 불씨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협조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위한 최상의 길이고 또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월남파병을 결정하였다"고 밝히고 정부는 국토 방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월남 공화국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발표했다.

아울러 파병 결정의 이유로는 첫째, 집단 안전 보장에의 도의적 책임이 일환이라는 판단에 입각 하였고 둘째로는 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은 한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확신에 의한 것 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박 대통령의 월남 파병에 관한 담화문의 발표가 있기 10일 전에 정부는 이미 파견되어 있는 국군 의무대에 이어 2천명의 공병.수송 및 자체 방위부대 등을 월남에 파견한다는 내용의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국회에 제출된 정부의 월남 파병 동의안은 국회 국방위원회의 신중한 예비 심의를 끝낸 후 1월 24일 오후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많은 논란이 거듭된 끝에 26일 하오 질의와 답변을 끝내고 토론에 들어갔으며 표결에 앞서 민정당의 윤보선 대표 최고위원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퇴장하자 정성태 원내 총무가 소속의원들의 퇴장을 종용하여 대다수 의원들이 퇴장을 하였으나 서범석의원등 8명은 표결에 참가했다.

표결 결과 야당의 반대, 또는 기권에도 공화당 의원과 소수 야당의원의 찬성으로 정부의 월남 파병 동의안은 재석 125명 중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통과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 국군은 창군이래 처음으로 타국에 대한 지원을 위하여 월남전선으로 십자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창군이후 처음 십자군 파병

2월 5일 백설이 내린 중부 전선의 국군기지에서 결단식을 마친 장병들을 마지막 환송하는 국민의 식전이 서울에서 거행되고 이어 2월 9일 하오 2시 서울 운동장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시민, 학생, 군인 등 3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월남 파견 장병의 환송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의장대를 사열한 후 "6.25 때 우리를 도와준 자유 우방의 전우들과 똑같은 자유 수호를 위한 십자군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선량한 우방을 도와 주기 바란다"고 치하 하였다.

식은 최두선 대회장의 식사와 이효상 국회의장의 국민 대표 환송사에 이어 박 대통령의 하사품 수여, 기념품 증정, 조 단장의 답사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조 단장은 답사에서 " 어떠한 역경을 당하더라도 공산 침략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여 전우의 나라 월남 땅에 자유의 생생한 뿌리를 심어놓고 꽃을 피워 놓겠다"고 다짐했다.

조 단장이 답사를 하고 있는 동안 출정하는 남편, 아버지, 오빠 형을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은 모두 경건한 표정으로 그들의 장도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고 있었다.

식은 파월 장병들에 대한 꽃다발 증정, 무학 여고생의 환송의 노래에 이어 대법원장의 만세 삼창으로 끝나고 파월 부대의 시가 행진으로 들어갔다.

건투와 필승을 비는 전 국민의 환송속에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월남으로 향한 국군 비둘기부대 제 1진을 태운 우리 해군의 LST함정 5척은 남지나해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1965년 2월 25일 새벽, 사이공 강 어구 붕타우를 지났다.

10일 동안 미국 제7함대 소속 함정과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월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향하였다. 드디어 긴 항해를 끝내고 사이공 부두에 도착한 비둘기 부대는 월남 군악대의 아리랑 연주 속에 월남 정부 고위 관리와 월남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그 역사적인 해외파병의 첫발을 월남(베트남)에 내 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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