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불이 들어오자 동네에 불이 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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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깃불이 들어오자 동네에 불이 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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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으로 기어 나온 산간 벽지 촌놈

 
   
  ^^^▲ 그대 마음엔 등불이 있는가?
ⓒ 김규환^^^
 
 


산간 벽지, 그 골짜기 사람들

모든 게 그랬다. 광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종점으로 마지못해 달려왔다. 마땅히 잠 잘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큰비나 눈이 조금만 내려도 끊기기 일쑤였다. 전기, 전화도 뒤늦게 들어왔다. 십리 밖에 국도가 있었지만 국도가 포장된 것도 10년이나 되었을까? 그 안쪽 궁벽한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대중교통은 갈수록 줄어들어 한 때 하루 10대가 넘었지만 지금은 하루 2대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자꾸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면소재지에도 하다 못해 짜장면 한 그릇 사먹을 식당이 없는 곳이 화순군 북면이었다. 화순온천이 생기기 전인 10년 전까지의 상황이 그랬다. 공비도 70년대까지 발견되기도 했다.

네 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온 학생 들 중 유난히 촌놈 소리를 듣고 자란 친구들이 있었다. 그곳이 가장 동쪽에 있는 우리 마을 일대다. 요즘 들어서 예전 지명으로 ‘골안7동’이란 말을 쓰지만 우쭐거릴 생각이 있는 타 학교 출신 아이들은 “아, 거기?” “송단 꼴짝?”으로 일갈했다.

아버지는 들에 일 나갈 때도 반드시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책보에 싸서 나갔는데 그걸 유지하는 건전지 떡 약을 장에 갈 때마다 사 날라야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문명 혜택은 아예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그 오지에서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갔다. 아무 불편 없이.

 

 
   
  ^^^▲ 옥수수 꽃이 피어 알알이 영글어 갈 무렵
ⓒ 김규환^^^
 
 


고향과 시골을 뜨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은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뜨려고 안달이었다. 농사지으라면 야반도주가 일상화되었다. 애초에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사흘을 못 버티고 짐 싸서 나갔다. 새댁들도 먹을 것 없이 꽉 막힌 산골에서 3년을 살면 오래 산 것이다. 어떻게든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갖은 꾀를 짰고 사는데 조건이 하나하나 붙기 시작한다.

“딱 2년만 살고 나가자.”
“아이교육 시키려면 광주로 가야되는 거 아니 예요?”
“우리도 서울로 갑시다.”
“양호씨는 이번 추석에 자가용 몰고 왔잖아요? 우리는 허구한날 이렇게 살다 말 거예요? 대책을 세웁시다. 텔레비전도 좀 보고 삽시다.”

 

 
   
  ^^^▲ 변압기와 전깃줄과 애자
ⓒ 김규환^^^
 
 


4km 아래 마을보다 5년 더디 들어온 전기

버스가 우리 마을과는 상관없는 코스로 다니듯 전깃줄도 마을로 직접 오지 않고 학교마을을 통해서 들어오는 지선에 불과하니 옆 동네보다 몇 달은 늦었다.

빨치산의 고장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백아산(810m) 안쪽 방리와 송단리 일대 여섯 마을은 1978년 내가 4학년 때 이 무렵 마을마다 개벽의 기쁨을 맛보았다. 까막눈에서 글을 깨우친 것처럼 일대 변혁이 일어 것이다.

십리 아랫동네엔 70년대 초반에 방안이 환해졌으나 우리 동네까지 전깃줄이 도착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년 전에 들어왔다.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따라 거기까지 오기에 그리 힘들었던가?

 

 
   
  ^^^▲ 실내용 작은 애자
ⓒ 김규환^^^
 
 


전봇대 세우고 애자에 전선 끼우느라 논 망가져도 어쩔 수 없는 일

1978년 7월 초로 돌아가 보자. 2모작 모내기가 다 끝난 상태에서 콘크리트 전봇대를 묻느라 다시 땅을 팠던 때를 기억한다. 전공(電工)들이 무논에 첨벙첨벙 휘젓고 돌아다니니 논 주인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긴 가뭄 끝에 가까스로 모내기를 해놓았는데 논배미 한가운데에 시멘트 덩어리가 들어왔으니 달가워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50여 미터를 기준으로 양장굴곡 신작로와는 별개로 직선으로 놓이니 누구 땅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먼저 땅을 판다. 전봇대가 군대군대 놓인다. 둥근 전선 캐이블이 곳곳에 놓였다. 학교 마을에서 지선(地線)으로 갈려온 거리가 800여 미터 가량으로 길 보다 절반 가량 단축이 되었다.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 대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전공들이 영차영차 지렛대와 거중기를 이용하여 반(半) 수동으로 전봇대를 세우는 장면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묻힐 부분에 두 덩어리의 시멘트 덩어리를 넣어 조립하고 10미터나 되는 기다란 덩어리를 일으켜 세운다.

그 날 나는 그 큰 밧줄을 처음 봤다. 가까이서 지켜보지도 못하게 하므로 먼발치에서 보면 가끔은 그 무거운 덩어리 기둥이 일순간 넘어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옆 마을에서는 그 순간 근처에 있던 아이가 전봇대에 맞아 죽는 일이 있어 사흘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미끌미끌한 전봇대를 탄다. “칙칙” “척척” 치켜올리며 복대에 의지하여 두 손으로 위로 올리며 발로 힘껏 차 오른다. 신기한 방식이었는데 훈련된 기술자들이어서 그런지 꽤 잘 올랐다.

선을 걸칠 철관을 박고 애자(碍子)를 끼워 전선을 죽죽 끼우고 철사로 감아 전선을 연결해 나갔다. 그 날 이후로 집안 빨랫줄에서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래하던 제비들은 전깃줄에 “쭈루루룩” 늘어서서 놀게된다. 새로운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이러기를 몇 해를 보냈을까? 고압선에 감전이 되어서인지 갈색 배통아지를 가진 제비 자체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변압기와 두꺼비통 그리고, 뇌물의 증거

 

 
   
  ^^^▲ 전봇대우리마을에는 단상이 들어왔습니다.
ⓒ 김규환^^^
 
 

한편 마을 주요지점에는 변압기(變壓器)가 설치되었다. 몇 만 볼트의 고전압(高電壓)으로 바로 집으로 들어올 수 없기에 전압을 220V으로 다운시키려면 필수 항목이었다. 그 변압기에서 집으로 인입선(引入線)을 따서 꺽자 철판을 서까래에 못을 박아 붙인다. 드디어 집 앞에서 전기가 들어오려고 서성이고 있었다.

“똑! 똑! 똑! 주인장 계시오?” 하는 듯, “촌놈들아! 전기 불 오래 기다렸지?” 하는 듯 하면서 말이다.

이 때 집에는 누군가 있으면서 동네 공판장에서 음료수라도 미리 사다놓고 전공(電工) 아저씨를 맞아야 한다. 집 내부로 선이 들어오고 이어 각 방마다 일괄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전봇대 한곳에서 최소 다섯 집 정도는 끌어다 써야 하므로 어떤 집은 가장 불편한 곳에 두꺼비집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열여덟 열아홉 아리따운 처녀가 있는 집엔 편리하고 접근이 용이한 곳에 잘 달아주기도 했다.

우리 집은 그 집을 팔고 나올 때까지 두고두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니 두꺼비통과 계량기가 있는 곳에 항상 사다리를 뒤뚱뒤뚱 붙여놓는 수밖에 없도록 날림 공사를 한 것이다. 그러니 퓨즈 한 번 나가는 날에는 밤낮 없이 고생길이 펼쳐진 것이다.

 

 
   
  ^^^▲ 오래된 형광등
ⓒ 김규환^^^
 
 


서까래가 훤히 보이던 집에 도배를 하게 되는 계기

보름 여 공사를 마치고 마을로 진입에 성공하고 이어 서둘러 집으로 들어온 전선은 까만색 한 줄과 빨간색 또 하나의 줄이 작은 애자를 타고 마루에서 직선으로 갔다가 각 방 천장 벽을 뚫어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기어 들어가서는 방 정 중앙 서까래에 나사못을 박고 그 까만 줄을 매달아 소켓을 꽂는 걸로 일을 마무리했다.

이미 있던 천장도배는 전기 공사를 한답시고 다 뜯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때까지 천장이 없던 경우 그걸 기화로 철사를 사방팔방 얼기설기 엮어 초벌로 신문지를 붙이고 사람 눈에 보이는 겉쪽으로는 벽지를 사다가 도배를 하게 되었다.

귀신 나올 것 같고 쥐가 언제 뛰어내릴지 모르는 형국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이후론 그 천장이 쥐새끼들의 놀이터가 되어 밤잠 설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해질 무렵 불을 켜면... 도시 외곽에 있는 괴물같은 철탑도 생각하기 나름
ⓒ 김규환^^^
 
 


서울 처음 온 날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전기 불

그렇게 해서 방으로 들어온 전기 줄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온가족이 다 모여 점등식에 참여했다. 사다둔 백열등을 끼워두고 ‘하나 둘 셋’을 거꾸로 부르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동네에 동시에 전기를 흘리면 일시에 불이 환하게 켜진다. 방마다 마루마다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는가 확인하기 위해 모두 켜 놓았다.

필라멘트가 빨갛게 달궈지더니 불빛이 고루 퍼져 빛이 전구에 가득했다. 어둠침침한 곳까지 엄청난 빛을 내리쬔다. 온 동네에 불이 난 듯 했다.

“야~ 대단하다.”
“엄마, 엄청 밝아부요. 큰 집도 그러네.”
“와~, 이렇게 환할 수가?”
“30촉 짜리가 이 정도면 60촉 짜리는 보통이 아니겠네.”

불을 보았다. 나는 빛을 보았다. 밤에 방구석 이불 속에서 머뭇거리지 않아도 된다. 코에 시커먼 그을음이 들어찰 일도 없다. 이제 밤은 더 이상 음침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 충격은 내가 중학교 때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 처음 내렸을 때보다 더했다. 아파트에 빌딩 숲을 지나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문명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 계기가 우리 집에 전기 들어온 날이다. 그 날 밤 전등 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 소켓을 구하기 힘들어 집에서 갓을 벗기고 찍은 사진이라 영 폼이 나지 않습니다. 안개처리 된 것도 구해야 되는데 참 일이 많군요.
ⓒ 김규환^^^
 
 


속 깨나 썩였던 정전과 퓨즈갈기

처음엔 두랄루민 퓨즈를 한 통씩 나눠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다. 걸핏하면 전기가 합선이 되어 나가기 일쑤여서 쓰던 걸 연결해서 재 사용하기도 하고 급할 때는 화재 위험이 높은 일반 철사를 구부려서 대체하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담배 갑 은박지나 껌 종이를 겉이 은박이 나오게 하여 둘둘 말아 퓨즈 대용으로 썼다. 차단기도 달아주지 않았던 초기에는 전기에 적응하느라 저녁 시간을 허비한 경우가 허다했다. 가장 큰 원인은 직접 손으로 전구 옆에 달린 단추-갈색과 흰색으로 구분되어 있는 똑딱이를 만지며 불을 꺼야하는 데 있었다.

모든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집마다 감전 사고가 잇달았다. 물을 만지고 전구가 매달린 소켓을 직접 만지니 “짜르르” 그 떨리는 220V의 전기 맛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온몸이 꼬이며 옴짝달싹 못하는 전기 감전의 그 짜릿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쥐내림과 비교할 수 있을까.

마을 청년들이 조금 전기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 일이 자주 발생했다. 원선 하나에 보조 선을 하나 끌어 누워서도 끄고 켤 수 있는 위치에 스위치를 달고 나서부터 그런 일이 조금 줄어들었다. 자비와 자신의 기술력 그리고 전기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사라진 뒤에나 가능했다. 그을음과 아궁이 고열에 노출된 부엌에서는 이 마저 쉬 해결되지 않았다.

 

 
   
  ^^^▲ 냄새 풀풀나는 화장실에 꽂혀있던 꼬마전구. 파랑 빨강 노랑색을 꽂은 경우도 많았었지요?
ⓒ 김규환^^^
 
 

화장실에는 꼬추처럼 생긴 꼬마 전구

전기가 들어왔다고 해서 마냥 켜둘 수도 없었다. 그놈의 전기세 고지서 한번 오는 날에는 별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불꺼라.” “얼른 자라.” “아직도 안 자냐?” “안 자고 뭐혀?”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면 “자요.” “잡니다.” “알았어요.”로 시간을 연장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아예 직접 오셔서 불을 끄고 가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 재래식 변소엔 5촉(燭, W)짜리 꼬마전구나 꼬추 전구를 달아 그 통에 빠지지 않게만 했다. 그 작은 꼬마전구와 야릇한 화장실 냄새의 조화에 여름밤엔 모기까지 엉덩이를 가만 놔두질 않으니 화장실 가기 참 겁이 났다.

초기에는 백열등이었다가 몇 년 지나고 나서 형광등이 절전 효과가 크다는 걸 알게된 집부터 서서히 백열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도둑전기와 청년들의 실험

도둑질 방법도 다양하다. 지금도 공장 지대에선 도둑 전기를 쓰는 곳이 많다지만 전기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산골짜기 마을에서도 도둑 전기를 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계량기 까만 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무척 힘들었다. 가옥마다 들어오는 바깥 지점에서 선을 몰래 따서 끌어와 계량기 안쪽에 연결시키면 되었으니 말이다. 도둑 전기 잡는 게 한 때 검침원의 일이었으니 그 먼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내리는 일도 버거웠을 것이다.

전공들은 전기가 통하는 걸 확인하자마자 공사를 마무리하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청년들은 다음날 전공들이 다 철수하자 동네 길바닥에 나뒹구는 선을 구해서 조막 만한 조리를 만들었다.

논 김매는 것 빼고 한가해진 때라 동네 앞 도랑물에 선을 연결하여 푹푹 물고기를 "지지지직" 지졌다. 물이 "팍팍" 튀어 오른다. 물고기도 종류별도 후두둑 나가떨어진다. 하얗게 뜬 그 물고기 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맑고 깨끗한 곳에 가재가 사라진 것은 그 날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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