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6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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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6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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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비 서거 (2)

 
   
  ▲ 작고하기 수년 전의 윤비  
 

순종의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윤 비는 왕제인 영친왕 이 은을 세자로 책봉하시고 슬픔을 달래기도 하였으나 이미 이때는 나라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영친왕마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왕족 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을 하게되니 윤 비의 망극함은 더욱 슬프고 고독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윤 비가 친가를 떠나 입궁한 뒤 그의 생부 윤택영은 딸이 왕비가 되었어도 빚에 쪼들리는 생활에 가난하게 살아야했다.

이는 그의 딸 윤 비가 동궁비로 간택되어 입궁할 때를 전후하여 축하객들이 끊일 날이 없어 접대비로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택영의 형인 윤덕영은 조카인 윤 비의 입궐로 상당한 지위에 올라 권세와 금력을 한손에 쥐고 호화스런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 윤택영의 생활에는 아랑 곳 하지 않았다. 윤 비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비록 황후의 몸이지만 미약한 여성의 힘으로 친가에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천성이 청렴한 윤비로서는 왕가에 높은 자리에서 감히 사가인 친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던 중 순종의 장례날이었다. 입궁한 지 20년만에 생부 윤택영을 처음으로 만났다. 윤 비는 빚에 쪼들리면서 살아가는 아버지의 수척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날은 국상을 치러야 할 중대한 시기였다.

윤택영은 가깝게는 친딸이며 또한 지존인 황후에게 장례를 치러야 할 슬픔에 더욱 아픔을 줄까봐 조용히 중궁전에서 물러나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이같은 사정을 아는 이는 없었다. 오직 윤비 자신만이 삼켜야 했던 여인으로서의 슬픔이었다.

8. 15해방을 맞은 윤비는 입궁한 지 40년만에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으나 윤비는 거처인 창덕궁 낙선재에서 조용히 일생을 보내며 바깥 세상과 절연하고 살았다. 6. 25전쟁과 수복 때에도 허물어진 골방에서 온갖 고초를 극복해 나갔으니 조선 왕실의 영락의 슬픔이 오직 이 여인 한몸에만 비치는 듯 했다.

평생 윤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셔온 김상궁은 윤비가 평생 중 가장 기뻐하던 날은 홀로 낙선재에서 고독하게 지내시다가 영친왕 이은의 귀국 소식을 들었을 때라고 했다. 윤비가 평민으로 지내다가 친척으로서의 이은을 만나는 기쁨이 오죽했을까?

윤비는 말년에 불도에 귀의하여 법명을 윤대지월 이라고 하였으며 평생에 못 풀었던 한을 내세에 맡기고자 한 것도 60년의 궁중생활에서 몸소 느낀 시달림이 연약한 여인으로서 너무나 벅찼기 때문이었으리라.

윤비가 운명하던 날 순정효 황후 해평 윤씨 장의위원회는 윤비의 장례식을 11일장으로 정하고 장례 스케줄에 따라 2월 13일 오전 8시 10분 자손들의 마지막 고별을 고하는 견전의를 윤비가 평생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 영효전에서 올렸다. 이날 전국에서 문상한 조객수는 연 1만 1천 1백 41명에 달하였고 장례식날인 13일 아침에는 13만의 인파가 윤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메우고 슬퍼했다.

윤비의 운구는 아침 10시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발인되어 신설동 로터리까지 도보로 구슬픈 행렬을 이으며 서서히 움직였다. 연도의 시민들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주인이 가는 길을 슬퍼하며 백발이 성성한 어느 노파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기도 했다.

원래 장례 스케줄에는 신설동 로타리에서 노제를 지내기로 되어 있었으나 몰려드는 인파로 노제는 생략하고 곧장 자동차로 장지인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소재 유릉에 도착했다. 곧 이어 신을 위한 첫 제사인 초우제를 지내고 하오 3시 임종의 영결식인 견례의 하관을 시작, 순종과 합장을 하였다.

4시 40분 신주를 모신 행렬이 떠나오는 반우반차의 식을 끝으로 윤비의 장의는 막을 내렸다. 윤비의 신주는 1년 동안 낙선재 영효전에 모시기로 하고 평생을 윤비와 함께 해온 김상궁이 맡기로 했다.

윤비의 일생은 이렇게 끝났지만 생전에 청렴하고 고고한 성품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생활은 윤비가 써놓은 유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윤비가 죽기 전 김상궁을 통해 써 놓은 유언장에는 "장례는 불교식으로 간소하게 하되 일체 곡을 금하고, 1년상으로 할 것이며 남은 재산을 나와 일생을 같이해온 김상궁에게 돌아가게 해주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니 윤비의 자상한 인정이 넘쳐 있었다.

김상궁 또한, 13세의 나이로 윤비와 함께 입궁하여 60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이 윤비 곁에서 보좌해오며 마지막 윤비의 임종을 지켜 본 여인으로 현대 여성들에게 그 성스런 희생정신을 본받을 만한 산 표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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