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5년 대한민국 역사에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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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5년 대한민국 역사에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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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 서거

 
   
  ▲ 1965년 7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식  
 

1875년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지던 전 해에 태어난 인간 이승만은 이 시대의 많은 선각자들이 그러했듯이 밀어닥친 열강들의 힘의 각축에서 오는 극도의 문란한 정치와 도탄에 빠진 민생,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정부의 치정을 보다 못해 개혁운동에 나섰다.

그가 서양 문화에 깊이 빠지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연유에서였다.

그는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일시 실명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경선공은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여, 진고개에 있는 어느 일본인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일인 의사는 몇방울의 약을 눈에 넣어주고 나서 사흘이면 낫겠다고 했다.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쳐온 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문명과의 접촉을 일인을 통해서 받았던 것이다. 6대 독자인 그는 전통적 한문교육을 받고 13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서양 문명에의 깊은 관심에 따라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지 열 달이 못되어 그는 이 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서양과 서양문명을 배워 알았고 미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고, 훗날 망명지를 미국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청년 이승만이 처음으로 정치에 투신한 것은 1895년 민비 살해에 관한 설욕송모혐의로 황해도 평산 누님댁에 피신해 있다가 이듬해 상경, 서재필박사의 협성회에 가입하면서 부터였다. 그때 협성회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 계몽하는데 있었다.

그는 주간지 협성회보의 주필이 되었으며 곧 "매일신문"을 발간하고 "제국신문"을 일간으로 창간했다. 더불어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국정개혁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황국협회와 정부의 모함으로 인해 왕위폐지, 정부타도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 사형선고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후에 개화파의 집권으로 7년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풀려 나왔으나 이 7년의 감옥살이는 그의 일생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했고, 갖은 악형을 받아 삶을 단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출옥한 그는 1904년 11월 민영환, 한규설 두 사람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국무성은 냉대만 할 뿐이었다. 루즈벨트도 노일 전쟁에서 힘의 우위를 과시한 일본을 한국에서의 우위권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2월, 종교관계 장학금으로 조지 워싱톤 대학에 입학했고 1908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어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에 미친 국외중립의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그는 다시 루즈벨트를 찾아가 조국광복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YMCA사무원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런 얼마 후 한국 기독교 음모 사건으로 1902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만 했다. 이로써 33년간의 긴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에서 그는 다방면에 걸쳐 일제의 침탈과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프리스턴 대학 시절의 총장이던 우드로 윌슨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윌슨도 이승만을 "애국심이 강하고 조국과 국민을 위해 커다란 정열을 가진 사나이"라고 높이 평가해 주었다 한다. 3. 1 독립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자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에서 상해로 건너갔다.

일본은 이승만의 상해 행을 탐지하고 그의 목에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관속에 누워 상해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법론은 김구나 안창호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사적으로 일본을 괴롭혀야 한다는 김구, 민족정신 개조를 방법으로 실천한 안창호에 비해 이승만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국제외교 활동에 의한 독립운동을 신념으로 실천했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독립되고 이승만은 그해 10월 16일 30년만에 귀국했다. 귀국한 이승만은 모든 정파, 단체의 대동 단결을 외치며 대권을 향해 노정치가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시작 되었고, 그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단독 입후보 당선되었으며, 이어 의장,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자체 정치조직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인공파"와 김구의 "임정파"가 가장 큰 정치 세력이었다. 그는 여기에 맞설만한 정치조직이 없었는데, 독립투쟁 경력을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했던 한민당에서 이승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한민당내각"을 조직하지 않자, 여기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갈등이 생겼고 여기서 그의 집권 중 여야의 싸움이 비롯된 것이다. 이승만은 신생조국의 대통령이 된 후부터 왕권에 가까운 절대 권력을 혼자서 쥐고 휘둘러댔다.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그는 여론을 무시한 채 인의 장막에 쌓여 있었다. 1948년 6월, 제헌국회 의사당에서의 내각책임제와 의원헌법 초안에 반대한 그의 원맨쉽은 "만일 원안대로 처리된다면 나 같은 사람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국민운동이나 하겠습니다"라고 대갈 일성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의 행동에서 잘 표현되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완고한 원맨쉽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의 5. 26 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등의 폭력과 억지에 의한 대통령자리 지키기 등등은 그의 인기를 깎아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들이었다. 어쨌든 이승만은 반공과 항일의 화신으로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을 거부했으며 단독 북진과 북진통일을 고집했다.

그의 반공포로 석방은 온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을 당황하게 했으며 심지어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입국마저 거부, 중립국에의 송환을 바라는 포로들을 미군이 공수하게 한 것은 유명하며 고집을 부리며 휴전을 받아들이고 한미방위조약으로 한국의 방위를 미국에 묶어놓은 것은 그의 큰 외교적 성공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국부로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이승만, 그를 결정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3. 15 부정선거였다. 그가 인의장막에 쌓여 비록 사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그가 총애하고 그가 등용한 인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는 마침내 4. 19로 비화했고 마침내는 그의 운명을 몰락시킨 것이다.

재임 12년 그의 만년사는 신생한국의 건국사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의 사들에 의하여 내려질 것이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좌파정권 10년이 빚은 한민족의 파란많은 근대사와 너무나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5년동안 망명생활에서의 운명, 관에 담겨 고국을 찾은 그의 유해는 1965년 7월 27일 국립묘지에 묻혔다.

국장, 국민장 등으로 장례식에 대한 논란을 빚었지만 결국 가족장으로 뼈를 조국 땅에 묻고 싶다던 고인의 소망대로 공작봉 중턱에 마련된 유택에 영원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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