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평양으로 향하며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 ||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6분 평양 방문길에 오른 노무현은 경의선 도로에 중앙분계선(MDL) 표시로 약 1m 너비로 그려진 황색 띠를 넘으면서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 이라고 말 했다.
김일성 남침전쟁
1950년 6월 25일(일) 새벽 4시 30분을 전후해서 서쪽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임진강남안-고량포-초성리-양문리-춘천북방-남전리-주문진을 잇는 38선 전역에서 북괴군의 야포 600여문과 박격포 1000여문이 일제히 불을 뿜으면서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노무현 당신은 코흘리개 네 살 바기 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소련 주도하의 국제공산주의 세력팽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자유진영 간의 국제전이 바로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 된 한국전쟁이었으며 이 전쟁에서 피아 600만여 명의 인명이 살상 됐다는 사실쯤은 배워서 알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가 부산교두보만 남겨서 ‘무력적화통일’의 꿈이 무르익을 무렵 맥아더 장군이 뜻 밖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시켜 전선이 두 동강 나는 바람에 패주를 거듭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 하였다.
지루한 휴전협상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겨우 전세를 만회 하는 듯 했다가 제공권과 제해권을 빼앗긴 김일성-모택동 침략군은 궤멸의 위기에 몰리고 소련마저 김일성을 포기하려는 기미를 보이면서 소련의 UN대표 마리크가 ‘휴전’을 제의한 것을 계기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1차 정전회담이 열렸었다.
제 1차 개성 정전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로 실랑이만 벌이느라 회담개시 한 달 여 만인 8월 22일에 중단했으나 10월 25일 회담장을 판문점으로 옮겨 지루한 담판이 계속되다가 1953년 3월 5일 김일성이 하늘같이 믿었던 스타린이 사망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北이 만든 민족의 장벽
2일 오전 노무현이 넘은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 27일에 서명 발효 된 ‘휴전협정’ 제 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1.2.3.4항에 의해 획정 유지 돼온 것으로 궤멸에 직면했던 김일성에게는 재생의 ‘生命線’ 이었으며 대한민국에게는 北의 재 남침 적화 위협을 극복하고 세계 10위권 强 小國으로 성장 발전할 기회를 보장해 준 ‘平和線’ 이었다.
휴전선은 김정일과 그 졸개들의 주장처럼 美帝 침략군의 북침전쟁으로 인해서 민족을 갈라놓은 線이 아니라 해방 후 군정을 위해 4년간 주둔했다가 1949년 6월 30일 일본으로 완전 철수한 미군을 1년도 채 안 돼서 1950년 6.25남침으로 다시 불러들인 장본인이 김일성이며 노무현이 걸어서 넘은 MDL 이야말로《北이 갈라놓은 민족의 장벽》인 것이다.
노무현이 할 일
이제 노무현이 할 일은 남침전범집단 수괴 김정일에게 6.25남침 시인사과와 대남침투 및 무력적화통일 포기 선언과 남침으로 인해 생긴 ‘민족의 장벽’을 철거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해군력은 커녕 조각배 한척 변변히 없던 김일성에게 압록강 하구에서 나진 청진 앞바다까지 동서해상 도서 관할권을 인계해주고 안전을 보장해준 NLL에 감사하라고 요구해야 만 한다.
알아야 면장도 한다지만 대통령이야 말로 알아야 한다. 참모도 많고 비서관도 많고 각료도 많고 장차관도 많은 데 국가의 명운이 걸린 남북정상회담에 나서는 대통령에게 ‘안보정세교육’ 하나 제대로 시킬 [者]가 대한민국에 없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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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이름함부로 불러대며 개풀뜻는소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