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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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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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충정작전의 비화"전남도청 폭탄 뇌관제거"?

5.18 광주항쟁사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 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카빈소총.M1소총등 총기류 2천5백 여정 수만발의 실탄, 다이너마이트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 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 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光州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 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광주와 인근지역에서 구한 모든 총기와 탄약류은 일단 도청 2층 식당 에 모아졌고 그중 폭약류는 다시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폭약반으로 활약했던 梁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 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23일 梁씨를 포함한 9명이 처음으 로 회의를 열고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철저히 지켜야 하니 원치않는 사 람은 폭약반에서 나가라고 하자 2명이 나가고 7명이 남았다. 이후에도 2명이 줄어 항쟁 마지막까지 폭약반에 남은 사람은 모두 5명. 文영동. 金영복.梁홍범.朴선재.姜남열씨였고 이중 文영동과 金영복씨가 주도적 인 역할을 했다.

당시 폭약류량은 약 리어카 2-3대 분량. 폭약반은 도청내의 사람들에 게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 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폭약반은 폭약반출을 철저히 금지했다.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라도 폭약을 박스에 반정도만 채워주었고 그럴때마다 책임자 들을 불러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막무가내로 폭약을 가져가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 소위 '계엄군과의 내통'으로 알려진 뇌관제거 사건이 벌 어졌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文영동.金영복씨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文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金基錫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 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文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같은 사실 을 알리고 전교사에서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한다는데 폭약 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 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 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날 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金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 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 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 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들은 지하실에 있던 폭약류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의 안전을 위해 선의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뇌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위한 충정 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梁씨는 "뇌관을 제거해 안전하게 보관한 자신들이 역사의 죄인이라고 는 생각지 않는다"며 "지금도 폭약반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뇌관 제거는 전교사 金基錫 부사령관과 도청 항쟁지도부와의 교감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은 96년 7월 15일 5.18 22차 공판에 나와 "전 교사 부사령관으로서 광주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25 일 항쟁지도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폭약반을 소개받았고 이날 오후 폭 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만난 뒤 뇌관제거를 위해 특수요원 파견 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85년 6월7일 尹誠敏 국방장관이 국회 국방위에 출석, 발표 한 '光州사태 보고'라는 문건에도 "도청지하실에 모아둔 폭발물의 폭발 방지를 위해 폭약반의 양해아래 특수요원을 투입,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하는데 성공, 광주시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힘 으로써 신군부와 항쟁지도부와의 사전교감설을 확인해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취해졌던 뇌관제거. 결국은 계엄군에게 가장 위 협적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다이 너마이트를 터트리겠다며 버텨왔던 시민군. 마지막 보루였던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되자 도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신군부는 그들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폭약류 뇌관이 제거되자 상무충정작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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