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월시' 미국 최초의 반공주의자
스크롤 이동 상태바
'에드먼드 월시' 미국 최초의 반공주의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막강한 지위를 이용해서 공산주의와 전쟁을 벌였다

 
   
  ▲ 맥아더 장군과 에드먼드 월시 신부.1948년 일본 도쿄에서  
 

함세웅 등 일단의 ‘붉은 사제’들의 행동거지는 정말 역겹다. 그러나 우리나하고 싶다. 한국의 천주교에는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정의채 몬시뇰, 변기영 몬시뇰 등 만인이 존중하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동유럽을 공산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인류 역사를 바꾸었음을 생각하면, 한국의 ‘붉은 사제’들이란 사제라고 부를 수도 없는, 먼지 같이 하찮은 존재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지만, 가톨릭 교회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의 중심에 서왔다.

그 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조지타운대학 외교대학장과 부총장을 지낸 에드먼라 천주교 전체에 비한다면 그런 사제(司祭) 같지 않은 사제는 작은 일부라고 생각드 월시(Edmund Walsh) 신부(神父)이다.

에드먼드 월시 신부는 가히 미국 최초의 반공주의자(The first anti-communist in the U.S.)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월시 신부는 공산주의 소련의 가공한 위험을 처음으로 경고한 선지자였고,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해 투쟁한 성직자이자 지식인이었다.

에드먼드 월시 : 출생과 성장

에드먼드 월시는 1885년 10월에 보스턴에서 아일랜드계 부모의 여섯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턴의 경찰관이었다. 총명한 월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수이트 교단이 운영하는 보스턴 칼리지의 부속 고교를 장학생으로 다녔다. 고교 졸업 후에는 메릴랜드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司祭)가 되는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시 제수이트 교단이 운영하는 조지타운 대학에 1년 동안 등록해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9년에서 1912년까지 조지타운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 후에는 영국의 런던경제대학에 유학해서 견문을 넓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월시는 조지타운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가 조지타운 대학과 제수이트 교단에서 젊은 사제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미국 가톨릭 교단은 애국심에 충만해 있었다. 미국 가톨릭 교단의 지도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미국적 가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도덕적 힘을 갖출 때 비로소 강국이 된다고 믿었으며, 가톨릭 교회가 미국의 도덕적 횃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6년에 월시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뉴욕시에서 잠시 사목(司牧)을 한 후 다시 조지타운 대학으로 돌아왔다.

조지타운 외교대학 창설

그 즈음 조지타운 대학에선 외교대학을 만드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1차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유럽에 머물면서 치열한 외교전선을 보았던 월시도 이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9년 조지타운 대학은 미국 최초로 외교대학(School of Foreign Service)을 창설했고, 월시가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조지타운 대학의 외교대학은 미국의 외교관을 길러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소련의 진실을 보다

1922년 월시는 바티칸의 부탁으로 기근에 허덕이는 러시아에 구호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가톨릭 교단이 펼친 최초의 국제구호 활동을 월시가 책임진 것이다. 바티칸이 수집한 식량을 기근에 시달리는 러시아 각지에 배분하던 월시는 충격에 빠졌다.

그가 목격한 것은 새로 생긴 공산주의 정권의 만행이었다. 공산정권이 기근을 핑계로 교회를 파괴하고 사제들을 살해하는 현장을 보고 그는 특히 경악했다. 월시가 러시아에 머물던 1923년까지 바티칸이 보낸 구호물자는 매일 158,000명의 러시아인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면서 월시는 1922년 한해 동안 28명의 러시아 주교와 1200명 이상의 러시아 신부가 살해되거나 처형되었다고 상세히 기록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한 탄압을 끝낸 공산정권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박해했다. 1923년 3월 소련 군대는 로마 가톨릭 주교와 14명의 신부를 체포해서 반역죄로 재판하고 처형했다.

월시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 온 월시는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사악한 체제이며, 전 세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산주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다

미국에 돌아 온 월시는 조지타운 대학의 외교대학장과 제수이트 교단의 신부라는 막강한 지위를 이용해서 공산주의와 전쟁을 벌였다. 월시는 소련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지구상의 모든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대학과 언론에 자리잡은 건방진 식자층(識者層)은 ‘공산주의 히스테리’라고 빈정거렸다.

월시는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억제력은 종교라고 믿었다. 그는 종교가 갖고 있는 사회적 정의, 자선, 그리고 구원의 힘이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는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는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계기가 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는 또한 뉴딜 정이 바보짓이라면서, 루스벨트가 불러들인 젊은 개혁주의자들을 풋내기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루스벨트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해 확실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전을 한 사람이 바로 월시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 월시가 옳았음이 밝혀졌다.

독일과 이태리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월시는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세계 혁명을 위한 동일한 목적을 가졌다고 싸잡아서 맹렬히 비난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트루만 대통령은 뉘른베르크 전범(戰犯)재판에 월시가 미국측 검사의 자문관으로 참여해 주도록 요청했다.

월시는 주로 히틀러가 자행한 종교탄압에 대해서 자문을 했는데, 그는 독일 전역을 방문해서 나치에 의한 가톨릭 교회 탄압과 사제 학살을 조사했다. 월시가 남긴 기록은 2차 대전 당시 바티칸이 히틀러에 동조했을 것이라는 항간(巷間)의 의혹을 불식시키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냉전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2차 대전 후에 냉전이 시작되자 월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알리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월시는 그 전쟁이 한국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고 말했다.

친소(親蘇)성향이던 루스벨트와 달리 트루만과 아이젠하워는 확실한 반공주의자였다. 월시는 트루만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미국의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월시가 학장으로 있던 조지타운 외교대학은 공산주의와 싸울 외교관을 무장시키는 사관학교와 같았다. 그는 미국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등 안보관련 기관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했다.

그는 조지 케난의 대소(對蘇) 봉쇄전략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난했다. 문자 그대로, 월시는 공산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해 태어난 십자군이었다.

공산주의와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서 그는 에드가 후버 FBI 국장,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등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들의 만남을 두고 월시가 매카시한테 공산주의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으라고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매카시는 월시를 만나기 전부터 반공주의자였다. 매카시가 제수이트 교단이 운영하는 마케트 대학을 졸업한 가톨릭 신자이었기에, 진보 언론이 반공주의가 제수이트 교단의 ‘음모’인 것처럼 각색을 했던 것이다.

월시는 너무 바쁘게 살았고, 너무 의욕적으로 살았다. 많은 책과 글을 썼고 강연을 자주 했다. 건강을 해친 그는 1953년에 가벼운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결국 1956년 10월31일 70세 생일을 3주 앞두고 선종(善終)했다. 1958년 조지타운 대학은 월시를 기념하기 위해 외교대학을 에드먼드 월시 스쿨(Edmund Walsh School of Foreign Service)로 명명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껍데기 2007-01-30 15:31:55
19세기.20세기 낡은 사고로 뭘하겠다는 건가?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