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戰士) 진 커크패트릭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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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士) 진 커크패트릭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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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독재체제에 정면 승부하여 공산주의를 멸망의 길로 몰고 간 인물

 
   
  ^^^▲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레이건 행정부에서 유엔 주재 대사, 네오콘 이론가로 공산독재체제에 대해 정면 승부수를 던져서 공산주의를 멸망의 길로 몰고 간 인물이다.^^^  
 

지난 12월 7일, 레이건 행정부에서 유엔 주재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이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조선일보 등 몇몇 신문은 커크패트릭이 미국 최초의 여성 주(駐)유엔 대사이고, 네오콘 이론가였다고 소개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커크패트릭를 그렇게 간단하게 다룰 수는 없다. 그녀는 레이건 대통령의 대외정책을 국제무대에서 충실히 반영했을 뿐더러, 레이건의 사고(思考)에도 영향을 준 대단한 사상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커크패트릭을 추모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공산독재체제에 대해 정면 승부수를 던져서 공산주의를 멸망의 길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는 대한민국의 애국세력에게 커크패트릭은 훌륭한 귀감인 것이다.

출생과 성장

1926년 11월에 오클라호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진 커크패트릭의 결혼 전 이름은 진 두안 조던(Jeane Duane Jordan)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월체 조단은 석유 노다지의 꿈을 쫓다가 재산을 탕진해서 가족을 데리고 일리노이 주(州)로 이사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오클라호마에서 사회당을 세운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는 손자 손녀에게 자본주의의 폐단과 사회주의의 이상(理想)을 가르쳤다.

석유 발견에 실패한 데다가 경제공황이 심해져서 일리노이로 이사를 가던 중 조단 일가는 사회주의 이상주의자 로버트 오웬이 세운 공동체가 있는 인디아나 주 뉴하모니(New Harmony, Indiana)를 지나가게 되었다. 훗날 그녀는 로버트 오웬과 그의 추종자들이 세운 뉴 하모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또 신(神)을 부정한 타락한 반(反)유토피아였다고 회고했다.

일리노이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미주리의 스티픈스 대학을 거쳐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버나드 여대를 졸업한 진은 콜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1950년에 그녀는 콜럼비아에서 영국의 파시즘을 주제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땄는데, 그녀를 지도한 교수는 수정주의 마르크스 학자인 프란츠 노이만이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국무부 정보분석실에 직장을 잡고 일하던 진은 자기보다 15세 많은 정보국(OSS) 요원 출신인 이브론 커크패트릭을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세 아이가 태어났고, 진 커크패트릭은 그런 중에도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밟았다.

1967년, 40이 넘은 나이에 진 커크패트릭은 비로소 조지타운 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됐고, 이듬해 콜럼비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주로 유럽 정치를 가르쳤다.

민주당원 정치학자가 레이건을 만나다

부부가 모두 정치학자인 커크패트릭 내외는 민주당 정치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남편 에브론은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의원(존슨 대통령 아래서 부통령을 지내고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의 외교문제 자문을 지냈다.

그러나 이 부부는 1972년 이후 민주당이 좌경화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이들은 민주당이 해리 트루만, 휴버트 험프리, 헨리 잭슨 같이 반공주의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을 우려의 눈초리로 보았다.

무엇보다 진 커크패트릭은 카터 대통령의 정책을 보고 대단히 실망했다. 그녀는 카터 외교가 실패한 원인을 진단한 평론 ‘독재와 2중기준’(Dictatorships and Double Standards)을 커멘터리(Commentary)지(誌) 1979년 11월호에 기고했다.

이 평론에서 커크패트릭은 카터의 인권외교가 미국의 추락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란의 샤 정권 및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아래에서 있었던 인권유린은 공산독재 및 이슬람 독재가 가져온 인권유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전통적 독재를 공산주의 및 이슬람 독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큰 잘못이며, 그런 점에서 카터의 외교정책은 현실감각을 상실했다고 질타했다.

그녀는 쿠바, 북한, 앙골라 등 마르크스 전체주의는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없지만 브라질, 칠레, 한국, 자이레 등은 점진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있다면서, 두 부류(部類)의 국가를 동일하게 다루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1980년 초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로널드 레이건의 참모로 일하던 리차드 앨런은 커크패트릭의 논평을 레이건에게 보여 주었다. 이를 읽은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을 만나 보고 싶어했고, 그 해 2월 이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에게 자기의 선거를 도와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자, 커크패트릭은 일생을 민주당원으로 있어 온 자기가 어떻게 공화당 대통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자기도 한때는 민주당원이었다고 말 하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1980년 선거에서 승리한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을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이 자신과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합참의장이 참여하는 백악관 국가안보기획팀에 참여하도록 했다. 진 커크패트릭은 미국 최초의 여성 유엔 주재 대사일뿐더러 최고위 안보팀의 구성원으로 대통령의 귀와 마음을 죄우하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실무경험이 없는 학자가 유엔 외교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커크패트릭은 반미(反美)정서가 팽배한 유엔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처했다. 커크패트릭은 미국을 비난하는 40여 개의 제3세계 국가 정부에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하는 퉁명스러운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유엔에서의 제3세계 국가의 표결통계를 국무부에 보내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에 대해 원조를 삭감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공산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들의 선전장(宣傳場)으로 전락한 유엔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향해 거침없는 수식어를 동원해서 공격했다. 대한항공 007편이 격추되었을 때 그녀는 소련 조종사의 녹음을 들려가며 소련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했다.

유엔 주재 대사로서의 일 외에도 커크패트릭은 레이건 1기 행정부의 주요한 대외정책에 깊숙이 간여했다. 그녀는 엘살바도로의 우익 정권을 지지했고, 니카라과의 좌익 군사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반공(反共)게릴라 활동을 지지했다.

그녀는 레이건의 첫 국무장관이던 알렉산더 헤이그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레이건은 이론과 학식면에서 출중한 커크패트릭을 더 좋아했다. 1983년 뉴욕타임스의 윌리엄 사파이어는 커크패트릭이 레이건 행정부 내의 네오콘 서클의 리더라고 지칭하고,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썼다.

1984년 공화당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커크패트릭은 현직 대사이며 민주당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연단에 올라가서 민주당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커크패트릭은 “마르크스주의자 독재자들이 중남미 국가를 유린하고 있는데, 샌프랜시스코 민주당원들은 공산 게릴라와 그들의 배후인 소련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100년이나 된 미국의 정책을 비난한다. 그들은 항상 미국을 먼저 비난한다.”

이 연설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민주당원인 그녀가 민주당을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Blame America First) 정당이라고 부른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당대회를 치른 민주당을 ‘샌프란시스코 민주당원들’이라고 불러, 민주당은 미국의 대중과 멀어진 부류로 격하시킨 것이다. 커크패트릭은 또한 민주당원이 레이건을 지지하는 것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심어주었다.

유엔에서 지친 그녀는 1기 레이건 행정부가 끝나자 대사직을 사임하고 조지타운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로소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 많은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갔다. 조지타운 대학과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연구를 하던 그녀에게 1988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가해 보라는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양했다.

“의지가 힘이다”

1996년에 행한 인터뷰에서 커크패트릭은 권력은 단지 무기와 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신념(personal conviction), 즉 의지(will)에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1980년대 초에 우리는 서방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했으며,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우리는 이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9-11 테러 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지지했지만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그녀는 현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이 지나치게 개입적이지 않은가 우려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심장질환을 앓으면서 외출을 자제했다. 1995년에 남편이 먼저 타계한 데 이어 금년 초에는 큰 아들이 사망해서 심적 타격을 받았다. 레이건과 같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녀는 장로교회를 나갔다.

그리고 지난 12월 7일 늦은 저녁 베데스다의 자택에서 자던 중 심장이 정지해서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평화를 위한 전쟁’(Making War to Keep Peace)의 출간을 한달 앞두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오늘날 대한민국에게 커크패트릭의 일생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야당이라는 한나라당에선 레이건 같은 지도자도 없고, 커크패트릭 같은 이념적 전사(戰士)도 찾아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은 위선과 가식에 병든 나약한 유화(宥和)주의자들 뿐이다.

‘비핵, 반전,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멍청하니 도무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한나라당이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좌파에 물든 한국 사회를 구한다는 것은 코끼리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를 기대하는 꼴이다.

커크패트릭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서 자유를 지키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낸 사람들이 과연 누구이었는지,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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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논객 2006-12-17 21:11:58
이상돈 교수님의 지성과 학식에 다시한번 숙연해 집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익명 2006-12-17 21:13:07
대한민국의 진정한 보수지성의 소리입니다.
우익보수 여러분!!!
이제 공부합시다.
우리가 좌파보다 한수 위라는 것을 보여 줍시다.


손정혁 2006-12-17 21:15:24
이상돈 교수 같은 지성인들이 이땅에는 없다는 것인가?
진정한 보수 지성인들이여 이제 날개를 펴라.....

여기 뉴스타운에 열린 공간으로 오라!!!
많은 우익보수파에게 이상돈 교수처럼 지성의 소리로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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