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조국통일상(賞)’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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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조국통일상(賞)’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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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 농락당한 김구

 
   
  ▲ 1973년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고정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장민호(44.미국명 마이클 장)가 가진 암호를 분석해보니, 그는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다. 이 상은 북한이 ‘자주적 평화통일’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남.북 및 해외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라 한다.

이 상은 광복 45주년을 앞둔 1990년 7월25일 제정됐으며, 그해에 주어진 제1회 수상자는 112명이었다 한다. 이들 수상 대상은 민족지도자, 월북자, 밀입북자, 분신사망자, 대남업무 종사자, 남한 재야인사, 해외 친북인사 등이라 한다.

남한 내 수상자: 김구,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문익환, 임수경, 계훈제(재야원로), 무하마드 깐수(정수일), 장민호(386간첩)

재미 수상자: 양은식(범민련 재미본부 상임의장).

북한 내 수상자: 홍명희, 김용순, 려원구(여운형의 딸),

김구에 대해서는 자료로 말하라

김일성에 농락당한 김구

이승만은 국제정세에 밝아 소련의 야욕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은 4년에 걸쳐 수십만 톤의 피를 흘려가며 일본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했지만, 소련은 항복하기 3일전, 패색이 완연해 있을 때,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으로 진주했다.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그야말로 날도둑이었다.

외국물을 먹은 식자라면 미소공동위원회가 돌아가는 상황만 지켜보아도 소련의 속셈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윌슨 대통령의 제자였기도 했던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 소련의 야욕을 잘 읽고 있었다. 당시 세계의 모든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 만큼 학벌이 화려한 지도자는 없었다.

분석적 시각,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김구에게는 이런 게 형성돼 있지 않았다.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아는 것, 그가 내 건 것은 오직 ‘통일’ 하나 뿐이었다. 가슴에 아무리 뜨거운 애국심이 용광로처럼 불타오른다 해도 머리가 비어 있으면 적에 이용당하고 만다.

‘통일’ 하나만 외치면서 그리고 통일을 명분으로 그는 1948.5.10 선거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남북대표자연석회의’를 스스로 제의하여 김일성-소련 노선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반탁 노선을 걷는 이승만 및 한민당 등의 정당 단체들을 임시정부 구성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데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구가 ‘남북대표자연석회의’를 제의한 것은 이승만을 빼고 자기가 남한의 대표가 되겠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셈에 따라 김구는 1948.5.10에 총선거를 치르겠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1948. 4. 22. 평양에 도착했다. "내가 김일성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에 합의하지 못하면 나는 38선에서 자결할 것이다", 그가 평양에 가지 못하도록 부하들이 자동차 앞에서 우리를 깔아죽이고 가라 만류했지만 그는 담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먼저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임시정부를 만들자”는 소련-김일성의 주장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결국 김구는 '남북조선정당사회지도자협의회'라는 멤버로 등록되어 김일성의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이는 '남조선독립정부수립반대'를 위한 김일성의 계략임과 동시에 이승만과 김구를 동격으로 놓음으로써 김구를 이승만의 반대세력으로 갈라놓으려는 2중적인 포석이었다. 김구는 거기에 놀아난 것이다.

5.10선거: 김구는 서울-평양에서, 김달삼은 제주에서 방해했다!

1948.5.5, 남한으로 돌아 온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조선단선반대전국위원회’를 만들어 단독선거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948년의 제주4.3사태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빨치산의 영웅(?) 김달삼이 일으킨 경찰 학살 사건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였던 스티코프의 비망록에는 1946년의 9.24파업(23만명 참가, 1200여명 검거), 10.1대구 폭동 그리고 1948년의 4.3사건 모두가 스티코프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군자금을 내려보내고, ‘폭력혁명사태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김구는 스티코프-김일성 노선에 서서 5.10 선거를 방해한 것이었다.

1948.5.10일!

인구비례로 북한의 국회의원 100석을 남겨두고 20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1948.5.31. 국회는 189 대 8 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17.일 유사 이래 최초의 민주헌법을 발표했고, 이 헌법에 따라 7.20. 이승만은 200명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김구는 겨우 16표를 얻었다. 당대의 인물은 당대의 사람들이 평가한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평소 안면이 있던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알 4발을 맞고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단독정부에 찬성했다 돌아선 배신자 김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1946.6.3.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공식화되었다. 1947년8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체됐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김구는 처음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반탁을 했다.

1947년12월1일, 김구는 "미소공동위원회로도 안 되고, 소련은 이미 이북에 단독정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는가.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한다는 조건이라면 이박사의 단독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며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수립에 합의했다.

그 후 20일이 지난 12.22일, 김구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박사가 단독정부를 하면 사실상 미군정이 연장된다.” “외국군 철수 후 UN 감시 하에 남북이 의논하여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이라도 먼저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5월 10일로 선거일을 결정했다.

이에 김구는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김규식 등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정치협상을 제안했고, 북한은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남북 조선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는 회답을 보냈다.

김구는 김규식, 김붕준, 박헌영, 백남운, 엄항섭, 이극로, 조소앙, 허헌, 홍명희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이들 이외에도 남한에서는 41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396명이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들 모두는 좌익이거나 색깔이 희미한 군소정당들이었다.

회담은 1948년 4월19일부터 이미 개최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남한의 박헌영과 백남운이 4월 21일에 남한정세를 보고했고, 김구는 22일에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축사를 했다. 그리고 남한의 이승만을 제외시킨 채, 스스로 남한의 제정당의 대표자격으로 외세의 철수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북한이 짜놓은 각본에 의한 것이었고, 북한의 유일한 우익 지도자 조만식도 참여하지 않은 엉터리였다.

북한에 놀아난 죄로 북한에서 영화로 놀림 받는 김구

아래는 당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었던 박갑동 선생의 증언이다(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1946.6.3일,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 천명했다.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지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했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은 “단독정부는 미국과 이승만의 음모이므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때 김구는 북한의 스케쥴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했다.

홍명희는 김구에게 ‘김구, 김구식 이름으로’ 먼저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하라 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제안을 보냈는데도 김일성이 무시했던 것은 순전히 각본에 의한 연극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9.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의 덕에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이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믿고 북한을 다녀온 김구는 “양쪽에 다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을 가진 듯 했다.

북한은 당시의 김구의 방북 대목을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한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쇄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평을 주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가며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친북사상가 문익환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인물들 중에는 김대중, 문익환, 서경원, 한완상 등이 있었다. 당시의 정부는 광주사태를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발표했다. 당시의 대법원은 김대중씨를 좌익으로 규정했고, 광주사태를 좌익인사인 김대중씨가 내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돈을 주어가면서(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과 같이 수사에서는 김상현씨를 통해 정동녕에게 500만원을 준 것만 밝혀냈음) 배후 조종한 사건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사형을 언도했다.

그 후 김대중씨는 이를 군부가 억울하게 뒤집어씌운 누명이라고 뒤집음으로써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김대중은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좌익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전혀 하자가 없다. 이는 1980년 당시의 수사기관 및 대법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1980년도의 사실을 다시 재확인하는데 23년이 걸린 것이다.

광주사태에 관여한 문익환 목사 역시 당시의 수사기관 및 법원은 좌익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에서는 소위 민주화 인사, 통일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미화됐고 북에서는 '조국통일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북한에서 문익환 기념우표를 발행할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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