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무용가 김명수씨 '남편 황석영 결코 용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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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무용가 김명수씨 '남편 황석영 결코 용서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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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그는 너무 쉽게 가족을 버렸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방북, 이후 망명생활을 해가며 황씨의 석방운동을 펼치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아내 김명수(48. 뉴욕 거주)씨가 최근 서울을 찾았다.

황씨는 9일 기자들과 만나 12년 망명생활의 고초와 남편 황씨의 배신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90-91년 방북 당시 둘러본 북한 무용계에 관한 이야기 등을 들려줬다.

무용가인 김씨는 남편을 따라 외아들 호섭(15)군과 함께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시국사범이 돼 독일과 미국에 체류해왔다. 93년 함께 미국에 머물던 황씨가 단신 귀국한 뒤 수감되면서 김씨의 '투쟁'이 시작됐다.

남편이나 친지들로부터 변변한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들의 양육과 생계를 혼자 해결하며 남편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무용가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웨이트리스, 삯바느질을 해가며 근근히 이국생활을 버텼다.

98년 황씨의 석방 소식에 김씨는 '이제 고생이 끝나는구나'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상황은 복잡했고 그해 일시 귀국한 김씨는 남편의 얼굴만 본 뒤 안기부와 검찰의 수사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 황씨로부터 한 통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혼자 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급거 서울을 찾은 김씨에게 황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혼자 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귀국할까 생각도 했지만 황씨는 완강했고 서울로 온대야 마땅히 지낼 곳도 없던 김씨는 하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황씨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황씨는 생활비.양육비도 보내주지 않았고 김씨는 비행기삯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한국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해 미국 영주권을 따면서 한국 방문이 수월해진 김씨는 지난달 귀국해 소문을 확인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혼한 것으로 알고 있더군요. 다들 나를 황석영씨의 '전부인'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물론 아이에게도 너무나 무책임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90년 이후의 생활은 저로서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참고 버텨왔는데...내 자신이 모욕스럽습니다' 김씨는 '내 의지와 상관 없는 월북, 망명으로 잃어버린 내 인생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느냐'며 '그간 내게는 무용도 전혀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고 오직 생존이 관심사였다. 어떤 때는 오히려 춤을 추는 일이 고통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울러 '이런 상황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찾고 싶다는 것'이라며 '이제는 어디에든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지만 이번에 한국을 찾아보니 나는 여기서도 이방인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그간 침묵을 깨고 이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후련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씨는 북한 무용계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그는 91년 방북 당시 무용가 최승희의 애제자이자 양아들로 북한 무용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해춘과 함께 공동안무 작업을 하기도 했다. 북한을 떠나 독일에 머물던 중 송두율 교수를 통해 김해춘의 편지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최근 국내 무용지 「춤」을 통해 답장을 쓰기도 했다.

또 평양음악무용대학의 자모식 무용표기법 연구개발 책임자인 우창석 교수와 공동으로 워크숍을 갖기도 했다. 북한의 자모식 무보법은 유네스코 산하 국제무용협회(CID-UNESCO)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것으로 북한은 1992년 CID-UNESCO 세계총회를 평양에 유치, 세계 무용인들에게 그들이 개발한 이 무보법의 성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씨는 고 김일성 주석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으며 김 주석에게서 100년산 산삼을 받은 적도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북한의 춤은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군무와 총체극 위주로 발달해 안무가라는 개인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무보법(舞譜法)의 필요성이 생긴 것도 이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북한 무용수들은 국가가 관리하기 때문에 일단 뽑히기만 하면 생활에 대한 고민없이 무용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당시 피바다가극단의 단장이 '북한은 먹고 살기 힘들어 전통춤을 지킬 수 없었는데 남한은 아직 그런 것이 남아 있다. 서로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김씨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황씨와 이혼하겠다. 그간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를 책으로 쏟아내는 의식을 통해 내 자신을 씻고 싶다. 앞으로는 내 자신이 무언가를 쌓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북한에서 구한 귀한 자료들도 국내에 기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7살에 발레를 시작해 이화여대에서 현대무용을 공부한 뒤 지금은 인간문화재인 이동안 김숙자 이매방 등에게서 전통춤을 사사했다. 83년 미국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에 유학하기도 했으며 86년 황씨와 결혼, 90년 아들과 함께 독일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망명중인 94년 뉴욕에서 '굿춤'으로 데뷔한 뒤 97년 민족분단과 그에 따른 가족의 고통을 그린 '굿춤 97-망명자의 폐허, 그리고 재생'을 공연하기도 했다. 현재는 뉴욕 링컨센터 공연예술 공공도서관 국제자문위원, 현지 무용평론가협회 회원, 김명수 댄스프로젝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독립기념관 '강인한 한국인' 군상, 세종문화회관 외벽부조 '비천상'을 만든 원로 조각가 김영중씨다.

한편 김씨는 오는 23일 오후 3시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CID-UNESCO 한국본부가 주최하는 '북한무용 현황과 남북 무용교류 전망' 세미나에서 강연하는 한편 북한에서 구한 북한춤 영상자료 등도 소개한다. sisyph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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