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참배, 日 반대 여론 증가 이유
스크롤 이동 상태바
야스쿠니 신사 참배, 日 반대 여론 증가 이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 우파들의 교묘한 언론 플레이, 제2의 대동아 건설 목표

^^^▲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신사 전경^^^
최근 일본 언론들의 총리 및 정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는 보도는 일정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신사 참배 반대 여론이 조사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49%, 50%, 60% 등으로 나타나고 있어 과거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일본 천황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담고 있는 비밀 메모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는 더욱 반대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일본 천황은 일본의 신(神)적 존재이자 일본 존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고 여기고 있다. 일본 천황의 이러한 비밀 메모가 일정 시점에 맞춰 언론에 발표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이제 일본이 정치대국, 군사대국으로 가겠다는 의도를 ‘평화라는 단어로 포장’해 이룩하겠다는 일본 우파들의 숨은 의도가 일본 언론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천황이 A급 전범 14위가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부정적 의사를 표명한 것은 천황은 “평화”를 상징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유포시켜 즉 일본은 “평화의 나라(Peaceful nation)"라는 대외 이미지 향상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이웃국가인 한국과 중국 나아가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정치대국이라는 인상을 전혀 심지 못했으며, 오히려 경제 동물이라는 처참한 이미지만을 생산해왔다.

이러한 일본이 일본 우파의 상징인 차기 총리 유력시 되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에 이어 이를 둘러싼 우파세력들이 저치대국화, 군사대국화 및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진출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착착 달성하기 위한 언론 플레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의 목적이랄 수 있던 “대동아(A Great East Asia)건설”을 이제 다시 재건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의지가 굳게 묻어나는 저간의 일본 언론들의 야스쿠니 참배 반대 여론의 조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서구의 외신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단순히 이웃국가, 아시아 국가간의 논쟁, 나아가 일본의 정치적 장애물이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순진한 것으로 제2의 대동아 건설, 나아가서는 대세계 건설(A Great World)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면서 적극적으로 미국과 손잡고 나가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일본놈 2006-08-13 14:32:08
선조 25년 4월 13일 :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백은 그에게 변소지기를 시켰다. 수길이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관백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신을 삼게 하였는데 역시 정밀하게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관백이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수길은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승직의 길이 열렸다. 이때 국내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관백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수길이 토벌을 자청하였다. 수길이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관백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관백이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수길은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관백이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관백이 시해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길은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관백을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 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金海)·밀양(密陽)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적을 진주(晉州)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일본놈 2 2006-08-13 14:36:35
선조 26년 2월 18일 :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하였다.

“왜적이 전에는 가지고 있던 우마를 전부 팔아 버리더니 이달 20일부터는 진주(晉州)를 공격하려고 밤낮없이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전일에 팔아 버린 우마를 도로 사들입니다. 부산(釜山)·동래(東萊)·서평(西平)·다대포(多大浦) 등지에는 지역을 구획하여 성을 쌓으려고 성터를 설계하는데 주위가 대략 50여 리는 됩니다. 동래창(東萊倉)의 곡식을 부산포(釜山浦)로 옮겨두고 일본 군량은 부산 앞바다의 아차도(阿次島)에 운반해 놓았다고 합니다.”


일본놈 3 2006-08-13 14:39:50
선조 24년 5월 1일 : 풍신수길이 정병 1백만 명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먼저 조선을 점거하고 곧바로 요동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차지하고자 하는 큰 계책을 세웠는데, 이런 계책을 세운 것은 일본이 나라는 작은데 군사는 많아 내란을 막을 수 없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들의 서계와 사신들이 와서 하는 말이 모두가 쳐들어가는 것을 인도해달라는 말이었는데 간혹 우리 나라에서 거절함으로 인하여 조공(朝貢)을 주청(奏請)해 달라는 한두 마디를 변환시켜 유인하는 것뿐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을 만한 말이었겠는가. 대마도 사람들은 신하로서 우리 나라를 섬겨오면서 옷가지나 식량 따위를 조달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본토의 왜를 인도하여 쳐들어 오기에는 낯뜨거운 면이 있고, 또 뒷날에 우리 나라를 다시 섬길 수 없게 되면 온갖 이익을 놓치게 되겠기에 짐짓 분란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처럼 하여 뒷날에 해명할 여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 후에 주화론(主和論)이 미봉책에 그치어 분란이 일어나게 되자 온갖 허물이 한쪽 편의 논의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가 분당(分黨)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일본놈 4 2006-08-13 14:43:47
선조 29년 9월 1일 : 조사가 일본에 들어갔다. 관백이 사신의 관사를 성대하게 장식해 놓고 기다렸는데 하룻밤 사이에 큰 지진이 나서 집이 넘어진 까닭에 다른 집으로 바꿔서 맞이하였다.

풍신수길은 말씨와 태도가 거만하였고 다리에 종기가 났다고 속이고 절을 할 때 무릎도 꿇지 않았으나 접향(接享)과 방향(邦享) 등은 매우 정성껏 하였는데 갑자기 성내어 꾸짖기를 ‘내가 너희 조신(朝臣)과 두 왕자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으니, 조선은 왕자를 사신으로 보내와서 사례함이 마땅하거늘 벼슬이 낮은 사신을 보냈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다. 나는 황상(皇上)의 은전(恩典)에 대해서는 매우 감격하지만 조선은 무력을 가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황신(黃愼) 등을 책망하기를 ‘조선은 네 가지 큰 죄를 지었다. 왕자가 방환(放還)된 뒤에 지금까지 와서 사례하지 않았고, 사신은 반드시 낮은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여 들여보냈으며, 너희는 작은 나라로서 전부터 나를 업신여겨 세공(歲貢)도 바치지 않았고 조빙(朝聘)도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책사(冊使)가 도망쳐 돌아가게 한 일도 다 너희 나라 소행이다.’ 하면서, 국서(國書)와 국폐(國幣)까지 아울러 물리쳤다. 행장은 사사로이 황신 등을 접대했는데 교묘한 말씨로 겸손히 사례할 뿐이었다.


애국지사 2006-08-13 20:10:19
일본은 야스쿠니를 교묘히 이용 세계 정치, 군가강국으로 가는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죽일 놈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