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나의 소박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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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의 소박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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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김구면 나는 이승만대통령이다!'

어머님은 쇼와16년이던 1942년 7월17일 혜화동에서 부유한 가정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밑으로 두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기선교사 출신으로 대학병원장까지 지냈고 작은 아버지는 자유당 초기 국회의원에도 당선된 아주 덕망이는 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운명이 기구한 탓인지 어머님은 그나마 여유롭던 시절 대학교 부근에서 경양식집을 경영하셨지만 이후 하는 일마다 실패하셨기에 예전의 명성은 찾아 볼 수 없었고 현재 친척집에서 파출부로 일하고 계신다.나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11년인 1974년 11월24일에 쌍문동 메디컬센터에서 태어났다.

세월이 흘러 가족들이 영등포(현 강서구)로 이사하고 내 나이 여섯 살 때부터 글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특히 국어과목을 젤루 우수한 성적으로 맞았다.

어렸을때 내 꿈은 새마을호 여객전무(혹은 차장)나 택시기사가 되고싶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그만큼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어쟀든 제2의 백범 김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평소김구선생을 존경한 이유는 유달리도 필자와 흡사한 면이 많은데다 남다른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거니와 몰락한 양반가문이었고 왕손이라는 점에서도 일치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은 나를 조롱하였다.

'네가 김구면 나는 이승만대통령이다!'

이렇듯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졸업을 1년 남기고 화곡국민학교에서 염창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어머니는 '얼마 남지않은 국민학교 생활일지라도 저명인사가 되려면 대인관계라도 넓혀야되지 않겠니...'라고 하시며 내가 동급생들과 어울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버스타고 장거리를 통학하던 학교생활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하자 선생님들은 나를 특별히 총애해 주셨고 때문에 반 아이들의 질투심을 유발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나 신처럼 살았다고 회고하셨지만 아홉살때 6.25가 발발했고 이로인해 아버지와 친척집이 공산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부터 궁핍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하셨다.친정식구들 모두 증조부가 언더우드를 알게 된 이후부터 한국전쟁때까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인정이 많고 베품과 아량도 많았고 욕심이 없던 분이였다. 남편과 친정식구들을 모두 잃은 외할머님은 충격으로 대대로 섬겨오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셨다. 역시 1.4후퇴때 사촌동생과 단둘이 월남한 지금의 아버지와 절에서 처음만나 서울로 온 부모님은 66년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는데 성공하셨다.

내가 성장하면서 직장생활과 요식업을 하던 부모님은 점차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빚을 지기 시작하면서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우리는 매우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독학으로 대학원과 유학을 마친 나는 취직이 되어 집안은 모처럼만에 활기를 되찾았으나 마침 기적의 종교라는 기독교인 대통령이 초래한 IMF후유증은 또 다시 우리가계의 발목을 잡기 시작하였다.그러다 카드빚으로 인해 우리식구들은 다시 궁핍한 생활로 돌아갔다.따라서 나는 현재 허울뿐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외할머니가 소유하던 5층짜리 건물도 팔아넘기시면서 부양문제로 삼촌들이 자주 다투게되자 필자의 어머니가 모시기로 결정하셨지만 좁디좁은 방에서 같이 지내는 외할머니가 무척 답답해지기 시작했고 연신 내뿜는 담배연기 때문에 간접흡연으로 나까지 덩달아 건장이 나빠지는 건 아닌지 노른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우리식구들은 하는 수 없이 외할머니를 요양보내기로 결정하였다.건강상의 문제도 이유가 되었다.

남편과 식구들을 앗아간 원한과 증오의 북한군 초소가 들여다보이는 강화도의 한 개척교회였다.

지금은 대성전으로 성장한 인천장로교회 장로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를 통해 말씀 많이 들었다면서 외할며니를 극진히 모셨다.그로부터 3년 뒤,한 통의 전화가 아버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외할머니께서 서거하셨다는 연락이었다.

"정말 우리식구들은 복도 지지리도 없지!왜 하필 이때 돌아가시냔 말이다."

이에 나는 몹시 화가났으나 진정하였다. 지금 장례비걱절할 때냐며 나무랐다. 외할머니가 서거 당일 이러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사후에도 나를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그날은 추석이었고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안수집사가 된 외삼촌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분명히 할아버지를 만나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하자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던 외할머니 부부였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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