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성폭력 사건을 통해 몰이성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에 찌들어 있는 활동가들이 무엇이 올바른 성 인지이고 성 평등인지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사건이 제대로 해결될 수 있고 피해 생존자 역시 조직으로 복귀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해생존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여러번 생각을 거듭하며 고민한 결과,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생존자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옥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폭행당한 자신이 싫고 가해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
다만 간신히 피해사실을 말하더라도 그때마다 피해생존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죽어간다. 더 끔찍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믿어주지 않고 피해생존자를 정신이상자로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낼때다. 차가움과 비난의 따가운 시선은 피해생존자를 강한 사슬로 옥죄고 숨 막히게 한다. 막히는 숨을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숨 쉬기 위해 피해생존자는 스스로 숨으려고만 한다. 분노와 고토응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숨으려고만 한다. 나도 그랬다.
그동안 나는 한번도 내가 겪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지 못했다. 다만 사건 초기 해결을 위해 구성된 민주노총 1차 진상조사위원회와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그리고 전교조의 '성폭력 징계재심위원회'에 문서로 알렸고, 당시 전교조위원장이나 민주노총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이하 몇 사람에게만 말했다. 아니다 말은 했지만 다 말하지 못했다.
나의 피해 사실을 듣고도 달라지지 않는 그들을 대면하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조직의 지도부를 만나고, 글로, 인편으로 나의 피해 사실과 지옥이 따로 없는 삶의 고통을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건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인 미안함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지금도 진심이었다고 항변하겠지만 어느 것 하나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을 뿐 사건 해결 과정에서 진정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가끔씩 그들이 아닌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내가 말할 수 있는 통로는 없었고, 고립된 상태로 오랜 시간들을 홀로 괴로워했다. - '하늘을 덮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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