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훈아의 영영 중에서 -
특히 첫사랑은 마음에서 영영 지울 수가 없는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을 일기처럼 기록한 작품이다. 마음은 사랑의 손실로 구멍 난 빈 자리였다. 한 지방의 법률가에 불과했던 괴테는 이때부터 고금과 세계로 시공(時空)을 확장시킨 대문호로 변신하였다.
침묵을 지키는 선사(禪師)와 호들갑떠는 수좌(首座)를 보자.
“스님, 스님, 드디어 저도 깨우쳤습니다.”
“만물은 허(虛)요 무(無)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좌선을 하면 <나>가 사라지고, 속이 비어 가득 차게 됩니다.”
스님은 대꾸대신 막대기로 녀석의 대가리를 “탁”하고 후려친다.
“어으으으”
“저런, 속이 비었다면서 그 분노는 어디서 나오는 거냐?”
“좋은 것이라 해도 없는 것만큼 좋지는 못하니라.”
다음은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達磨)와 수좌시절의 혜가(慧可)와 나눈 대화이다. 혜가는 나중에 제2대 조사(祖師)에 오른다.
“마음의 평화를 못 찾겠어요.”
“...”
“스님, 제가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도와주십시오.”
“네 마음을 이리 가져오면 내가 진정시켜마.”
“마음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봐라, 내가 벌써 네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았느냐.”
“!”
그 순간 혜가는 마음이 트이고 큰 깨달음은 얻었다고 기록된다.
“허허, 그래. 마음이 없거늘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얻겠느냐!”
정신의 영역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다. 그래서 의식 중심의 정통심리학에 대하여 정신분석은 메타심리학이라 부른다. 프로이트(Freud)는 정신분석의 시조이다. 그는 성(sex)이 무의식을 움직이는 주요 바탕이라고 보았고, “거세콤플렉스”는 그를 대표하는 이론이다. 어쨌든 거세는 빈 자리이다.
융(Jung)은 메타심리학의 제2대 조사쯤 되는 인물이다. 그의 탁월한 업적은 초자연적 심리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파라심리학까지 과학의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그는 개별적 무의식 뒤에는 인류공통의 집단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그를 대표하는 패턴이며, 마음너머 저편이다.
메타심리학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프로이트), 20세기 초-중반의 스위스(융)에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 그 중심이 서진하여 프랑스로 넘어온다. 라캉(Lacan)은 이때 메타심리학을 주도한 구조주의자이다. 그가 파악한 인간은 미숙아이다. 제각각 잘려진 신체에의 불안이 밖에 있는 “거울보기”를 통해 통일된 모습을 획득하는데, 그 바닥심리는 소외라고 보았다.
마음은 빈 자리이다. 마음은 프로이트의 거세된 자리에, 융의 그림자가 숨어있는 자리에, 라캉의 소외된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괴테의 상실된 사랑의 자리에서, 달마의 무심(無心)에서 역으로 마음이 발견되었다.
마음이 무엇인가? 헛것이다.
마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오리지널은 있는가? 네거티브(negative)의 개념으로 있다.
허물이 있기 때문에 매미가 하늘로 비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도체에서의 전류는 도체와 달리 자유전자와 양공(+ hole)으로 구성된다. 양공의 존재는 어항의 물방울로 비유한다. 물방울은 사실 빈 방울이다.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