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선언문
5.18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선언문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6.04.0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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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년의 사법부는 5.18재판에서 6개의 ‘사실오인’을 범했다!

▲ 위의 사진에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 자들은 주로 북한의 대사급 외교관집단이고, 네모로 표시된 뒤에 서있는 자들은 주로 북한의 현역군 장성 및 대좌급 장교 집단이다. 위 사진은 5.18 무장폭동사태가 북한 정규군에 의한 불법군사침략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물증이 될 것이다. ⓒ뉴스타운

선언자 :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우리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은 2002년부터 12년 동안 18만쪽에 달한다는 수사-재판기록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5.18이 거룩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기 위해 북한이 주도한 대규모 게릴라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2015.5.5.부터 지금까지 만 11개월 동안의 첨단 영상분석을 통해, 광주에서 집단으로 찍힌 폭동주역의 얼굴들 426명이 모두 북한의 핵심권력층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울러 500만야전군은 ‘전가의 보도’로 남용돼 온 5.18관련 1996-97년의 판결이 6개의 사실오인을 범한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여기에서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범한 이 6개의 사실오인으로 인해 북한이 저지른 전쟁범죄행위와 광주의 여적행위를 놓고, 어이없게도 거룩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했다. 이는 대한민국 사법부는 물론 대한민국 모두의 수치요 망신이다. 이로 인해 이제까지 발생해온 수많은 고통과 낭비 그리고 대한민국을 증오하게 만드는 반국가적 5.18교육이 하루 빨리 시정돼야 할 것이다.

                                              5.18은 제2의 6.25사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인식돼 있는 5.18 광주사태는 1980년 전라남도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250여명의 학생집단이 감히 400여 명의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를 찾아가 가방 속에 숨겨간 돌멩이를 던져 7명의 공수부대원들에 부상을 입힌 순간부터 시작됐고,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1980년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사태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국가폭동’인 것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1980-81년의 제판부들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1996-97년의 재판부들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재판 모두 다 정치재판 이념재판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500만야전군이 고발할 대상은 1996-97년의 판결이다.

1996-97년의 사법부는 5.18재판에서 6개의 ‘사실오인’을 범함으로 인해 그의 국가에 치욕을 안겨주었고, 대한민국 운명에 결정적인 가해행위를 했다. 5.18은 1,200명의 북한 침략자들이 은밀하게 침투하여 벌인 게릴라 침략전쟁이었는데 한국사법부가 이를 거룩한 민주화운동으로 판결한 것이다. 한국 사법부가 6개의 ‘사실오인’을 범했다는 사실, 그래서 북한의 게릴라남침 역사를 거룩한 민주화역사로 잘 못 판단한 사실은 최근 500만야전군이 5.18사태에 대한 13년 동안의 연구를 종결하는 순간에 비로소 확실한 표현으로 정리됐다.  

1945년 미국이 일본에 승전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이 그 후 지금까지 겪어온 역사는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침략 및 소요-공작과 이에 대한 남한의 반작용의 역사였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침략이 1950년의 6.25침략이었고, 그 다음으로 큰 침략이 1980년 광주에서 주도한 5.18 게릴라전이었다. 5.18은 이제까지 군사독재를 청산시키고 문민정부에 의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5.18광주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국내와 국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500만야전군이 최근 종합적으로 내린 결론은 북한이 600명의 특수군과 또 다른 600명 정도의 각 분야 전문 엘리트 등으로 구성된 공작집단이 광주로 침투하여 국가를 전복시키고 이를 남침의 기회로 활용하려 했던 게릴라 침략이었다.

1996-97년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전두환을 처벌하기 위해 “당시 북한으로부터는 특이한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겁박하기 위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과대 포장하여 5.17계엄확대 조치를 취했고 민주화의 상징인 김대중 등을 체포했다”며 전두환을 옭아맸다. 광주 폭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600명의 학생시위대는 대한민국 헌법을 전두환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이라고 판시했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빠른 기간에 확산됐었어야 했는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이를 조기에 진압한 것은 내란행위에 해당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노골적인 이념재판이었던 것이다.

1981년에 이미 대법원 판결이 끝난 5.18사건을 1997년에 다시 재판한 이유는 재심 사유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세력이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5.18역사'를 뒤집기 위해 여론몰이로 제정한 '5.18특별법' 때문이었다. 1997년의 재판은 재심재판이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이 5.18특별법에 의한 정치재판이었던 것이다. 이 5.18특별법'은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했다. 재심 사유가 없는 5.18사건을 좌익판사들이 다시 판결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사법쿠데타였지만, 재판내용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그 자체였다 .

검찰이 작성한 팩트들은 1980년 것이나 1995년 것이나 변함이 없었다. 단지 1996-97년에 재판을 주도한 판사들의 해석이 상식과 논리를 뛰어 넘는 막무가내였다. 증거도 철저히 무시되었고, 헌법도 법률도 무시되었다. 오직 허위사실들로 가득 찬 여론조작에 의한 북한식 인민재판만 있었다. 1996년에 발행된 이 사건 제2심 판결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에 의한다. 자연법이란 국민인식법이다". 1996년에 시작된 5.18재판은 증거재판도 아니고 법률재판도 아닌 인민재판이었다는 뜻이다. 김영삼은 1995년에 시동을 건 제2의 5.18재판을 군사독재를 처단하기 위한 재판이기 때문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 명명했다. 이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아무리 팩트와 법률조항들로 어필해도 판사와 검사들은 “이 재판은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 접근방식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변호인들의 거듭된 질문에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사회에는 좌익세력과 무산계급이 5.18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대한민국에 반역한 5.18폭동이 갑자기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내란세력’이 됐다. 국가가 북한에 정복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5.18폭동에서 사망한 폭도들이 묻힌 곳은 국립묘지가 되었고, 그 묘지를 가려면 길 한 가운데 묻어놓은 전두환의 동상을 지금도 밟고 다녀야 한다. 전두환은 지금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5.18묘지 입구에 묻어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짓밟고 다니게 하는 것은 김정은 집단의 잔악성과는 어울려도 거룩하다는 민주화운동과는 어울릴 수 없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충신세력이 되었고, 반공세력이 역적세력으로 내몰렸다. 공산세력이 남한사회의 주인이 된 것이다. 남한이라는 국가가 내용상 북한체제로 체제전환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황당하게 뒤집힌 역사는 아마 이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재판 모두가 다 5.18을 북한이 주도한 침략사건이라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사법부의 주홍글씨, 6개의 “사실오인”  

사회일반에 5.18이 사실과는 정 반대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5.18의 바이블이라는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이 북한이 날조한 대남모략용 유언비어를 종합한 것이었는데도 이것이 지금까지 “5.18역사의 바이블”로 널리 읽혀왔다. 하지만 팩트들로 뒷받침되지 않은 이 내용들은 모두 북한의 대남모략용 책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다른 하나는 1980년의 수사자료와 1995년의 수사자료를 음미하면, 광주사태는 북한특수군 만이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금방 내릴 수 있었는데, 당시의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분석의 초점을 오직 정치적 희생양을 찾는 데에만 집중한 관계로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했다.

그 결과 개개인 모두가 살인기계요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만이 이룩할 수 있는 기적적인 작전성과를 놓고 광주대학생 600명이 이룩한 성과인 것으로 사실오인을 하였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광주시민들 중 이 600명에 소속됐던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5.18은 북한의 공작세력이 와서 저지른 침략 및 살인 행위였는데 한국 사법부는 북한의 공작에 말려들어 이를 공수부대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이처럼 사실오인된 판결문은 소각 절차를 밟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래에 6개의 오인된 사실들을 증명한다.

사실오인 #1) 세계최정상급 특수 맥가이버(못할 것이 없는 기술과 능력의 소유자를 의미) 능력을 가진 대학생이 광주에 600명씩이나 있었다고 사실오인을 하였으며, 그들이 수행한 작전내용들이 세계 최정상급 특공대의 실적보다 더 높은 것들이었는데도 이를 광주대학생들이 5.17계엄에 공분하여 즉흥적으로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라고 사실오인하였다.  

증1의 92쪽에는 “시위대 300명이 전투서열이 높은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톨게이트를 5월 21일 0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몽둥이 화염병 등을 소지한 채 매복해 있다가 08시가 되자 통과하는 차량부대를 기습해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털어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감히 대학생들이 정규사단을 기습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차량대열을 마주한 군납업체 사람들이 놀라서 신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28대(증3의 376쪽)에 열쇠를 꽂아주었다. 증1의 93쪽에는 5월 21일 09시에는 또 다른 300명이 이 공장에 합류하여 도합 600명이 집결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증2의 53-64쪽에는 이 600명이 전라남도 17개 시-군에 꼭꼭 숨겨져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12시부터 불과 4시간 만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꼭꼭 숨은 38개 무기고를 부수고 5,403정의 총기를 털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증2는 5월 21일, 각 시간대별로 털린 무기고 이름과 무기별 수량만 12개 쪽에 걸쳐 지루하게 나열돼 있었다. 500만야전군은 이 12개 쪽에 산만하게 나열만 되어 있는 기록을 통계처리 했다. 1) 무기고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분산돼 있었다는 사실, 2)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사실이 비로소 정보로 나타난 것이다. 3) 북한 책인 증4의 35-37쪽에는 38개 무기고 이외에 6개 무기고가 더 털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44개 무기고가 4시간 만에 털렸고, 그 양이 총기인 경우만 해도 5,403정인 것으로 집계되었다(증3의 375쪽).

증1은 “여러 무기고가 털렸다”는 인식만 가질 수 있도록 증2의 12개 쪽에 나열된 기록들 중 극히 일부만 발췌하여 서술식으로 나열했기 때문에, 증1의 기록만을 보면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어 총기의 경우 5,403정을 탈취했다”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생산해 낼 수 없었다. 증2의 안기부 보고서 역시 괄목할만한 정보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검찰과 사법부는 원천자료를 통계화하지 못해 사실을 사실로 인지하지 못한 반면 500만야전군은 원천자료를 통계적으로 가공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법부의 사실오인인 것이다.

시위대는 광주공원과 학운동 등에서 총기사용 교육을 실시했다(증1의 101쪽). 다이너마이트를 폭탄으로 제조한 사실에 대해서는 재판과정에서 많은 매체들이 중구난방으로 보도를 했지만 가장 확실한 정보는 조립돼 있는 폭탄을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 21세의 대학생 김창길 등 일부 온건한 학생들의 보호를 받아 목숨을 걸고 도청으로 들어가 폭탄을 해체한 배승일 문관의 증언보도다(증5). 그에 의하면 도청에 조립돼 있는 다이너마이트 폭탄은 2,100발이었다.

당시는 자가용 시대가 아니라 400명에 가까운 운전수 더구나 신형장갑차를 4대씩이나 몰 수 있는 운전수를 광주에서 즉흥적으로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학생시위대 600명은 광주의 부나비들을 선동해 4,000여명의 공수대원들을 몰살상태로 몰아넣었다.(증1의 103-105)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몰아내고 21일 밤에 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증1의 91쪽, 증3의 136-137쪽). 이 모든 작전들은 판결문에 기록된 것처럼 5월 18일 아침 즉흥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된 작전이었고, 세계 최고의 특공작전인 엔테베 작전보다 더 높은 고난도 작전이었다. 그런데 1996-97년의 재판부는 이 작전을 시민군이 수행한 가벼운 작전인 것으로 사실오인을 하였다.

사실오인 #2) “서슬 퍼런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운동권과 학생들이 다 꼭꼭 숨어 있을 때에, 광주에만은 만능의 맥가이버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600명씩이나 조직돼 있었다고 오인하였다.

증6은 2006년에 발간되었지만 여기에는 일부만 발췌한다. 여기에는 5.18의 두 영웅이자 운동권 주동자인 윤한봉과 정동년의 증언이 있다. 윤한봉은 역할보다 허명이 높은 자임을 읽을 수 있다. 정동년으로부터 200만원의 폭동자금을 받은 것으로 수사당국에 기록돼 있지만 그는 5.18 직전에 이리 저리 숨어 다니기에 바빴고, 1년 후에 미국으로 밀항했다. 김대중으로부터 500만원의 자금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월 17일 밤중에 체포되어 폭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증7에는 5.18최상의 주동자들인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의 자술 증언록이 수록돼있다. 발췌한 내용들 중 줄친 부분들을 요약하면 도청은 5월 23일까지 '시민군본부'(주:북한군)에 의해 통제됐고, 그들은 5월 24일에야 비로소 도청에 들어갔으며, 서로가 서로를 도청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조직화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1980년 5월 18일 새벽부터 전국은 계엄령 확대선포와 폭넓은 예비검속으로 인해 전국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운동권 인물들일수록 숨을 곳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이는 증6 및 7의 발췌물들에 잘 묘사돼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서울지역에 비해 시위가 활발하지 못했다. 광주의 학생운동권 지도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축산학과 학생회장인 윤한봉, 38세의 복학생 정동년, 5.18의 영웅이라는 윤상원 정도였다. 그런데 박관현과 윤한봉은 5월 17일 밤부터 도망을 다니며 광주사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정동년은 5월 17일 자정에 체포됐고, 윤상원은 5월 21일까지도 숨어 있다가(증7의 68쪽)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을 배타적으로 장악했건 북한세력이 안개 같이 사라진 이후 어슬렁거리며 도청에 들어가 5월 25일과 26일,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을 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계엄령의 선포로 당국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았던 모든 학생과 젊은이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광주에서만은 이렇게 고도로 훈련된 대학생들이 600명씩이나 뭉쳐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사실오인을 주도한 것이다. 이 600명 작전은 신출귀몰하다는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작전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고난도 작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나라의 검찰과 판사들은 이러한 고난도 작전을 광주의 대학생 600명이 수행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판사들이 군사부분에 대해 군사전문가를 제치고 그들의 상식만을 가지고 가볍게 재판한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 검사들과 판사들은 북한의 침략작전을 놓고, 숭고한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대한민국 판사 검사들은 이 엄청난 저지레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할 것이고, 국민에 사죄해야 할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사실오인 #3) 5월 18일 오진 9시경, 가방에 돌을 넣어 감히 계엄군 집결지를 찾아가 7명의 공수대원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수부대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나 광주 도심 파출소들을 불태워 시민들을 끌어 모으고, 준비된 공작용 유언비어들을 살포한 250명의 날래고 대담한 학생들이 광주학생들이라고 오인하였다. (증1의 58쪽)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생들은 무시무시한 계엄령 선포로 모두 숨죽이고 숨어 지냈으며 2사람 이상이 몰려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광주에서만은 대학생 250여명이 감히 400여명으로 구성된 제35공수대대 집결지인 전남대를 찾아가 가방 속에 숨겨간 돌멩이로 공격을 하여 7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수부대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나 도심의 파출소들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여 시민들을 끌어 모으고, 준비된 유언비어들을 살포하였습니다. 이런 고도의 백병전 능력과 자신감을 가진 대학생, 도심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끌어 모인 후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정교한 공작 능력을 가진 대학생들이 광주에 250명이 몰려다닌 것이 증1의 57-59쪽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도 판검사들은 이 250명을,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결집된 정의로운 시위대라 오인하였다.

사실오인# 4) 감히 정규사단의 이동계획을 탐지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몽둥이를 들고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직행한 300명의 날래고 조직화된 시위대가 광주학생들인 것으로 오인하였다.(증1의 92-93쪽)

언제부터 광주 대학생들이 극비정보 수집능력, 백병전 능력, 운전능력, 정규군을 몽둥이 하나로 기습할 생각을 하는 배짱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맥가이버 능력을 갖춘 대학생들이 당시 300명씩이나 몰려다닐 수 있었는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사실오인 #5) 재판부는 위 600명을 광주학생 시위대인 것으로 오인하고 시위대에 대해서는 헌법수호세력으로 오인했고, 이를 진압한 신군부를 국가반역자들로 사실오인 하였다.

5.18사태가 종료되었을 때 주동자들이라고 잡혀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328명이다(증3의 354-367). 증3에는 처벌자 명단이 있고, 나이와 직업이 기록돼 있다.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목공, 석공, 자개공, 구두공, 식당종업원 등 59개 직종에 걸쳐 있는 10-20대의 최하층 계급들이다. 증6,7에서 여러 증언자들이 증언했듯이 “개념 없는 부나비”들이었다.

이들 328명 중에 5월 21일의 빛나는 작전을 기획하고 감당할 자가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실지로 5.18유공자들 중 5월 21일 작전을 주도했다는 사람은 단 1명도 없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며 엄청난 포상금과 연금과 수많은 공짜들을 제공해주는 이 마당에 5월 21일 참가자들은 어째서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주동자라고 잡힌 자들 중 대학생은 5월 25-27일 도청에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하던 자 두 사람뿐이었다. 광주시청과 5.18단체들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 31일까지 지하철, 광주시청로비, 번화가, 각 지역의 노인시설, 복지시설 등에 500만야전군이 분석한 북한군 영상들을 크게 전시해 놓고 “5.18 당시 사진 속 광주시민 찾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500만야전군이 북한군으로 지목한 이 얼굴이 바로 나요” 하고 나타나 달라고 6개월 동안 호소했지만 그날까지 500만야전군이 발견한 총 426명의 북한얼굴들 중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들 스스로 5.18의 주역 역할을 하다가 촬영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다 북한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사실오인 #6)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 116명 중 70%-7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무기고로부터 탈취한 카빈총 등에 의해 사망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계엄군이 쏜 것으로 사실 오인을 하였습니다. 당시 계엄군은 M16만 보유하고 있었다. (증2의 96-103쪽-70%, 증3의 131쪽-75%)

광주사람들조차 이 600명을 ‘시민군’이라 부르기도 했고 ‘연고대생 600명’이라 부르기도 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다는 것은 광주의 치욕이다. 북한군이 광주시민을 쏘아놓고, 또는 황해도 신천박물관이 미군을 증오하도록 모략한 방법에 따라 몽둥이, 톱 등의 흉기로 처참하게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이라고 모략함으로써,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했고, 여기에 더하여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느니, 여성들을 농락한 후 유방을 도려냈다느니 하는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이런 여러 가지 흑색 공작들은 전쟁 매니어들의 전문공작에 속하는 것이지 즉흥적으로 모인 일반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이 못된다.

사건 이후 36년 동안 어이없게도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돼온 왜곡된 역사와 그로부터 파생한 엄청난 국가정체성의 혼란이 속히 종지부를 찍게 되기를 바란다. 이른바 ‘민주화’를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질서 교란행위들과 이로부터 파생해온 수많은 문제들이 속히 교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정의를 수호하고 지구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바쳐진 이 하나의 노력이 승리로 기록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물론 모든 지구상의 시민들이 적극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증거자료  

증1.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995/7/18.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증2.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1985.5. 국가안전기획부
증3. “계엄사(戒嚴史)-1026사태와 국난극복-” 1982.3.15. 육군본부
증4. “광주의 분노” 1985.5.28. 조선로동당출판사
증5. 배승일씨 광주진압유공 오명벗고 명예회복
증6. “5.18의 기억과 역사2” 2006.2. 5.18기념재단
증7. “5.18항쟁 증언자료집 I, 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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