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의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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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의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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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곡돼 있는 노근리 사건, 진실은?

▲ ⓒ뉴스타운
노근리 사건은 1999년 9월 29일 AP통신(1962년생인 최상훈, 이 일로 퓰리처상 수상)에 의해 세계적인 이슈로 등장했다. 미군이 의도적으로 항공사격(철로에 있는 피난민)과 지상사격(쌍굴에 있는 피난민)을 해서 노근리 및 인근지역 주민 수백명을 학살했다는 요지였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은 AP통신에 이어 NBC 등 수많은 유수의 방송매체들이 ‘현장의 증인’임을 자칭한 에드워드 데일리’(Edward Daily)를 내세워 방송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노근리 보도는 반미작전의 일환

노근리 사건이 문제화되던 1999년 9월은 김대중 집권 2년 후기였다. 이 때 좌익들의 반미-반군 운동이 동시다발로 발생했다. 난데없이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양민을 의도적으로 학살했다는 엉뚱한 음해운동이 일어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가장들이 가족들로부터 비하당하기 시작했다. 이 음해공작은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한홍구-강정구를 중심으로 국내외에 폭넓게 전개됐다.

동시에 미군부대 주변 하수구에서 독극물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국민들을 경악시켰고, 미군이 항공기 사격훈련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매향리 사격장의 피해가 부풀려졌다. 이와 동시에 주미철본, 즉 주한미군철수범국민운동본부가 주한미군 철수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모두가 조직화된 빨갱이들의 작전들이었다.

미국 매체들의 방송에 따라 클린턴은 한국과 합동조사를 할 것에 동의했고 합동조사는 다음 달인 10월 29일부터 양측이 다 3성장군을 단장으로 하여 50명 내외의 인력으로 수행됐다. 15개월 동안 조사를 했고, 2001년 1월 양측이 공동으로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조사결과를 놓았다.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노근리 보도의 프리마돈나 에드워드 데일리는 가짜

노근리 보도의 꽃은 미국인 에드워드 데일리였다. 그가 없었으면 노근리 사건의 세계화도 없었다. 한-미조사단은 가장 먼저 이 사건 보도를 촉발시킨 현장의 증인 에드워드 데일리가 과연 증인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검증했다. 노근리 지역 작전을 수행한 미군부대는 미제1기병사단 제7연대 2대대 H중대였다. 데일리는 자기가 이 H중대 기관총 사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사결과 에드워드는 사건 당일인 1950년 7월 26일 노근리 지역에 없었고, 기관총 사수도 아니었다. 그는 1949년 3월 18이부터 1951년 3월 16일까지 제27병기중대 정비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급여명부와 출장기록 모두가 이를 증명해주었다.

그가 탔다고 증언한 훈장도 거짓이었고, 현지 임관했다는 주장도 거짓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사건 당시 기관총 사수도 아니었고, 현지 임관하지도 않았고, H중대 소속도 아니었으며 전쟁포로도 아니었고 전쟁상황에 노출된바 전혀 없이 병장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 이런 거짓말쟁이, 스스로 노근리 사건에 뛰어들었을까 아니면 무대 뒤에서 빨갱이들에 매수당했을까.

미군은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노근리보다 더 기혹한 피해를 입었다

한미조사단의 조사 결과 피란민들도 희생자들이었지만 미군도 희생자였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으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위장한 피난민 때문이었다. 민간복장 또는 미군복장 등으로 위장한 북괴 정찰대와 이들의 도우미로 역할 하는 피난민들이 공동으로 후방 게릴라작전을 폈다. 이로 인해 미군은 늘 후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책 없이 무너지면서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미군이 무서워하는 것은 북괴 부대보다 피난민 대열이었다.

피난민 통제는 정당방위를 위한 당연한 조치

목숨이 일각에 달린 채 쫓기는 처지에 있는 어린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 미군들은 피난민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고, 피해를 입었다. 피난민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 방어선보다 더 남쪽에서 집단으로 걸어가는 피난민 집단은 항공사격의 목표가 됐다. 노근리 철로를 걷는 수백 명의 피난민들 역시 항공사격의 대상으로 찍힐 수 있었다. 그들이 노근리 철로에서 공중사격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당시는 미국 전투기가 미군이나 한국군을 공격해 몰살시킨 사례로 비일비재했다. 전쟁은 퍼레이드 하듯이 조직적일 수 없다, 베트남에서는 한국군 포가 한국군 보병을 유린한 적도 있다. 1980년 5.18 때에는 광주 교도대가, 철수하는 공수부대 차량을 공격하여 12명의 공수대원을 단숨에 사살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공수부대 대대장은 팔이 날아 간지도 모르고 뛰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억울한 피해자는 수도 없이 나게 돼 있다. 어째서 노근리 피해자들만 특수한 피해자가 돼야 하는 것인가? .

밤 시간대에 노근리 쌍굴에는 수십 명의 파난민들이 갇혀 있었다. 밤 시간이 공포스럽고 불안한 것은 쌍굴에 갇혀 있는 피난민들만이 아니었다. 이를 감시하는 미군도 불안하고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갇혀 있는 피난민들이 밤중에 미군을 향해 돌진해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사병들은 피난민들이 쌍굴을 이탈하지 못하게 사격으로 통제했다. 안에서 조금만 움직이는 기색만 있어도 경고사격을 했다. 그리고 날이 새면 위생병이 쌍굴로 들어가 환자들을 간호해 주었다.

한미 합동 보고서가 작성되자마자 2001년 1월 12일,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클린턴은 김대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밝히고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 약속했다. 미국은 즉시 보상의 뜻으로 175만 달러를 내놓았다. 100만 달러로 현장에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고, 75만 달러는 유족들 자녀 장학기금을 설립했다.

노근리 사건은 이해 안 되는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수긍되는 사건

그런데 위키백과를 포함한 인터넷 공간에는 이를 미군의 의도적인 학살행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H중대 병사가 밤에는 쌍굴을 향해 경고사격을 하고, 낮에는 의무병이 쌍굴을 방문해 다친 사람을 치료해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한국과미국이 다 같이 인정한 조사결과다. 이것이 의도적인 학살인가?

생각해 보자. 1980년 6월 당시 일본에는 제24시단, 25사단, 제1기병사단, 제7사단이 군정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중 24사단, 25사단, 제1기병사단이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18일 사이에 파죽지세로 몰리고 있는 전투에 투입되어 연일 공포감에 휩싸여 포위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민간복장으로 위장한 북괴 정찰대와 동네 빨갱이들로 구성된 게릴라부대가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미군방어진지의 후방으로 침투했다. 미군 방어 진지 위치와 포병부대 위치가 적군으로 송신됐고, 그 결과 미군은 늘 후방과 측면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보름 사이에 30%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중대단위로 실종되는 예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24사단장 딘 소장이 참전 20일 만에 대전전투에서 실종되었겠는가.

후방으로부터 차단당하는 경우는 2차대전에서는 별로 경험하지 못한 방법이었으며 이러한 후방차단이 가능한 것은 10대 소년, 여성들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미군 방어선을 통과하여 미국 부대 위치, 특히 포병위치를 적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월남전에 44개월 참전했다. 베트콩들은 모두 민간인, 농민들로 위장하여 한국군 부대에 접근한다. 총을 든 베트콩은 모두 민간복장을 했다. 안심하고 마을 도로를 지나다 마을로부터 사격을 받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가장 허무하다. 그러할 경우 한국군은 성장(도지사)에게 연락하여 양민을 마을로부터 내보낸 후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노근리 책임, 누가 져야 하는가?

참천한 모든 미군이 워커장군으로부터 사단장, 연대장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피난민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는가? 피난민으로 위장한 빨갱이들이다. 그러면 노근리 사격의 원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군에게 있는가, 북괴군에 있는가?

피난민으로 위장한 빨갱이들에 의해 미군부대는 7월 한단동안에만 해도 30%의 병력 손실을 보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후안미치하게도 미국정부로부터 보상금 175만 달러를 받아냈다. 이 기막힌 사실을 어떻게 이해돼야 하는가? 한국인들은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돈을 갈취한 상종 못할 인종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놓고도 모자라 빨갱이들은 인터넷 공간을 독점하여 미군이 살인을 좋아해서 양민을 의도적으로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에 씻을 수 없는 모욕 안겨준 김대중

우리 한국군도 월남에 가서 베트콩을 잡기 위해 그리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마을을 폭격했다. 폭격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무고하고 억울한 주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트남 사람들도 노근리 사람들처럼 우리 한국 정부에 피해를 보상하라 요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노근리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나면 반드시 재발할 수 있는 현상과 문제점들을 소상하게 제시하고 있다. 전쟁이 났을 때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괴군을 만나면 북괴군에 게릴라 병력으로 이용당하다 죽을 것이고, 피난을 가면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의심받아 노근리 사람들처럼 피해를 볼 것이다. 1948년 제주도 사건, 낮에는 토벌군으로부터 의심받아 죽었고, 밤에는 공비들에 의해 사지가 찢기고 강간당한 후 생매장 됐다. 앞으로 전쟁이 나면, 마을 우익은 마을좌익들로부터 능지처참 당할 것이다.

역사 지키기에 눈을 뜨자

이런 의미에서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틈틈이 정리하여 여기에 싣고자 한다. 이 보고서가 바로 살아있는 역사책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터넷에 떠 있는 왜곡된 역사에 분노하고 욕설을 게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부지런히 올바른 역사를 정중한 매너와 논리로 확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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