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도사관'에 놀아난 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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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도사관'에 놀아난 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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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새삼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이 생각나는 이유

 
   
  ▲ (이)병도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다. "어떤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시키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 마치 그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 일제의 주구사가들이 광분했던 '역사'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이병도'씨를 둘러싼 얘기가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았던 이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그를 지금 친일사관의 거두쯤으로 치부한지 오래라.

그는 지금의 강단 사학계가 100%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장본인이다

민족사관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그의 일제치하 친일행각은 여지없이 파헤쳐졌다. 그리고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임나부 설치'가 조선반도였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 '일본서기'에 의해 고작 '대마도'였다는 것도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 그가 끼친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에 찌든 한국민이 어디 한 둘이겠는 가만은, 우리는 다만 그것을 용서하고 기억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무슨 하해 같은 도량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코 과거를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철리에 따르고 싶은 민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당대의 실세 실력가로 군림하는 이른바 대가군(大家群)의 선두주자 S씨에 이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너무나 유명한데다 특유의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그는 그야말로 당대의 실세 중에서도 휘영청 뜬 별이다. 걸핏하면, 독도의 수호신으로, 독립협회의 변호인으로, 일제의 만행을 갈파하는데 선봉장임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함부로 다루기가 버거운 존재다.

S씨 그는, 필립제이슨 재필이가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洪鍾宇)지사에 의해 총 맞아 쓰러진 것에 겁이나 걸음아 나 살리라고 도망친 그 일제 그늘에서 자라고 일제의 반간계에 놀아나 이역만리에서 사라진 재필이 만든 독립협회를 민족의 태양쯤으로 자랑의 틀을 씌운 그는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사회학도에 다름 아니다.

어쩌다 ‘독립협회연구’로 일약 스타가 되어 유명세를 거머쥔 뒤 동분서주 이르는 곳마다 환호의 물결을 즐기는 명사대열의 선두주자가 된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결코 그런 그의 출세가도에 찬물을 끼얹거나 괜스레 심사가 뒤틀 거린다 해서도 아니다.

오늘날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독립문’ 등이 친일역사의 상징으로 재조명되면서 그의 행보에 눈이 쏠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아니치 못하면서 대세가 점진적으로 일제만행 규탄에로 에스컬레이터 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행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생각해 보잔 뜻이 있어서다.

그 독립협회의 대변지 독립신문의 날 4월7일을 ‘한국 신문의 날’로 정한 한국의 언론계가 입장정리를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당도한 즈음, 그가 심혈을 기울인 독립협회옹호론이 흔들거릴 가능성에 대한 그의 심중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잠시 각설하자. 지금은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됨에 따라 도대체 일제가 침탈한 적나라한 현장이 어떠했던가를 냉철히 뒤돌아 짚어보고 돌아보자.

그리하여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한. 해방 60년사의 새 역사에서 이씨의 사관에 놀아나 호박씨를 깐 인물들을 찾아내 옥석을 구분하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해 광분했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해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해 민족의 서적을 약탈했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 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가관인 것은 자신들이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선사(朝鮮史)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광개토대왕 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됐다.

일제가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
-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
-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날조에 있었다.

대륙개척사를 반도수난사로 둔갑시키고 정신적으로 고유의 주체사상을 말살하여,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놓는가 하면,

단군을 하나의 신화로 돌리고, 고조선 실사(實史)를 은폐하여 고대사를 압축하고 만주하북성에서 찬란했던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조선은 자고(自古)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억설을 주장하여 조선강점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기도를 일삼았다.

고고학계의 구석기 유물 조작 폭로라는 지다던 소가 웃을 일을 공공연히 자행하다 들통이 나기도 했다. 즉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 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됐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 총독부 3~5대 총독 시달 교육시책이 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방조했다.

이로서 한국민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요결인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조선사』35권 (made in Japan)을 만들어 냈다.

치밀한 우리들 한국의 역사 개조작업을 서두른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이씨였다.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즉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됐다.

그것이 맨 앞글에서 밝힌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이씨의 행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병도는 어떤 인물인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이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 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이씨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완용의 후손 이씨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 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이씨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려시대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 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완용. 영효. 윤용, 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이씨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이씨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이씨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 언어. 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이씨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자 이씨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씨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이씨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김상기, 이상백, 이인영, 유홍렬, 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 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이씨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친일파 제명운동’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이씨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씨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씨의 일제 강점기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씨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이씨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이씨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이씨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이씨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이씨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됐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이씨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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