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무서워서 저질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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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무서워서 저질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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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이 난리를 치면 먼저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떤다. 우주 공간에서 자기 존재가 소멸되는 순간이 닥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제 자신의 죽음만큼은 정말 무섭다. 어쩌면 죽음 앞에 다가갔을 때야말로 자기의 삶이 가장 뚜렷하게 인식될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주체(subject)다. 불연속성을 가진 “나(I)”다. 떨어져있는 다른 모든 것은 객체(object)요, 나 말고는 “남(others)”이다. 나 자신을 깊이 의식하면 할수록 홀로임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배타적 남은 자기 주변에서 자기에게로 작용하고 있는 “무엇”이다. 이때 남이 나와 함께 사랑의 끈으로 묶이지 않는다면, “나-너”의 평등관계가 “나-것”의 종속관계로 바뀐다. 그러면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노예사회가 되고, 국제적 관계는 상호 존립이 아닌 예속된 변방으로 바뀐다. 

세상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과학, 철학,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이른바 패러다임을 이동(shift)하며 격변했고 재편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치 왕좌의 옥쇄처럼 구물이 이어졌다. 두 말 필요 없이 옥(玉)은 잘 변하지 않는 단단한 속돌이다. 1948년 북한정부가 수립된 이래로 현재까지 65년이 넘도록 저들의 주체사상은 온갖 난관을 해쳐나가는 만능키였다. 김일성(1912-1994), 김정일(1942-2011), 김정은(1984-?), “김 셋”으로 내려온 삼대 족장은 러시아 목각인형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주체는 사실 외톨이의 자구책(default)에 불과했다. 그것은 흐르시쵸프의 해빙, 중-소 대립, 고르바쵸프의 개방 등의 공산주의 위기에서 생존을 위한 북한의 대안이었다. 김셋은 구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함께 따돌림 당한 것이다. 

남북이 정말 난리를 치를 것 같다. 북쪽의 국지도발에 남쪽의 김셋 동상파괴로 대응한다면, 난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다가 죽기/살기로 확전될지 모른다는 우려다. 김셋 정권은 친중 쿠데타나 친미 인민봉기를 기다려야 하는 초조감이 엿보인다. 실제로 북한권력은 이판사판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지 않을까. 이럴 경우, 미국과 중국이 어떤 식으로, 어느 선까지 가담할 것인가에 따라 전쟁의 최종승패가 갈릴 것이다. 북쪽의 조중우호조약은 자동개입이 명시되어 있는 반면, 남쪽은 한미상호조약에 자동개입 문구가 없는 대신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중의 입장에서 전면전은 원하지 않겠지만, 명분과 이득에 따라 어느 수준까지 개입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이상(1910-1937)은 한일 다중언어 습득자다. 일제의 자본과 패권에 반감을 가진듯하나 독립운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서울공대 전신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193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절에 비하여 많은 시를 남겼는데, 얼듯 보면 대개 낙서 같다. 그는 분명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불가사의에 심취 당했다고 생각된다. 1934년에 발표된 오감도(烏瞰圖)는 15편의 연작시로 구성되는데, 시만 들춘다면 그의 대표작이라 하리다. 그중에 8, 9. 10편은 별도의 표제가 붙어있다. 모두 띄어쓰기가 무시됐고, 숫자가 시어로서 많이 사용된 점이 유별났다. 그는 특히 독자를 우롱하듯 하는 회귀적(recursive) 표현을 즐겼다. 이런 태도가 혐오감을 일으켰고, 결국 중도에서 마지못해 하차한 것이 아쉬운 장면이었다.

조감도 아닌 오감도라는 제목은 흉조와 길조의 양날을 지닌 까마귀의 상징 때문일 것이다. 오감도에서 시제1편은 홈페이지 격이다. 한 편의 다큐처럼 담담하게 읊어가면서 다섯 연으로 진행된다. 1, 3, 5 연의 괄호 ()는 닫힌/열린 골목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서 타자의 몫인 듯싶다. 내용은 여러 가지 해설이 가능하겠지만, 작가의 종교적 구원관을 표출시켰다고 보고 싶다. 13(十三)은 이곳의 주제다. 1차원 시간과 3차원 공간의 시공연속체를 배경으로 그리스도부터 배반자까지 가로지르는 죽음을 굽어보고 있다. 또 26번씩이나 반복되는 아해(兒孩) 역시 “나로서 아이”와 “너로서 아이”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나타내고 있다. 시제1편에서 작가의 내면은 삼각형 4개로 구성된 입체구조를 보인다. 어느 양끝이든지 꼭지 점들은 상극이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으로 상생한다. 

김셋의 외톨이 사상은 오감도의 유물론적 단선화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기독교의 천국소망을 공산낙원의 구호로 대체한다. 다음, 정치적 소신의 다름을 틀림으로 몰아붙여 인재들을 대량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하여 거짓말로 교육했고, 층층시하의 감시로 공포체제를 유지했다. 김셋은 날조로 시작했고, 선동으로 날 새웠다. 이에 따라 인민도 흉내만 내고 약점 잡히지 않는 연기에 능숙해진다. 이처럼 일방통행 단순사회는 면역력이 떨어진 신체와 비교할 수 있다. 명령 하달이 빠르기는 하나 한번 잘못 침투된 지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북한의 종말적 상황을 표현한듯하다. 골목대장 한 아이가 큰길 따라 황급히 달려간다. 나머지 졸개 열두 아이 역시 개체의 부품처럼 그 뒤를 따를 뿐이다. 밖은 어두워지고 인적마저 끊기는데, 두목 아이는 돌아갈 집(home)과 반겨줄 엄마가 없었다. 아, 쉬가 마렵다. 당장의 어려움을 풀려면 그래도 막다른 골목길이 적당하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김셋이 무서워서 “울고 싶다” 말했대. 그러나 안 그런 척 했었대. 그러니까 군부도 따라 그랬대. 측근도 따라 그랬대. 4도, 5도, 6도, 7도, 8도, 9도 계층에 따라 그랬대. 십(十)은 십자로를 가리킨다. 즉 남북 종축에 횡축 휴전선을 지키는 북쪽 병사들이다. 그들도 따라 그랬대.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11번째 아이는 휴전선 남쪽에 터 잡은 종북 집단이다. 12번째 아이는 회색 집단이다. “아, 북한도 동족인데 설마 우리를 해구치 하겠어. 핵도 그렇지, 실험도 못해?” 드디어 마지막 가룟 유다에 해당하는 13번째 아이다. 이 그룹은 돈(rich) 때문에 탈세, 위증, 횡령, 투기. 탈법 등등 온갖 술법을 버젓이 자행하며 자기 배만 불리는 일부 상류층이다. 이들 13번째 아이는 사실 첫 번째 아이와 가장 닮았다.

아이들은 실제로 4차원 시공에 놓여 있건만 이를 깨닫지 못한다. 돈에 떠는 아이와 돈을 따르다가 양심이 마비된 아이, 그렇게 두 그룹으로 나뉠 뿐이다. 열셋 모두는 돈 축에 갇혀서 자기초월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돈을 내려놓았을 때 자유도가 다양하게 주어진다. 열셋 아이들은 이런 사정을 몰라야 자긍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그렇지 못하면 미쳐버려야 하리라.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돈에 떠는 아이가 1번 김셋 하나일 수도 있고, 13번 “돈의 층”까지 합쳐 둘일 수도 있다. 역으로 돈에 중독된 아이가 둘이나 하나로 줄어든다면, 나머지 열하나 또는 열둘은 돈에 떠는 그룹에 소속된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어차피 부귀영화 좋아하다 우주에서 소멸될 “것”들인데.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남북 통행로는 길이 좁더라도 뚫려 있어야 한다. 그 골목 끝을 나서면 큰길이 이어지고,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연결된다. 남쪽 사람들이 자기 차를 타고 북쪽 지방을 누비고 다닐 즈음에는 북쪽에 속한 13인의 아이가 더 이상 큰길에서 방황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차에 저들을 태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은 자는 난리 통에도 두려움을 떨쳐낸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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