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도시'출판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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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출판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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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본지<김동문의 세상바로잡기>란에 연재 된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의 수기 출판을 위한 원고로 출판 후 판매 수익금은 동작동 현충원 제28묘역에 묻힌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전사한 23명의 공수특전단 장병들의 유족을 위한 성금으로 사용 됩니다.

머릿글에 부쳐

옛일을 밝혀서 미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진실 되게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에 옛 선현들도 사관(史觀)의 지조를 가장 높히 숭배하여 왔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집권세력과 위정자들에 의해 불편한 대상이 되어 왔고 이에 따른 왜곡과 조작이 이뤄지고 있다.

필자는 당대의 제반사항을 왜곡 없이 기록 보존 하는 의미로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하는 체험수기를 내놓는다.

흔히 일반인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일컬어 5.18사태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나는 현재의 우리들이 이 일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정확한 평가와 함께 이에 관한 성격을 규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 하면 5.18에 대한 국민각자의 생각이 제각각 이기 때문이며 이일에 희생을 당한 피해 당사자들과 일부 광주시민들은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자발적인 민주항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편으로 "폭동"으로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상반된 주장이 있을까?

이는 당시 비상계엄령 하에 대다수 국민들이 언론이나 뉴스미디어가 보도통제를 당하는 사회 현상에서 광주지역 자체가 봉쇄되어 있었기에 흘러 다니는 소문과 떠도는 유언비어들을 접하고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밖에 알 수가 없었기에 생긴 오해일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당시에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와 소문을 믿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흔히들 '5.18사태' 또는 '광주사태'라고 하며 '민주화항쟁'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 본다.

당시 광주현지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전, 시작은 순수하게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집회로 시작이 되었다고 하드라도 그 과정에서 불거진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점이 있다.

무엇 때문에 예비군과 경찰서 그리고 군부대의 무기고와 심지어 방위산업체까지 털어 무장을 하고 군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벌였으며,

미전향 장기수들이 수감되어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기도 하였을까? 물론 광주시민들은 이에 대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가족과 자식들이 희생을 당하는데 이를 보고만 있겠느냐?' ...

그러나 무장항거(이를 봉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를 하지 않고 끝까지 비무장으로 대처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서로 다른 주장과 인식이 있을 수 있을까?

지난 역사에서 나타나듯 일제 식민치하의 "3.1 만세운동"과 "마산의 3.15의거" 그리고 "4.19 혁명"같은 사건은 희생을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일제와 독재에 항거한 일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에 관해 "민족과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한 의거"였다는데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닐까?

희생만 해도 그렇다. 만약 비무장으로 순수한 집회 이었다면 피해가 사망자만 3.000여명(관련 당사자들의 주장)이라는 얘기와는 규모가 많은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발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지금도 '희생자를 암매장하였다' 하여 아직도 이를 찾기 위한 시도가 계속 되고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번도 이에 관해 소문만 난무하지 증명이 되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시사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해 시행된 보상만 해도 그렇다. 자고이래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운동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보상이었지 본인들이 나서서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한 일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이요 '민주화 유공자'라 하여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받고 있질 않는가?

이를 두고 대다수 국민들이 '옥상옥'과 같다하여 납득을 못하며, 그들이 순수하다 주장하는 "민주항쟁"이라는 주장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 인하여 과거 우리 민족의 어두운 역사인 "여순 반란사건"과 "4.3 제주폭동"의 관련자와 심지어 "동의대사건" "전교련"까지 '민주화 유공자'로 자처하며 보상을 요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럼 근세에 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며 싸운 '한국전쟁'과 타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월남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들은 무언가?

이들은 그야말로 나라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희생양들 아닌가? 이들도 명실 공히 이 나라의 민주화유공자 아닌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참전용사였던 필자는 “내가 겪은 5.18광주사태”의 체험수기를 한권의 책에 담아 후세에 광주사태냐 민주화운동이냐의 정의는 독자의 몴으로 맡긴다.

30년 동안 묻어 두었던 빛바랜 "광주사태 체험수기"를 펴면서

1980년 5.18일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인 광주에서 발생한 이른바 광주사태의 현장을 필자가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던 취재수첩을 모아 "내가 겪은 광주사태의 현장“의 제목글로 내란과 민주화운동으로 뒤엉킨 왜곡 조작 된 광주사태의 전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여기 남김니다.

기자가 본 5.18 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나는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자리잡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에서 기동취재 팀장으로 일선 시군의 현장 기동 취재를 맡고 있었다

편집국내 2평 남짓한 통신실 담당기자가 “긴급뉴스! 긴급속보!”를 외치며 서울발 합동통신이 전송한 원고를 편집부 데스크에 건네준다.

15일 서울역 대규모 집회에서 대학생들이 탈취한 버스로 전경들을 뒤에서 들이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서울의 대학가 곳곳에서는 박 대통령의 서거로 합동 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담긴 대자보가 대학가 구내에 나붙었다는 소식이다.

붉은 매직팬으로 작성한 이 짤막한 “군부 쿠데타와 학살명령”의 유언비어가 서울역 집회에서 사상 초유의 십만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를 형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서울의 대학가에서 시작된 이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광주의 대학가로 옮겨지고 괴 소문은 점점 증폭 되면서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광주시가지 전역으로 번졌다.

5월 2일 서울대 운동권에서 살포한 대자보는 "유신잔당 타도에 총력을! ‘학우여 유신잔당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는 선동구호의 북한말이 새겨진 대자보가 대학가에 붙게 되면서 부터 폭력시위는 시작 되었다.

1980년 5월18일 일요일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광주 금남로 거리에 오색 찬란한 연등사이로 대학생시위대가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신현확은 물러나라!”“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에서 날라 온 대자보(大字報)내용을 광주시민들에게선동하고 있었다.

하얀 대형종이에 검정색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글귀가 적혀 있고 특히 강조 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을 지원 하려고 출동했다는 것이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

이 대자보에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신가“로 최규하 대통령을 '최가'라 부르는 북한말로 쓰여진 흑색선전의 허위사실들이 서울대에 이어 보름만에 광주의 금남로 거리를 요란스럽게 울렸다.

당시 대학가와 야당 정치권에서는 1980년 봄을 가리켜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렀다.

1980년 5월18일 밤 8시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조선대 광장에 집결 한 시위대는“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는 구호를 외치고 해산된 이후 하룻밤 사이(19일)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전에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몰려온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들이 나돌더니 자칭 시민군들은 19일 새벽부터 군부대와 경찰파출소와 지서를 습격, 0명의 군경을 피살하고 무기를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19일 오전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된 유언비어는 금남로에 계엄군의 장갑차가 들이닥쳐 시민들을 마구 깔아 뭉게고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 여고생 젖가슴을 잘랐고 여대생을 성폭행했고 임산부의 배를 대검으로 갈랐다는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잔인한 루머성 유언비어들이 시내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하에 광주사태가 최악의 사태로 급변하자 18일 9시 긴급 소집된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사태수습을 위한 계엄군이 구성되어 광주에 투입되었고 18일 9시 이후에 구성된 계엄군과 당시 광주 상무지구에 주둔해있던 보병학교 병력간에 서로 상대방을 폭도군으로 오인해서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진압 부대였던 광주향토사단과 32보병사단의 진압 책임자는 31사단장이었던 광주출신 정웅 육군 소장이었다(평민당국회의원역임)

그런데도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온다”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유포되어 전국으로 번졌을까? <계속>

글쓴이-
44년, 전남 나주 출생
목포 호남매일신문사 기자 <68-70>
전남매일신문사 사회부차장<74-81>
(사)월남참전전우회 전라남도회장<89-91>
e조은뉴스 - 주필. <05-09 >
5.18 실체 규명위원회-고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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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맘 2011-05-22 00:42:48
용기에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원고료후원하기를 하니 잘안되네여. 이 책은 일반서점에 있나요?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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