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광주사태 자료사진^^^ | ||
5.18 30주년인 지금, 당시의 열린당의장은 지금 민주당 상임고문이란 거창한 신분으로 변신,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호남지역에 지원 방문에 나섰는데 지난 대선때는 열린당 대표자격으로 대구에서 "6-70대 노인들은 투표할 가치도 없다"는 패륜의 망언을 서슴없이 주절대던 방송 앵커 출신의 정동영, 얼마전까지 여당의 당의장을 거쳐 통일부장관으로 권세를 누리던 인물이 신당 창당만이 5.18 정신을 계승하고 잔존한 5.16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며 신당인 민주당 상임고문 신분으로 또다시 등장했다.
필자는 푸른 5월의 창공에 휘날리는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선전탑을 지켜보며 잔인했던 치욕의 5.18 광주사태를 회고 한다.
필자는 30년전 광주사태로 인해 직장을 잃었으며 사태 주범들이 유신 언론 타도라는 이유로 방송국을 불태우고 신문사를 피습하기에 이르러 군부대로 피난을 했고 경찰서가 점거되고 치안 부재 속에 피신한 곳이 예비군 대대였고 부대를 내 놓으라는 무장 폭도들의 아우성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서른 일곱살의 나이에 대대장과 함께 총을 쥐고 무장 시위대 진압에 나선바 있다.
부대가 고립되어 4박 5일 동안 여섯끼를 굶어도 보았고 뜬눈으로 3일 밤을 보냈으며 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이 회복되고 계엄당국이 김대중씨를 내란 음모 혐의로 수감 될 즈음 사태가 수습되어 주범들이 계엄당국에 의해 체포 구금되자 내란혐의로 구금된 김대중씨에게 연민의 정으로 불쌍한 생각마져 들었다.
그해 80년 11월 30일자로 전국언론사 통.폐합 조치에 따라 전국이 1도 1사 원칙으로 광주에 있는 전남일보 와 필자가 소속된 전남매일신문사가 통합 결정이 났다. 국보위의 시책으로 당시만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신문용지의 절감과 사이비기자 척결로 밝은 사회 만들겠다는 정부의 언론 정책에 불평 한마디 못한 체 국보위의 후속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통합 결정 5일만에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가 들려왔다. 사주 '고 심상우 사장.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사건으로 순직'의 부족한 재정난에 통합이 아닌 전남일보에 흡수 폐합으로 돌변, 입 한번 벙긋 못 한 체 직장을 잃었다.
필자는 당시 이광표 문공부 장관의 발표를 굳게 믿었다. "존경하는 전국 언론인 여러분! 정부는 금번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이직자도 발생치 않도록 책임 을 다 할 것" 이라는 문공부장관의 발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무직 상태다 .
이게 생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광주사태 수습 이후 전남도청이 회복되고 당시 줄줄히 잡혀간 민주화 영웅들의 "유신언론인타도"에 피신처로 찾아간 예비군 대대에서 살기 위해 걸머진 칼빈 소총을 든 이유로 그들에게 진압군으로 알려져 그동안 죄인 인양 살아 왔는데 그들은 5.18 특별법이란 이름아래 변칙으로 치러진 "5공 청문회"로 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더니 국민의 정부 들어서기가 무섭게 머리띠 둘러매고 민주화 운동이요, 민중 항쟁의 기수를 자처 하니 이 또한 인치가 아니든가?
졸지에 직장 잃은지 30년 째, 당시는 전남도의 행정사령탑인 도청과 경찰국을 비롯 인근 경찰서를 점거하고 총기를 대량으로 탈취해, 전남도청을 점거, 대량의 폭약을 설치하고 광주를 해방구로 선포 9일 천하를 도모했던 이른바 5.18 광주사태!
그들의 광주교도소 탈취음모에 간첩과 북한군의 개입을 의식하고 피난처인 예비군 대대에서 총을 들었던 진압군이자 향토예비군인 필자는 정동영이 외친 5.16 잔존세력인 유신 언론인으로 남아 김대중정부가 인정해준 5.18 민주화 유공자들에게 계엄군과 잔인한 공수부대의 진압군이란 반역자 누명을 둘러쓰고 살아온 30년 세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 온 잔인한 5월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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