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보도’가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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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보도’가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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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이라크 사태와 연관되어 있다

 
   
     
 

지난 1-2 주일 사이에 아프가니스탄 파병과 관련된 기사가 시사저널 시사인 등 주간지에 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대단히 좋지 않음을 지적한 기사들이었다. 한-미 동맹을 내세우며 파병을 주장하는 정부기관의 ‘전문가들’이나 ‘논객들’의 내용 없는 주장에 비하면 현장감이 있는 보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왜 그렇게 나빠졌는지에 대한 분석은 빠져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이라크 사태와 연관되어 있음에도 이것을 언급한 기사도 별로 없었다.

1. 2003-2006년 이라크

2003년에 미군 등 연합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때만해도 반군(叛軍) 활동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성급하게 승전을 자축했다. 그러면 반군은 어디서 생겨났나 하는 문제가 있다. 이라크는 큰 나라이다. 미군은 겨우 15만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보내서 바그다드와 거점 도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이라크의 핵 물질이 시리아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2006년에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시리아의 어떤 시설을 폭격해서 파괴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이라크는 지하드의 최전선이 되고 말았다. 이란과 시리아와의 국경을 통해서 반군(insurgents)들이 대거 몰려들어서 미군 등 연합군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IED(은익된 폭발물)를 통한 공격으로 인해 연합군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이라크가 주된 전쟁터가 되자 상대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등에선 테러가 주춤해 졌다. 반군 세력이 이라크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시아파(派) 반군의 돈줄은 이란이고 순니파(派) 반군의 돈줄은 사우디아라비아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알 사드르 같은 이라크 내의 시아파 세력은 이란과 이미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이라크 내의 소수파인 순니파에 대해서도 테러를 가했다. 이렇게 해서 2005-2006년 간 이라크는 피로 물들었다.

2. 2007년 미군 증파(增派)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패배했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사임했다. 2007년 초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이라크 전략을 발표했다. 이라크 정부와 이라크 군대가 자립하도록 돕는 것을 미군의 역할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단기간 동안 병력을 증강(troop surge)하겠다는 것이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 제안을 지지했다.

이렇게 해서 미군 5개 여단 21,000명 병력이 증파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중부군 사령관과 주 이라크 대사를 교체해서 아랍계통인 아비자이드 중부군 사령관과 칼라자드 이라크 주재 대사가 물러났고, 비정규전을 전공한 페트레이어스 대장이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병력이 증강된 미군들은 바그다드 등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치안을 확보하면서 주민들과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했다. 그 결과 2007년 말부터는 반군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008년부터는 미군의 전략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현지의 전황을 둘러 본 기자들이 그런 보도를 했다. 하지만 이라크의 내부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은 다른 평가를 내렸다. 2007년 들어서 반군의 활동이 수그러든 것은 시아파가 이라크를 장악해서 싸울 대상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바그다드에는 인구 이동이 발생해서 시아파가 주거지의 3/4을 장악하고 순니파 주민은 외곽으로 이동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란의 조종을 받는 시아파가 이라크 정부를 장악해서 무력 활동이 갈아 앉았다는 것이다.

2008년 대선에서 민주장의 오바마 후보는 병력 증강이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책임있는 철군’을 하겠으며, 자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3. 아프가니스탄 2007년 이후

2004년 10월에 열린 민주 선거에서 미국이 지지하는 카르자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호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07년 초부터 탈레반과 알케이다의 활동은 부쩍 증가했다. 이라크 상황이 호전된 시점부터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부쩍 나빠진 것이다. 이는 우연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란과 긴 국경을 두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서부는 이란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타지크 족과 우즈벡 족으로 구성된 북부지역은 남부의 파슈툰 족과 전혀 이해관계가 다르다. 이란과 북부 부족의 진출을 우려하는 파키스탄 군부는 파키스탄 서부에서의 탈레반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사실상 조장하여 왔다. 알케이다 등에 속한 무슬림 전사(戰士)들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모여들었다.

미군 등 나토군은 인명피해를 우려해서 대민 접촉을 꺼렸기 때문에, 아프간 주민들은 나토군이 자신들을 도우려 왔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반군과의 전투에서 인명피해를 우려한 미군은 공군의 지원에 많이 의존했고, 자연히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한 아프간 민간인 희생이 늘어났다. 현지 언어를 모르는 미군은 통역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데, 미군에 충실한 통역은 탈레반에 의해 암살되기가 일쑤였다. 통역 중에는 탈레반과 내통하는 경우도 많아서 나토군의 이동을 미리 탈레반에 알려주기도 했다. 미 공군은 이들이 전해 준 가짜 정보에 의존해서 아프간 주거지를 폭격하는 경우도 많아서 주민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미군과 영국군은 작전을 했지만 그 외의 나토군은 순찰을 하는 것도 꺼리고 주로 기지에서 지냈다. 특히 독일군은 철옹성 같은 기지를 건설해 놓고 그 속에서 숨어 지내서 아프간 주민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4. 맺는 말

제2차 대전 때 미군은 전투에서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한국 전쟁 때 미군은 대전, 청천강 등지에서 벌린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전쟁에서 최소한 비기기는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지만 전쟁에선 패배했다. 아라크 전쟁에서 미군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는 시아파 이슬람의 몫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란이 주도하는 시아파와 파키스탄이 후원하는 순니파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 오바마는 2008년 대선 때 “나의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이다”("My war on terror will be Afghanistan")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공약은 그에게 도박이 되었다.

정부의 부름을 따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용감하게 싸운 미군 장병들은 이 참혹한 전쟁의 진정한 영웅이다. 이 전쟁이 명분이 없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을 기획한 정책 결정자들은 적을 너무나 몰랐고, 또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려는 우리 정치인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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