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이다, 천수관음 전에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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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천수관음 전에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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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 경주문화유산답사기>분황사

무릎 꿇고
합장하여
천수관음전에
비나이다
천 손에 천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겠사옵기에
둘 없는 내라
하나야 그윽이 고치올러라
아, 내게 끼쳐주시면
놓되 쓰올 자비여 얼마나 큰고!

('도천수대비가' 모두)

 

 
   
  ^^^▲ 분황사 입구
ⓒ 이종찬^^^
 
 

"모전석탑이 무슨 말이죠?"
"아,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겠능교? 이 석탑이 언뜻 보기에는 벽돌로 쌓은 것 같지만 그냥 벽돌이 아니니더. 돌을 깎아 벽돌 모양으로 만든 거라 이 말이니더. 그라고 이런 탑은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많이 쌓았다고 하니더. 또 이런 석탑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라고 하니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오늘도 날씨가 많이 흐려. 사진이 제대로 나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쩌겠어. 하도 비가 자주 오니까 이렇게 비가 오지 않는 틈을 타서 얼른 사진을 찍어 놓아야지. 또한 그래야 너희들에게 지금의 분황사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줄 수가 있지 않겠니?

오늘은 평일이야. 그런데도 분황사 입구에는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들이 제법 많이 웅성거리고 있어. 간혹 머리가 노오란 외국인들도 서너 명 보이고. 지금 분황사 입구 오른 편에는 예쁜 나리꽃이 활짝 피어나 있어. 주홍빛 얼굴에 마치 곰보처럼 까만 점을 콕콕콕 찍은 채 말이야. 하지만 신 선생은 벌써 분황사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

우리 조상들의 손재주가 돋보이는 모전석탑이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 서기 634년에 만들어진 절이래. 분황사는 그 유명한 황룡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사촌처럼 지내고 있어. 물론 황룡사는 몽고의 침략 때 불타고, 임진왜란 때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지만 말이야.

 

 
   
  ^^^▲ 분황사 모전석탑
ⓒ 이종찬 ^^^
 
 

분황사는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대사와 자장법사가 거쳐간 절이야. 그러니까 서기 643년,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했대. 그러자 선덕여왕은 자장법사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했대. 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불교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대.

게다가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 원효대사의 유해로 작은 동상을 만들어 이곳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했대. 그 소상(小象)은 고려시대 때 일연이라는 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그대로 있었대.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소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이곳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면서요?"
"오데 그거뿐이겠능교. 경덕왕 14년, 755년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 이 절에 봉양했다고 하니더. 또 북쪽 벽에는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던 천수대비의 그림까지 있었다고 하니더."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지금은 비록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천수대비의 그림에는 유명한 일화가 서려 있단다. 신라 경덕왕 때, 신라 여류향가의 작가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고 말았대. 그래서 희명은 아이를 안고 이곳에 있는 천수대비 앞에 가서 아이에게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 주고, 아이에게 도천수대비가를 부르면서 빌게 했대. 그러자 이내 아이의 눈이 떠지게 되었대. 그래. 그때부터 천수대비의 그림이 영험이 있기로 소문나기 시작했다는 거야.

 

 
   
  ^^^▲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을 말한다
ⓒ 이종찬 ^^^
 
 

그 외에도 분황사에는 수많은 유물과 설화가 깃들어 있었대. 하지만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대. 그런 까닭에 지금의 분황사는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어. 특히 밖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아빠 키만한 담장 너머 모전석탑의 윗부분만 조금 보여.

게다가 분황사 경내로 들어서면 모전석탑이라 불리는 분황사 3층 석탑이 어깨를 떡 벌린 채 앞을 가로막고 서 있어.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분황사에는 이 모전석탑 하나만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여. 물론 분황사 입구 왼편에서는 지금 무슨 건물을 짓는다고 공사가 한창이지만 말이야.

모전석탑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이야. 높이는 9.3m에 이르고. 안산암이 뭐냐구? 안산암은 화산암에 속하는 돌이야. 이 돌에는 널 또는 기둥 모양의 규칙적인 결이 있고 아주 단단해. 그래서 예로부터 토목이나 건축 재료로 흔히 쓰였던 돌이야.

"이 탑도 분황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석탑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니더. 하지만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다고 하니더."
"하여튼 가는 곳마다 왜놈들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군요."
"근데 문제는 조선시대 때 이 절에 있던 스님 한 명이 이 탑을 수리할라꼬 손을 댔다가 오히려 더 망치고 말았다고 하니더."

 

 
   
  ^^^▲ 분황사 3층석탑은 원래 7층에서 9층이었다고 한다
ⓒ 이종찬^^^
 
 

그래. 그러니까 지금 아빠가 바라보고 있는 이 모전석탑은 1915년에 다시 수리를 한 그 모습이지. 이 석탑을 보고 일부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대. 지금은 이 탑이 3층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7층 아니면 9층이었다고. 근데 아빠가 보기에도 그랬을 것 같아. 왜냐하면 석탑 꼭대기가 아무리 보아도 무언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게 보이거든.

자료에 보면 이 탑의 기단(기초가 되는 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13m이고, 높이는 약l.06m라고 나와 있어. 그리고 탑을 쌓은 돌도 크기가 제 각각 달라. 탑 아래에는 상당히 큰 돌을 쌓았고, 탑의 중심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 경사지게 쌓았어. 그러니까 석탑의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다는 그 말이지.

모전석탑 기단 위 네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가 갈기를 치켜세운 채 지키고 있어. 마치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듯이. 학자들은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 동물은 물개이고, 내륙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있는 동물은 사자래. 아빠가 보기에는 네 마리 다 해태상 같은데도 말이야.

"이 석탑은 참으로 특이한 구조를 가졌구먼. 1층 네 면마다 무얼 달라는 듯이 입을 헤 벌리고 있으니."
"감실 입구 양쪽에 반라의 인왕상을 세운 것도 특이하니더. 새겨진 옷 무늬도 제 각각 다르고."
"근데 왜 탑 속에 감실을 만들어 놓았을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니더. 하여튼 지금 저 감실 안에는 목 잘린 불상이 놓여 있다고 하니더."

 

 
   
  ^^^▲ 모전석탑 1층 네 면에는 각각 하나의 감실이 있다
ⓒ 이종찬 ^^^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이 모전석탑, 그러니까 분황사 3층석탑은 국보 제30호야. 그리고 방금 신 선생이 말한 그 목 잘린 부처는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게 아니래. 그리고 이 탑도 일제시대였던 1915년에 일본학자가 해체한 뒤 복원했대. 그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사리장엄구(舍利莊嚴球)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원형 모양의 함이야.

그리고 그때 병 모양의 그릇과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도 발견되었대. 하긴 일본학자가 해체 복원했으니,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유물이 나왔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어쩌겠어.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 유물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대.

분황사에는 이 3층석탑 외에도 마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유물들이 몇 개 더 있어. 3층석탑 왼쪽 뒤에는 화쟁국사비편과 삼룡변어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어. 또 모전석탑 뒤편 잔디밭 곳곳에도 석등과 큰 돌덩이 같은 많은 돌들과 허물어진 탑의 재료로 보이는 벽돌 모양의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어.

화쟁국사비편은 또 뭐냐구? 화쟁국사는 왕이 내린 원효대사의 시호야. 그러니까 화쟁국사비편은 원효대사의 덕을 기린 글을 새긴 비석, 그 비석을 받쳐주던 일종의 주춧돌이라는 거야. 비석은 어디 갔냐구? 그건 아빠도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몰라. 다만, 이 비대(碑臺) 위쪽에 쓴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 감실 안에는 목 잘린 부처가 들어 있다고 한다
ⓒ 이종찬 ^^^
 
 

"저 식수대가 삼룡변어정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 옆에 있는 팔각 모양의 돌우물이 삼룡변어정이니더."
"근데 우물 안은 둥글게 되어 있는데, 왜 하필 우물 밖은 팔각으로 만들었을까요?"
"둥근 모양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윤회, 화합을 상징하고, 팔각은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니더."
"팔정도?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의식, 바른 명상?"
"어허~ 웬만한 스님 뺨치겠네?"

푸름아 그리고 빛나야!

신라시대 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뛰어나다는 삼룡변어정에도 얽힌 설화가 있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는 청지(靑池), 동지(東池) 그리고 분황사에 각각 한 마리씩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대. 그런데 원성왕 11년, 서기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호국용을 훔쳐가기 위해 주문을 외워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켰대.

그리고 물병 속에 집어넣고 서둘러 당나라로 떠났대. 그런데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기 남편을 찾아줄 것을 간청했대. 물고기로 변한 그 용들이 자신들의 남편이라면서. 그래서 원성왕이 서둘러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크게 꾸짖고 용 세 마리를 되찾아왔대. 그 뒤부터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게 되었대. 다시 말하자면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란 그런 뜻이지.

"1991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분황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서 발굴을 시도했다면서요?"
"그때서야 비로소 이곳 분황사가 품(品)자 모양의 가람이고, 1탑 3금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더. 그라고 품자 모양의 가람 배치는 주로 고구려의 초기 절터에서 조사되었다고 하니더. 그러니까 신라지역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 말이니더."

 

 
   
  ^^^▲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화쟁국사비편
ⓒ 이종찬 ^^^
 
 

그래. 그 이후 분황사는 3차에 걸친 중건과정에서 지금처럼 1탑 1금당 형식으로 바뀌었대. 또 금당의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었고. 지금 금당 앞에서는 여러 명의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부처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절을 하고 있어. 아마도 칠월 백중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1991년에 출토된 유물은 없었나요?"
"와 없었겠능교? 하지만 그때 발굴된 것은 대부분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 종류였다고 하니더. 1500여점이 출토되었다던가?"
"자료에 보면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도 목이 잘린 불상들이 수없이 나왔다면서요?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고."
"아마도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불교를 억압하니까 불상들을 숨기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니더. 아니면 왜놈들 짓거리인지도 모르고."

 

 
   
  ^^^▲ 화쟁국사비편
ⓒ 이종찬 ^^^
 
 
 
   
  ^^^▲ 석탑 네 면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동물이 지키고 있다
ⓒ 이종찬 ^^^
 
 
 
   
  ^^^▲ 삼룡변어정 앞 풀밭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불상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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