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방, 北 폐쇄 30년의 생과 사
중국 개방, 北 폐쇄 30년의 생과 사
  • 백승목 대기자
  • 승인 2008.12.23 0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혁개방이 중국도약의 30년, '우리식 사회주의'가 북 멸망의 30년

중국 도약의 30년, 北 멸망의 30년 30년 역사의 의미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 간 내려오던 막부(幕府)가 1866년 폐지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 진 후 1867년 학제와 세제개정, 징병제 채택 등 서구를 모델로 한 개혁과 부국강병책으로 명치유신(明治維新)에 착수하여 軍國化의 길로 치달았다.

천황제 입헌제국주의를 채택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 1904년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1937년 중일전쟁을 유발하고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가 1945년 8월 원폭 2방에 무조건 항복이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사이 일본은 근대 공업국가로 발돋움하여 군사력 증강을 통해서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아시아의 패권을 노릴 만치 급속하게 성장 하였다.

이와 달리 우리는 1894(甲午)년 7월 청일전쟁 뒤에 일본을 업고 재집권한 대원군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정치제도 및 행정·사법·교육·사회 등 자의반 타의반으로 개혁(갑오개혁=갑오갱장)에 착수했으나 10년도 못가서 을사보호조약(1905)을 거쳐 한일합방(1910)을 당하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채 10년도 못 간 '타의半 자의半' 식 한국의 갑오개혁보다 만 27년 앞선 일본의 야심찬 明治維新의 성공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35년의 힘이 됐고 한일 간 근대화 및 기술격차 30년으로 굳어져 내려 온 것이다.

개혁개방 30년, 우리식 30년 모택동의 사망과 악명 높은 문혁이 끝나면서 복권이 된 유명한 黑猫白猫論의 주인공 등소평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면서 개혁개방과 박정희 식 발전모델을 채택한 이래 30년 후인 2008년에는 올림픽도 치르고 외환보유고 세계 1위의 신흥 경제대국으로 성장 시켰다.

그런가 하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지척에 있는 北에서는 김정일이 1978년 12월 노동당고위간부회의에서 "우리식대로 살아 나가자.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당이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는 전략적 구호이다"라며 개혁개방을 완강히 거부해 온 결과로 300만이 굶어죽고 30만 기아 난민이 한중국경지대를 헤매는 지구상 최빈국이 됐다.

그렇다면, 北을 30년 동안 지배해 온 굴레인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幽靈의 실체는 무엇일까? 김정일은 1989년 당 기관지 근로자 10월호에 실린 "우리식대로 살아 나가는 것은 우리당이 일관하게 견지하고 있는 전략적 방침"이라는 논문에 이어 1991년 5월 5일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라고 한 담화문과 1994년 11월 1일 발표한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논문에서도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잠꼬대를 계속해서 늘어 놨다.

북이 주장하는 "우리식사회주의" 즉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의 정의를 보면 "우리당이 내놓은 혁명적 구호의 하나, 구호에는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제 정신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며 모든 것을 우리 혁명과 우리 인민의 이익에 맞게 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하여 개혁개방 자체를 이단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식이 됐건 너희식이 됐건 거창하게 개혁이 아니라도 중국이 했던 것처럼 집단농장만 해체했어도 300만 씩 굶어죽고 외국에 구걸을 해야 하는 비극은 모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1997년 6월 24일 조선일보는 당일 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했다.

그런데 그날로 부터 만 11년 반이 지난 2008년 12월 23일 현재 사정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와 절망에 앞서 소름이 돋는다.

그 후에 北과 조선일보는....... 북은 해마다 흉년이 들고 식량이 부족하여 중국과 서방에 구걸을 하고 우리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을 해오면서도 핵실험을 자행하는 好戰 狂의 버릇을 못 버리고 있다.

앞으로 30년 후 아니 3년 후에도 北이 존속할 것인가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조선일보 등 우리의 보수언론에 대하여서는 북의 김정일과 남의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반미친북역도'로부터 '안티조선'의 표적이 되어 무차별 공격을 받아야 했으며 언론개혁을 빙자한 조중동 BIG3 죽이기 소동은 그치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6.15선언 직후인 2000년 8월 5일 KBS 박권상과 한겨레 최학래를 단장으로 하여 조선 동아를 제외한 46개 신문방송통신사 사장단이 김대중의 충복 박지원 인솔로 방북하여 8월 11일 김정일에게 "남북언론합의서"를 바치고 집단 투항을 한지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위 사설에 언급 된 1997년 6월 22일자 KBS '일요스페셜'은 북의 장마당 꽃제비 참상 영상물을 방영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아직 조선일보에 1997년 6월 24일 그 때의 義氣와 正義 그리고 정론직필의 사명감이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핫이슈포토
핫이슈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