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과 동학의 관련성 여부에 대한 고찰
민주화 운동과 동학의 관련성 여부에 대한 고찰
  • 안형식 논설위원
  • 승인 2008.10.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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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원래대로 '최제우의 난'으로 바로 잡아야

들어가는 말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정의에 의한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며 둘째는 정치인의 선동과 불온세력의 개입으로 인한 저항운동이다.

해방 후 남북한 공동 선거를 위한 모든 노력은 김구 선생의 암살로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미군정의 보호 아래 남한 단독의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남한에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각종 반대시위가 불일 듯 일어났다.

특히 자유 민주주의 정신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특정 한다는 헌법이 공표되면서 공산 주의자들의 시위는 오히려 합법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헌법에 명시된 사상, 표현, 종교, 집회, 시위의 자유가 효력을 발하면서부터 공산주의자가 시위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시위에는 공산주의자가 개입되었다. 공산주의자가 시위에 개입되면 시위의 양상은 판이 커지고 혁명이론에 근거한 끝장 보기로 사회적 불안을 야기 시켰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설치했으나 상위법인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자유권이기 때문에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국민에게 공산주의가 용인될 수 있었던 원인은 공산주의의 혁명이론 전 단계인 저항 논리가 일제강점기 기간 중에 신지식으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문화를 이끌었던 한국의 지식층인 작가들이 동반작가로 활동을 했던 이력을 보아도 충분히 입증된다.

한국의 동반작가 및 작품으로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 '한귀', '홍수 전후', 이효석의 '노령근해', 유진오의 '여직공', '오월의 구직자' 등이 있다.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동반작가의 의미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기의 수년 동안만 가능했다. 프로 문학이 객관적 정세악화에 부딪친 1931년 이후부터 동반작가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기 시작하였으며 프로 작가조차도 전향하기에 이르렀다. 1934년 박영희의 전향선언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경향”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처럼 당시 한국을 대표할만한 위치에 있는 지식인들에게 있어서조차 공산주의는 새로운 지식의 하나이며 또 다른 민주주의사상으로 인식되었다. 이 원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이 한일합방으로 인해 무너짐에 따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받쳐 주었던 정신체제도 함께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무너진 정신체제를 대체해 줄만한 지식 혹은 종교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정신, 일본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 일본을 몰아 낼 수 있기까지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의지를 줄 수 있는 그것을 열망했는데 그 입장에 맞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였다.

당시 공산주의는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만주를 통해 들어 왔으며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지식인들이 받아 들였던 신지식의 하나였다.

일본 식민지 당시의 문화권은 자유민주주의 보다는 오히려 공산주의와 입맛이 맞았다. 공산주의의 혁명논리는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운동과 191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항일의병활동,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3.1 만세 운동과 같이 항일애국의 저항운동에 이론과 힘을 실어 주는 실천논리로 적합했다.

천도교는 이를 잘 활용했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은 관군과 무력충돌을 일으키면서 접주 전봉준이 역적의 죄목으로 참살을 당한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고민 끝에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학교도들을 모아 민족종교라는 이름으로 천주교와 맞선다는 의미를 담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이름을 바꿨어도 꼬리에는 여전히 접주 전봉준은 역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때에 러시아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의 혁명이론은 동학의 취지에 맞는 이론을 제공해 주었고 따라서 동학은 공산주의 이론과 동학의 이론을 접붙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유영익 교수는 천도교의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40년에 출판된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를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

유 교수는 "오지영이란 인물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천도교계의 아마추어 역사가이자 역사 소설가"였음을 밝히면서, "오지영은 한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던 1938년에 '역사소설 동학사'를 탈고했는데, 그 속에 횡포한 부호배는 엄징할 사(제 3조)와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사(제12조) 등이 포함된 폐정개혁안을 고안하여 첨언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오지영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을 무지한 농민이 이끈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내지 계급투쟁으로 묘사했다" 고 비판했다.

유 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를 "1894년에 공포된 모든 동학농민운동 자료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건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오지영이 만들어 낸 가공 안이며 특히 12조는 그렇다. 그래서 오지영은 자기 책을 출판할 때 제목을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던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교과서를 왜곡한 당시의 교육부 관계자를 고발하고 있다. "2002년에 출판된 근. 현대사 교과서에는 [12개조 폐정개혁안]을 마치 믿을 수 있는 사료인 것처럼 인용했다. 인용하면서 역사소설이라는 제목은 빼고 동학사로 인용했다. 따라서 이는 교과서의 독자들을 속인 행위이다" 라고 성토했다.

1. 동학은 동학교도에 의한 무장봉기

유영익 교수 (한국사: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는 계간 시대정신의 특집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중대한 사실을 밝혔다.

"...더 심각한 것은 2002년판 근. 현대사 교과서 집필자 가운데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은 애당초 동학농민운동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12개조폐정개혁안]을 인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교과서를 검증하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마련한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 안'에 [12개조 폐정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실어야 했다"고 전한다.

이어 유 교수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는 이야기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역사왜곡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벗으려면 그 준거 안을 만든 학자의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서술과 관련하여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2002년판 근. 현대사 교과서 거의 모두가 동학농민운동을 '반봉건외세'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고 말 하였다.

이어 유 교수는 "구체적인 오류는 상당하지만 두 가지만 언급해 본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서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6종 교과서 전부에 [동학십이개조폐정개혁안]을 인용함으로 동학혁명을 반봉건 운동으로 규정한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라고 이야기 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동학십이개조폐정개혁안]을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12개조 폐정개혁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어떠한 공사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유영익 교수는 동학이 역적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경주한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동학은 동학교도에 의한 무장봉기이지, 이것이 무슨 혁명이니 운동으로 포장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현직 교육부 공무원과 준거 안을 만든 학자가 연합하여 한국의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고발은 충격에 가깝다.

당시의 대통령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5.18을 혁명으로 승화시켜야만 민주화 운동으로 성역 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기 때문에 5.18과 성격이 같은 동학을 혁명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의 작업은 결국 5.18을 민주화 운동의 성역으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으나 오히려 동학과 5.18은 무장봉기에 의한 반국가적 민란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광주는 반골의 도시로 굳어지고 말았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10•4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 학술회의 격려사에서 "역사는 그 시대에 사는 시민들의 행동과 생각에 의해 진보한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동안 정권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연인으로 돌아간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역사는 정권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권이나 권세는 부침이 심하고 때로는 태풍이 분다고 말할 만큼 변화무쌍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진보를 향한 시민들의 사상과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을 하고 있는 동안에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노 전 대통령의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가공할 내용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금성출판사의 근, 현대사는 좌편향 되어 있으며 이를 그대로 가르칠 경우 좌파 및 반골들이 양산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된 동학의 경우, 이를 비판한 유영익 교수는 뉴 라이트 운동의 중심에 있는 '계간 시대정신'에서 마련한 특집대담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특집대담은 금성출판사에서 출판한 근, 현대사에 대한 좌편향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한 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모인 원로 역사학자들의 공론의 장이었다.

국내의 저명한 역사학자들과 원로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중, 고등학생에게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에까지 친북의 독을 풀어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두 전직 대통령이 풀어 놓은 좌파, 친북의 독이 역사 교과서에서 얼마의 농도로 풀려 있는지 '동학'을 근거로 살펴보자.

2. 동학은 '최제우의 난'으로 바로 잡아야

동학은 '최제우의 난'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대중에 의해 동학은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전라도의 자존심으로 추앙되고 있다. 동학은 정감록을 믿는 동학교도이 일으킨 무장봉기이며 무능한 왕조로부터 정권을 쟁취하여 신천지를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진 '난' 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면, 동학 접주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란으로 정의된다. 여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동학은 그 성격이 동학교도들에 의한 무장봉기라는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될 수 없다.

만약 동학이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된다면 친북자들이 벌이고 있는 일체의 반정부 반체제 운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정의되어야 하며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의 포기를 뜻하며 국가의 전복을 의미한다.

세계 사회에서 인정하는 민주화 운동은 분명한 경계점을 가지고 있다. 비무장, 비폭력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성격이 규정된 민주화 운동은 비무장, 비폭력일 때로 한정되고 있다. 윌슨 이후 간디의 비무장, 비폭력 운동, 만델슨의 비무장 비폭력 운동은 근대 민주화 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의가 세워졌다.

한국이라고 해서 이 정의가 따로 적용될 수 없다. 오히려 한국은 북한과 전쟁 중에 휴전된 휴전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준용되어야 할 처지이다.

김대중에 의해 동학이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되자 대학생의 시위에서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난무했다. 이는 동학의 무장봉기를 통한 신천지 수립이라는 논리와 공산주의의 무장봉기에 의한 괴뢰정권 수립이라는 혁명논리가 근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전적 정의와 역사적 정의에 의하면 동학은 “동학교주 최제우가 동학교도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최제우의 난”이다. 농민봉기, 동학혁명, 기타 등등의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동학운동은 세 가지 면으로 접근해야 정확한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첫째는 동학의 정체에 대한 접근이며, 둘째는 동학의 윤리이며, 셋째는 동학이 3.1 운동의 근간이라고 하는 동학과 3.1 운동과의 관련성 문제이다.

1) 동학의 정체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내용을 놓고 해석해 보자.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반제, 반봉건, 근대화운동으로 농민전쟁,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에는 동학의 조직을 이용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 도시민, 소상인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따라서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을 이용했지만, 동학운동은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국가보위와 농민구제를 이념화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개인의 내면 구제는 궁극적으로 사회구제를 동반하지 않을 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고종 31년(1894)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항거에서 발단하여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 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후에 항일 의병 투쟁과 3•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로 되어 있다.

동학의 역사를 보면, 동학은 유교학자인 최제우(제선)가 1860년에 창립했다. 창립이유는 천주교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최제우는 정감록을 경전으로 삼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정감록을 가르쳤다. 서학(천주교)에 상대하겠다는 뜻으로 동학이라고 했다.

동학은 유, 불, 선, 도교, 천주교의 사상을 취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원군 시절 급속히 민간에 퍼지는 천주교에서 힌트를 얻어 천주교에 대항하고 대치하기 위해 천주교의 집회소와 같은 형태의 집강소를 만들어 동학을 가르쳤다.

그 뿌리가 정감록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 신천지를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접주 전봉준은 역모혐의로 참수형을 당했고 2대 교주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대 교주로 등극한 손병희(孫秉熙)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다가, 1905년 동학교도인 이용구(李容九)가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에 앞장서자, 손병희는 이용구와 손을 끊고 사방에 흩어져 있는 동학교도들을 모아 '천도교'로 개명했다.

동학의 교리는 세상을 뒤집는 주체가 되겠다는 뜻으로 공산주의 혁명사상 특히 주체사상과 코드가 맞아 떨어진다.

2) 동학의 원리는 정감록

동학의 원리인 정감록은 조선중기부터 민간에 떠돌고 있던 무속인의 예언집이다.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 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정감록은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 무학, 토정, 격암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년) 홍복영의 옥사사건 기록이 있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 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정감록의 악폐였다.

천도교가 가공의 인물인 단군을 숭상하고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과 환웅을 이 땅에 내려 보냈다는 시천주를 상제로 삼은 것은 동학을 천도교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근본적인 한계이다.

만들어 낸 신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촉수할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인 하늘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신은 곧 천주교에서 지칭하고 있는 상제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이를 천주교의 상제와 분리하기 위해 시천주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단군도 인간이라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에 신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정감록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한 도사를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천도교를 통해 도사가 되면 신이 된다는 논리이다.

3) 동학의 윤리는 혁명논리

동학의 혁명논리는 무능력한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 그 위에 동학의 사상을 담은 국가를 세운다는 신천지론의 강령에서 동학의 윤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윤리는 동학이 공산주의를 채용했든 안 했든 간에 공산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괴뢰 정권 수립론과 동일본질이다.

공산주의가 노동자천국을 만들겠다는 노동자 지상천국론(2차 산업)을 제시한 것이라면, 동학은 그 보다 한 차원 아래인 농민 지상천국론(1차 산업)을 제시한 점에서 이 둘의 근본은 하나이다.

4) 3.1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과 무저항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목적한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근대 역사에 있어서 3.1 운동이 가지고 있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3.1 운동만큼은 순수한 민주주의의 효시로 표지된다. 따라서 3.1 운동 정신을 계승했다는 말은 민주주의로서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부여한다.

3.1 운동 을 제외한 모든 운동은 특징적인 목적이 있다. 동학의 목적은 기독교를 끊어내기 위한 집착으로 출발되었으나 전개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관군 습격과 무기 탈취로 무장한 후, 한양까지 쳐들어가 임금을 몰아내고 새천지를 세우겠다는 광오적인 발상에 의해 역적의 죄를 지고 끝난 난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대 교주인 손병희는 동학 조직을 재정비하여 단군을 국조로 하는 신천지 개념을 강령으로 채용한 천도교를 창시했다.

이는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이단의 교조들이 행하는 전형으로 하나의 이단종교를 창시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는 단군을 국조로 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덜 받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천도교를 창시했으나 근본이 없는 천도교는 포교되지도 못했고 추종하던 기존의 동학교도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자 전통성과 역사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으로 3. 1 운동에 편승했다.

이 사실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중에 기독교 대표인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목사가 태화관에 나오지 않음으로 그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태화관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천도교가 3.1 운동을 교세 확장을 위한 목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는데 대한 반발이었다.

실제로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곧 바로 천도교도들을 이끌고 종로경찰서로 가서 자수하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다. 심히 의구심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이들이 취조를 받는 중에 YMCA, YWCA, 기독교 학교 학생이 전국 규모로 일으키기로 계획되어 있던 3.1 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과 정보가 어느 정도까지 새나갔는지는 모르나 조선총독부는 모든 기독교 학교들에 대해 즉각적인 폐교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지도자를 잃은 3.1 만세 운동의 거사는 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산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들여다보자.

당시 기독교는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3.1 만세 운동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정보가 조선총독부에 알려지자 총독부는 즉각 폐교령을 내렸다.

조선의 간디로 불리는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책임으로 인해 교장을 사임해야 했다. 선생은 사임하고 난 뒤 평양에서 제2차 만세시위운동 조직책임자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폐교령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 온 이화학당의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고향인 천안에서 학생들 중심의 3.1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기미년 음력 3월 1일 천안시내 한 복판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비무장 비폭력으로 일본의 총칼에 맞선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일본 경찰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유관순 열사는 투옥 중에도 만세를 부르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다가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선비가문 출신으로 부모와 함께 매봉교회에 출석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3.1 만세 운동은 앞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철저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비무장, 비저항 운동으로 순수한 기독교 정신으로 일으킨 운동이다. 이로써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3.1 만세 운동은 기독교 정신의 비폭력, 무저항의 민주화 운동의 성격이 선명한 반면, 손병희에 의해 급조된 천도교의 정치적 목적 하에 편승한 3.1 운동 편승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두산백과 사전은, 천도교 측은 1918년 l월 민족자결의 원칙에 대해 문제의식은 터득하였으나 이는 극히 회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일면 무장세력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농어민 •노동자 •상인 •학생 등의 범국민적 봉기도 계획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어서 고종의 승하를 최대의 기회로 삼고 민중운동의 봉기를 앞당겼으며 2월 15일에 유교, 불교, 기독교 측과 학생단 등과의 연락을 완료하고 3월 1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3.1 운동은 천도교에서 10년 동안 기획했던 결과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 내용 중에는 천도교가 주체가 되기 위해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단체와 접촉했으나 불발로 그쳤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자들의 연합대회로 구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성사의 최린은 인쇄물을 담당했고 기독교는 기독교 조직과 학생 동원을 맡았다. 기독교는 태화관과 가까운 승동교회와 YMCA에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과 학생동원 등을 준비했었다.

불행히도 이 대목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산백과의 기술은 천도교의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는 서술이다.

두산백과에는 천도교가 주도한 것으로 기술했으나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마자 종로경찰서로 가서 자수한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입장에 대해서는 서술치 않았다. 또 손병희의 자수로 인해 기독교 중심의 3.1 운동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다.

5) 길선주 목사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길선주 목사는 33인 중에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점에서 안티기독교도들을 위시하여 3.1 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과연 실제도 그러한가?

임헌영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자 명단에는 이들 33인 중에서 최린(천도교), 박희도(기독교), 정춘수(기독교)가 올라와 있다.

실제로 들어가 보면 길선주 목사는 조직만 없었을 뿐, 천도교의 손병희와 맞서서 종단을 하나 만들 수도 있을 만큼의 실력을 입증 받은 도인이며 무술 인이었다.

그는 당시에 수차례의 입산수도를 했으며 관우를 섬기는 무속 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이끌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도사였다. 그의 무술은 평양시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평양깡패라는 별칭을 달고 다녔다.

길선주 목사의 고백을 들어 보자.

“1896년 어느 날. 저의 오랜 지우 김종섭의 권유로 ‘삼령신군’ 대신 ‘상제님’께 기도를 드리던 날, 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저는 마펫(S. Moffett) 선교사 등과 교류하면서 1900년에는 장로직분을 얻고 1907년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해 기독교에 탄탄히 뿌리내리게 됐습니다. 대대적인 성령체험 운동을 주도하면서 말이죠.”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던 길선주 목사는 한글성경과 천로역정 등의 기독교 서적을 탐독했다. 천로역정을 읽고 난 뒤에 그날 밤에 밤을 새워 회개의 기도를 통해 전도자로 서원을 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의 길을 걸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좀 더 설명해 보자.

1897년 개신교에 입교한 해에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어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부흥 집회와 구국기도회로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되었고 함께 체포되었던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다. 당시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고 모임 불참 사실도 확인된 길선주는 체포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순직했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고도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제외되었으나, 최린과 박희도, 정춘수가 추후에 구체적인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변절자로 불린데 반하여 길선주는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늘까지 방치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길선주 목사는 무죄를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3.1 운동에 서명한 민족대표라는 죄명으로 2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2년 동안의 옥살이 후에 무죄로 방면되었을 뿐이다. 길선주 목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기에 저도 개신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동참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돌려 달라고 ‘청원’하는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을 내달라고 의뢰하는 것’처럼 ‘청원’ 정도야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더군요. 재판과정에서 판사에게 정부에 대해 불평,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철저하게 좌절했지요. 그리고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저는 더욱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계시록을 1만 번이나 읽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2년여 동안의 옥살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때 심취한 계시록 덕분에 저는 심판의 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총을 비롯하여 기독교계에서조차 이 문제를 거론치 않고 있음은 심히 유감 된 일이다.

당시 기독교 대표들이 겸손해서 수고는 많이 했으되 그 공은 천도교나 불교 쪽으로 돌렸는지는 모르나 현재인은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역사는 공과 과를 떠나 정직하게 기록되었어야 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이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는 등으로 고초를 겪었고 민족대표 33인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에도 3.1 운동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3.1 운동을 주도한 기독교 측에서는 수감 중에 있는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구명운동과 함께 위로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에 대해 공평하게 공을 돌리는 겸손한 입장을 취함으로 위로했다. 그러나 천도교와 불교는 기독교의 입장과 달리 3.1 운동을 자신들이 주도한 것처럼 공을 빼앗는 작업을 해왔다.

천도교는 3.1 운동의 공을 천도교로 돌리는 작업 끝에 천도교 교인인 초대 문교장관인 안호상 씨를 통해 의미 있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것은 고려시대 승려인 일연의 작품 '삼국유사'에서 발굴한 단군신화를 국사교과서에 올림으로 대한민국의 국조를 천도교의 국조인 단군과 일치시킨 일이다.

이로써 천도교는 단숨에 민속종교의 차원을 뛰어 넘어 민족종교로 급부상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종교가 되었다.

이 교과서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역사, 특히 교과서는 사실에 입각하여 기술되어 있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는 고려시대의 문학작품인 신화를 채택하여 한국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심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 정부와 공직자는 50년 동안이나 국사 교과서 하나 바로 잡지 못한 채 한국을 이끌어 왔다.

한국의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군신화가 대한민국의 국사로 채용되어 있는 50년 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도 없거니와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사실도 없다.

근래에 들어 와서 덴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일과 SBS '신의 길, 인간의 길'(김종일 연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과 불교계에서 제기한 '종교편향'에 대한 입장 표명 등 기독교의 기득권 사수 등으로 비쳐질 수 있는 정치적 이슈에 해당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 고작이다.

이는 기독교 내부의 관심이 교회 중심의 목회지상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을 일체화시키는 일에만 열중했을 뿐, 기독교 전체의 부흥에는 소홀했다.

전체 교회의 수가 1만 교회를 넘어 한국의 개신교를 대표할만한 위치에 있는 합동 측의 경우에도 교회 중심의 이기주의는 만연되어 있다.

총신신대원의 교수인 박용규 교수의 예를 들어 보자. 박용규 교수는 총신신대원 체플 시간에 구 대성교회의 원로목사가 피가름 교리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을 지적하여 신학적으로 이단이라고 설교했다.

이를 이유로 평강교회(구 대성교회)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였다. 박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단과 전국 교회 앞으로 기도를 요청하면서 재판비용에 대한 지원요청을 했으나 교단 측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비록 대법원을 통해 승소하기는 했으나 박 교수는 이 고소사건으로 인해 2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교단 측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섭섭함으로 마음고생을 상당히 해야 했다.

맺는 말

이문열 교수는 과거의 기독교가 한글성경을 통해 한글보급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당시 문교부에서조차 한글성경에 사용된 맞춤법을 그대로 따를 정도로 한글 발전에 혁혁한 공로가 있다고 찬사했다.

한글성경 다음으로 한글개역성경이 출판될 때에는 문교부에서 한글 맞춤법에 대한 토론을 통해 상호 보완 작업을 벌일 정도로 한글성경은 대한민국 전체의 문화라 할 수 있는 한글을 이끌었다.

해방 당시 한국인의 약 80%는 문맹이었고,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이 중 신교육을 받은바 있는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자는 전체의 0.2% 미만이었다. 따라서 건국 후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를 갈파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1949년 1월에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어 1950년 6월에 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국민이 6년간 의무교육을 받도록 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로 하여금 의무교육 실시에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도록 공포하였다.

그러나 의무교육제도는 6•25전쟁을 치루는 와중에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이듬해인 1954년부터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되었다. 1959년까지 전국 초등학생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당시에 전국의 어린이는 교회로 몰려들어 성경과 찬송가를 배웠다. 안 믿는 부모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교회에 보내는 것이 그 시대의 흐름이며 유행이었다. 이때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성장하여 현재 기독교의 중추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는 기독교 본질의 정체성을 망각한 듯 보인다. 오직 교회 목회성공지상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과거에 수많은 국내 전도자들이 뿌려 놓았던 씨는 추수하여 고급선교에 투자되고 있으며 국내의 기독교 부흥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단이나 교회는 전무한 실정이다.

천도교는 단군을 시조로 삼고 한국의 역사를 천도교화 하는데 성공한 반면, 기독교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역사와 문화는 미래에 대해 근거 있는 꿈과 소망을 주는 스토리이다. 스토리가 없는 한국교회는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목사도 5년 이상 목회를 하게 되면 성경에서 끌어 낼 수 있는 설교에 대한 소재는 다 한 번 이상은 다뤘기 때문에 새로운 설교의 소재를 찾는 일이 큰일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목사에게서 10년 이상 설교를 들은 중진들의 경우, 식상하지 않겠는가? 우려먹은 설교에 아무리 양념을 달리해 본들 본질이 같기 때문에 표현만 달라질 뿐, 그 내용이 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에서 나온다.

동학과 같은 왜곡되어 있는 역사는 바로 잡아 주어야 하고, 기독교 100년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은 집대성하여 후대에 남길 작업을 해주어야 한다. 6.25 사변을 전후하여 세계 각국의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원조와 구제를 받아 이만큼의 성장을 이룬 초석이 기독교였음을 밝히 드러내고 현대와 후대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루어 냈던 중대한 공은 타 종교에 빼앗기고 남은 것이라고는 상처 밖에 더 있는가?

타 종교인이 주축이 되어 있는 안티기독교와 불교 우선정책을 펴고 있는 정권들과 심지어 친북적 공산주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에 들어 와 있는 무슬림권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혜안을 가지고 중요하게 접근했다면, 한국이 오늘 날에 와서 이단천국이니 무슬림 천국이니 좌파천국이니 세계 1위의 자살국가라는 오명을 막을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국의 교회는 세계 제일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선교에 있어서도 가히 세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신학은 현재까지 스스로의 토종박사를 배출하지 못할 정도로 열등하며 한국의 신학교는 외국 유학파 신학자들에게 강단을 점령 당했다.

이들 유학파 신학교수들은 한물 간 신학을 배웠다. 자유주의는 물론하고 심지어 사신신학을 배웠다. 그 배운 것으로 보수주의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다.

원인은 한국인의 정체성 결여에 있다. 정체성 결여는 역사관과 문화관에 대해 열등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먼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부터 확립해야 하며, 한국 기독교 1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한국기독교문화비평사' 정도는 내놓아야 겨우 기독교의 체면을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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