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5년 대한민국 역사에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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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조인과 격렬한 반대

 
   
  ▲ 당시 학생들의 시위 모습  
 

한일협정조인

1965년 6월 22일 한일 두 나라 정부는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 정상화 교섭을 모두 끝맺고 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실력투쟁이 정국을 긴장속에 몰아넣는 가운데 거행된 조인식은 이날 오후 5시 동경에 있는 일본 수상 관저에서 한국측 수석 전권대표 이동원 외무장관, 일본측 수석 전권대표 시이나 에쓰사브로오 외상과 그 수행 대표들 사이에 30여개의 제 협정안 및 그 부속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끝났다.

14년 협상에 매듭을 짓는 한. 일 제 현안 타결을 위한 조인식에 양국 실무자들은 21일과 22일 이틀동안 30여종에 달하는 제 협정문과 부속문서들에 대한 마지막 손질을 끝냈다.

22일 오전 11시 일본 외무성 접견실에서 시이나 일본 외상과 제2차 회담을 열고 마지막 쟁점인 독도 문제와 미합의점인 어업협정의 유효기간 등에 관해 최종 합의를 본 뒤 정부에 보고, 각의의 승인을 얻어 조인식에 임했으며 각 부위 수석 대표들이 배석하여 부속 문서 등에 서명했다.

조인식 스냅

역사적인 한. 일 회담 조인이 있을 사또오 일본 수상 관저는 전날밤의 철야 작업으로 말끔히 정돈되고 테이블 커버도 말끔한 카페트로 덮여 있었다. 회의장 중앙에는 왼쪽에 태극기, 오른쪽에 일본기가 걸려 있고 테이블에는 국화와 카네이숀 화분이 놓여 있었다.

조인식이 거행되는 이날 동경의 날씨는 흐리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회의장 중앙에 걸린 양국 국기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 회의장은 지방장관 회의 때나 수상의 기자회견 때 그리고 신임 장관의 시책 발표시에 이용된다고 하는데 건물은 약 40년 전에 건축된 것으로 구조는 제국호탤 구조와 흡사한 점이 많았다.

5시 10분전, 앞당겨 도착한 김동조 주일 대사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역사적인 조인식을 보도키 위해 몰려든 2백여명의 보도진이 붐비는 가운데 일본측 대표들과 조인식 진행에 관한 협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앙 테이블을 중심으로 왼편에 이동원 외무장관, 오른 편에 시이나 외상이 앉고 이들을 중심하여 양쪽 대표들이 갈라앉게 마련되었다. 정각 5시, 헨델의 개선 행진곡이 미리 마련된 자위대 악대에 의하여 연주되는 가운데 이동원 장관과 시이나 외상을 선두로 한 양측 대표들이 수많은 카메라맨의 플래쉬 공세를 받으며 차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5시 3분, 이윽고 양국 대표는 앞에 놓인 조약문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된 이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은 한 장 한 장 조약문을 넘기고 서명했다. 조약문 교환이 끝난 후 시이나 외상은 조용히 기립하여 약간 탁한 음성으로 인사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며 한국 대표분들의 노력에 사의를 표한다"는 말에 이어 "양국 국민의 진지한 노력의 결정인 이 조약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딱 딱한 인사, 5시 29분 시이나 외상의 인사가 끝나자 이 외무장관은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양국은 밝은 장래를 약속한다. 이 양국 간의 조인이 양국은 물론,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모든 고난 끝에 오늘에 이른 것이 감개 무량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한일협정 격렬한 반대

정부의 독주에 결사적인 반대를 절규하는 야당의 여론은 점차 격앙하기 시작하였으며 학생들의 끈덕진 움직임은 각계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7월 1일 스승들의 연합체인 대한 교련은 경찰의 학생 데모에 대한 과잉 저지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기독교 성직자들은 비준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한편 한. 일 조약 및 협정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기위해 제51회 임시국회가 열리는 12일에는 서울시내 18개 대학교수들이 조인 비준반대 선언을 발표하였다. 7월 1일 유진오 대한 교련 회장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학생 데모에 대한 경찰의 과잉 저지는 국민의 기본 권리를 유린하며 경찰의 기본 자세에 어긋나는 행위로써 이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기독교회 목사 1백여명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한일 협정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5개 항목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동 성명서를 통해 "정부는 한일 협정에 관한 애국적인 국민의 의사 표시를 권력으로 탄압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국회는 정당보다도 한국 역사의 장래를 위하는 의미에서 민족 정기의 앙양을 중시하여 비준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고 국회 비준 반대를 주장했다.

또한 7월 5일과 6일에는 수 천명의 교인들이 영락교회에 모여 국가를 위하여 밤을 새우면서 눈물로 기도회를 열고 5백만명 반대 서명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1일 하오에는 재경 기독교 교역자와 6천여 신도들이 영락교회에 모여 한일 협정의 비준의 저지를 기원하는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를 가졌다.

한편 이 나라 지성의 최고봉인 대학의 교수들은 7월 9일 사학회의 반대 성명을 필두로 정부의 반성과 한일 협정의 철회를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9일 오후 한국 역사 연구회, 역사학회 및 한국사학회는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일 협정을 백지로 돌릴 것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이 성명서는 "정부나 입법부는 국민의 의사 표시를 누르고 학원의 문까지 닫아가며 한일 협정을 기한부로 비준하려는 독선과 졸속주의를 지양하라"고 주장하면서 한일 협정은 호혜 평등의 원칙에 의한 조약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재경 18개 대학 교수 3백여명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앞 함춘원에 모임을 갖고 한일 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을 결연히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또한 9일 오전, 재경 문학인 82명이 한일조약의 즉각적인 파기와 국회의 비준 거부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체 문학인들도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한편 야당은 굴욕 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대정부 투쟁의 행동을 통일하고 그동안 계속하여 강력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왔으며 민중당은 한일 협정의 반대와 국회 비준 저지를 창당의 제 1목표로 결사적인 투쟁을 다짐하고 있었다.

드디어 7월 22일 제 51회 임시국회가 개원되자 이날 상오 정부는 한일 협정 국회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여 여야간의 결사적인 마지막 포문을 각각 열고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매국적 외교로 단정하고 정부의 비준 강행책을 비난하여 국회에서 비준 저지를 외치는 학생, 교수단, 문학인, 종교인 등 각계 각층의 열화와 같은 절규와 국민의 비분에 찬 여론을 등에 업고 나선 야당의원들은 의원직 총사퇴라는 비장한 저지책은 국운의 긴박성을 더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숱한 정치적. 사회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 40분 양국은 협정비준서를 교환, 한국과 일본은 정상 국교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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