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김달진관장의 미술사이야기, ‘포스터 이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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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김달진관장의 미술사이야기, ‘포스터 이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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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에 위치한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진행된 제9회 김달진관장의 미술사이야기, ‘포스터 이야기’ 2편에서는 지난 포스터이야기 1편에 이어  7편의 포스터를 소개한다.

 

《Entartete Kunst》, Alten Nationalgalerie·Belin, 1992.3.4-5.31, 83x59cm, 황채금 기증 : 《퇴폐미술 : 독일 나치에서 아방가르드의 운명》, 미국과 독일 순회전,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주최

(김한정 기자)
《Entartete Kunst》, Alten Nationalgalerie·Belin, 1992.3.4-5.31, 83x59cm, 황채금 기증 : 《퇴폐미술 : 독일 나치에서 아방가르드의 운명》, 미국과 독일 순회전,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주최-김달진박물관 전시중

퇴폐예술은 독일에서 나치 독재가 지배하는 동안에 인종이론에 근거를 둔 주장에 의해서 비난을 받은 현대 미술을 공식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선전개념이었다. 퇴폐는 19세기 말에 의약 분야에서 예술분야로 전이되어 사용되었다. 나치는 별개의 예술 이상을 개발했고, 그것과 대립되는 예술을 박해했다. 그들은 대립되는 예술이 비관주의나 평화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몰락의 예술’ 혹은 ‘다른 종족의’와 같은 명칭으로 그 예술들을 지칭했다. 나치의 이상과 합치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거나, 공산주의자거나 유대인인 예술가들은 박해를 받았다.

30년대 말 나치가 표현주의 등장 시 독일 현대미술을 조롱하기 위해 직접 기획, 조직한 퇴폐미술전은 오늘날 예술에 대한 국가의 검열과 탄압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나치는 자신의 이념적, 인종적 편견에 어긋나는 유화, 조각, 판화작품 650여 점을 한데 모아 뮌헨을 비롯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를 순회 전시하면서 작품들에 대한 온갖 비방을 쏟아붓고, 끝내는 그중 상당수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퇴폐적이라고 비난을 받은 화가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에는 '잊혀진 미술가'들에 속하게 되었다.

 

《Park Saeng Kwang pinturas》, 바르셀로나 성 아그스티 문화센터, 2003.6.26-7.5, 95x70cm : 스페인에서 열린 박생광 전시

(김한정 기자)
《Park Saeng Kwang pinturas》, 바르셀로나 성 아그스티 문화센터, 2003.6.26-7.5, 95x70cm : 스페인에서 열린 박생광 전시-김달진박물관 전시중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시민회관 전시장에서 내고 박생광(1904~1985)의 대작 12점이 전시되는 특별전을 열었다. 본래 우리나라와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교류가 없었다. 그러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새겨지면서 양국 간의 교류가 점점 확대됐다.

이후 경기도와 바르셀로나시가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고 다음 해 '제 2회 한국-EU 국제학술대회'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것에 맞추어 박생광전이 개최된 것이다. 박생광 화가는 190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동양화가이다. 일본 교토예대를 졸업하고 명랑미술전 등 일본에서 오래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진주에 머물다가 상경하여 홍익대에 재직하면서 진채를 사용하여 무속적인 독특한 조형세계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색채를 지녔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의 화두는 ‘한국적인 전통성’이었다. 박생광 화백의 작품에서 색채는 강열함을 넘어서 신기, 광기 까지 느끼게 하는 경이로움이 있다. 따라서 그의 미술사적 위치는 우리나라의 채색화 부분에 새로운 가능성과 활로를 제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화로서 표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미국현대판화전》, 미국공보관, 1962.6.17-6.24, 35×25cm, 주최 : 국제신보사, 미국공보관

(김한정 기자)
《미국현대판화전》, 미국공보관, 1962.6.17-6.24, 35×25cm, 주최 : 국제신보사, 미국공보관-김달진박물관 전시중

미국판화가협의회에 의해 기획된 이 이 순회전시는 미국의 대표적 판화가 55명의 작품 62점으로 구성되었다. 식각판, 조판, 목판, 석판·스크린판 등 다양한 기법을 볼 수 있었으며 레오날드·바스킨의 <계관시인의 죽음>, 벤·산의 <비파와 분자>, 모리시오·라산스키의 <환멸>, <송·모이>, <꼬마 5백마일 경기> 등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1일부터 24일 사이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전시장에서 「색채석판술」, 「칼라」(30분), 「판화가」, 「칼라」(20분)라는 기록영화가 상영되기도 하였다. 미국판화가협의회는 1956년 가을 미국 주요 박물관 관장, 유명 판화 수집가, 작가, 상인, 학계중진들이 모여 판화창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이 협의회가 이루어 놓은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이 미국현대판화전(1959년)으로 56년부터 58년까지 55명의 작가들이 창작하여 현재 미국 내 16개 박물관에 소장 중인 오리지널 프린트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이 기획에는 639명이 제출한 2,054점의 판화가 출품되었고, 심사 결과 미국판화계를 대표하는 우수작품 62점이 선정되었다.

 

《Koreanische Tiere und Landschaften》, Museum Alexander Koenig·Bonn, 1981.9.19-10.11, 74x52 : 《한국현대미술전》, 독일 본 알렉산더 쾨니히박물관

(김한정 기자)
《Koreanische Tiere und Landschaften》, Museum Alexander Koenig·Bonn, 1981.9.19-10.11, 74x52 : 《한국현대미술전》, 독일 본 알렉산더 쾨니히박물관-김달진박물관 전시중

이 전시에서는 한국 작가 39명 동양화 12, 서양화 16, 조각 7, 판화 4명)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로는 김기창, 김왕진, 박생광, 이령수, 나상목, 오태학, 장이석, 최영림, 홍종명, 김형근, 이대원, 이태길, 남관, 박성환, 손수광, 송용, 황영성, 임직순, 윤중식, 백금남, 김구림, 최만린, 민복진, 박숙원 등이 있었다. 전시는 한국미술이 점점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인 1980년대에 열린 것으로 이 시기에 해외에 있는 한국미술인들이 단체를 만들어 전시 교류를 하거나 해외 유명 미술관들이 한국 측에 전시를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1980년대에는 독일에서 열린 이 전시뿐만 아니라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 브루클린,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열렸다. 물론 한국미술이 이때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국제전들과 함께 이 전시는 한국미술이 국제 무대로 나설 수 있는 초석이 되어준 전시 중 하나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알렉산더 쾨니히박물관은 독일의 본에 위치한 동물원 연구학 박물관으로 우리나라로 보면 자연사박물관에 가깝다. 각 기후별로 동물들의 생태계를 연구하고 그 특성과 화석 등을 전시하는 곳으로 설립자는 알렉산더 쾨니히다. 그는 본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 목적으로 동물을 수집한 것을 토대로 1903년 이 박물관을 설립했다.

 

《WHANKI》, 미국 Poindexter Gallery, 1973.10.30-11.24, 57x38cm : 김환기

(김한정 기자)
《WHANKI》, 미국 Poindexter Gallery, 1973.10.30-11.24, 57x38cm : 김환기-김달진박물관 전시중

김환기(1913-1974)는 한국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언어로 승화시켜 독자적 예술세계를 정립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한국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어낸 작가이기도 하다. 남도의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3년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 신미술운동에 참여했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신사실파를 조직하는 등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 수업 시대는 미술학교 재학 시와 연구과 시절, 그 후 이과회·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여 당시 일본 신감각파 대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이어갔다. 그는 평생 ‘조선의 특색’을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일까 치열히 고민했고, 그 결실은 생애를 통틀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의 작업은 일본유학시절부터 서울, 파리, 뉴욕 시대를 지나며 차츰 변한다. 그중에 단연 손꼽히는 것은 김환기만의 점묘화법과 특유의 푸른색을 사용하는 ‘환기블루’일 것이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구체적인 기물이 들어가는 대신 반복적으로 찍어나가는 점이 이미지를 대신하게 되며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 일’이 중요했던 김환기는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커다란 화면에 하나하나 점을 찍어 나갔다고 한다. 무한을 상기시키는 푸른 색조의 화면에는 무수한 점들이 찍히고, 네모꼴의 헤아릴 수 없는 점들이 생동하고 있다. 이 점화는 색감, 형상, 깊이의 층위에서 수많은 차이가 있는 개체들의 집합이다. 점 주위를 사각으로 두른 형상은 그림의 가장 기본 요소인 점과 선이자 원과 사각이다. 특히 사각형 내부에 원점이 있는 형상은 동양에서 우주를 상징하는 형상과 유사하여 눈길을 끈다.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를 배열했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포인덱스터갤러리에서의 전시는 24회 개인전으로 <산울림 Echo of Mountain> 등 대형점화가 출품하여 당시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박수근》, 문헌화랑, 1975.10.10.-10.25, 문헌화랑

(김한정 기자)
《박수근》, 문헌화랑, 1975.10.10.-10.25, 문헌화랑-김달진박물관 전시중

 

 《최영림》, 명동화랑, 1971.9.18.-9.24, 51×37cm

(김한정 기자)
《최영림》, 명동화랑, 1971.9.18.-9.24, 51×37cm-김달진박물관 전시중

당시 새로 이전한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최영림(1916-1985)의 개인전으로 한국 민담과 불교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 45점을 선보였다. 평양 출신의 작가는 한약방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을 나타내어 같은 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황유엽, 장리석 등과 함께 친분을 나누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1934년 목판화를 일본목판화협회전에 출품해 입선한 것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네 차례 입선했고, 1938년에는 도쿄로 유학을 떠나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권 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홀로 월남하여 제주도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51년 마산에서 나건파와 함께 2인전을 가지면서 남한 화단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후 마산에서 머물다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뒤 1955년 제4회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계속 국전에 출품해 1959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창작미술협회, 구상전의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한정 기자)
제9회 김달진관장의 미술사이야기, ‘포스터 이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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