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북괴군의 퍠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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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북괴군의 퍠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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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권을 빼앗긴 그들에겐 후퇴 자체가 죽음

일대 반격

한편 6월 27일부터 지상군에 앞서 미 극동함대가 한국해역에서 작전을 개시하고 이어서 7월 7일에는 영 극동함대도 참가하였다. 유엔함대는 절대적인 제해권을 장악하고 완전한 해안 봉쇄를 실시하여 적의 해상활동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8월 초에는 8개국의 함선이 유엔 해군사령관 스트루블중장 밑에서 작전에 들어갔다. 동해안에서는 대형 함정이 적의 수송로, 군사시설, 밀집부대에 주야의 구별 없이 함포의 맹공격을 가하였고 서해안에서는 소형함정이 주가 되어 봉쇄작전에 종사하고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8월 하순에 접어 들어서는 우리 해병대의 도서상륙이 빈번하였다. 18일에는 해병대가 서해의 덕적도에 상륙하고 이어 20일에는 영흥도에 21일에는 이작도, 22일에는 소이작도에 각각 상륙 점령하고 다시 31일에는 진도의 적을 포위하였다.

8월 17일부터 23일에 걸쳐 한국 해병대는 거제도에 위협을 주는 통영에 침입한 적부대에 상륙을 감행하여 이를 소탕하였고 9월 6일에는 군산항 근처의 도서로, 10일에는 연평도에 상륙하였다. 이러한 일련에 상륙작전은 적에 대한 측면으로부터의 위협이면서 동시에 일대 반격기가 접근하여 왔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미 공군은 6월 8일부터 본격적으로 작전을 개시하였고, 이날부터 F80 제트기와 B26 경폭격기들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 3일간은 38선 이남에서만 작전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30일에 비로소 공군으로 하여금 38선 이북도 공격하되 만주로 월경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미 공군과 함께 호주 공군도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개전 당초에 2백 여대의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던 적의 공군은 단시일내에 박살나고 개전 후 2주일도 못되어 제공권을 장악 반격 시까지 공군은 적의 생산공장, 보급로,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계속하여 적의 전력과 보급을 마비시키는 한편 적 지상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아 지상군을 직접 원호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다.

폭격기 B29와 B26은 도로, 교량에 대한 폭격 뿐만 아니라 평양, 진남포, 함흥, 흥남, 성진, 나남 등지의 군수공장을 폭격하여 그 대부분을 파괴하였고, B26은 야간에도 출격하여 적군의 야간행동을 곤란케 하였다. 기타 제트기, F51 무스탕 전투기, 각종 해군 함정기들도 지상의 아군을 원호하였다.

한국 공군은 개전 당시 L형 12대와 T6형 10대, 합계 22대의 연습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한국 공군은 지상군의 유도와 정찰, 전단살포 등에 활약하였으며 특히 개전 초기에는 조종사가 폭탄을 두개씩 안고 조준기 없이 손으로 투하하여 남하하는 적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그러나 7월 2일에는 재일 미 공군으로부터 실전용의 F51전투기 10대를 인수하여 비로서 전투기를 가지고 지상군의 엄호에 활약하였다.

북괴군의 패주

공산군의 8.15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총사령관 최용건은 인민군 제 1군단 사령관 김웅 중장 및 제 2군단 사령관 김무정 중장과 최후의 공격을 위하여 숙의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총공격 병력 13개 보병사단과 1개 장갑사단 그리고 2개 장갑여단 및 보안대를 부산외곽을 둘러싼 공격선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당시 남아 있던 각 사단의 병력은 40%에서 60%였으며, 장갑사단은 1천여명, 장갑여단은 5백명에 미치지 못했다. 최후의 공격을 위하여 북쪽으로부터 백여대의 탱크가 보충되었다. 8월 20일 총병력 9만 8천의 공산군은 공격 명령을 받았다.

즉 인민군 6사단과 7사단은 남서부의 미 25사단을, 제 2사단, 4사단, 9사단, 10사단의 4개사단은 밀양 정면의 미 2사단을 공격하고 대구-부산 가도를 진격하며, 제1, 제3, 제13의 3개사단은 대구 북방의 미 제 1기갑사단과 국군 제 1사단을 공격하고 제 5와 ,제 8사단은 대구 동쪽에서 국군 제 8사단과 제 6사단을 공략하며 또 괴뢰군 5사단과 12사단은 국군 제 3사단과 수도사단을 돌파하여 포항, 영일 및 경주회랑으로 진출할 것 등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함으로써 한 군데라도 돌파구를 얻으려는 작전이었다.

전투가 개시되자 피아를 막론하고 한국전쟁 이래로 가장 극심한 혈전이 전개되었다. 치열한 공방 끝에 미 제 2사단과 제 15사단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 두 곳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러나 즉각 미군의 원호군이 투입되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렇게 매일 전투가 계속되는 동한 괴뢰군은 보급로가 공군의 맹폭에 의해 계속 차단되고 식량 및 탄약의 보급이 종종 줄어 들게 되자 그들의 공격력도 차츰 약화되고 있었으며, 반면에 유엔군은 완전한 반격 태세를 갖추고 공격 명령만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5일 공산군에게는 청천의 벽력이라 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리에 수행되었다. 공산군은 완전히 뒷덜미를 잡히게 되고 그들의 보급로는 완전히 봉쇄되어 버리고 돌아갈 길마저 끊기고 말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것이라고는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는 길 밖에 없었다.

부산을 포위하고 있는 공산군의 병력은 7만으로 줄어 들고 그들의 무기와 탄약은 이 절반의 병사에게만 돌아갔다. 이에 비하여 부산의 교두보를 방어하는 아군의 병력은 한국군 10만과 미군 6만으로 완전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9월 18일이 되자 공산군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대구북방의 제 1사단과 13사단이 전격적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이 뒤를 미군이 추격했다. 동해안에서는 제 5사단이 철수하고 국군 제 3사단이 포항을 탈환하고 계속 북쪽으로 진격했다. 국군 제 1사단은 적의 제 1사단과 13사단을 분쇄하였다. 후퇴하는 적은 지리멸렬 분산되어 버렸다. 후퇴하는 적을 유엔공군이 그대로 두지 않았던 것이다. 제공권을 빼앗긴 그들에겐 후퇴 자체가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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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국군이 2007-07-08 06:12:23
3 사단 백골부대 육박전의 명장들 그리고 학도병들 포항전투의 원혼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국가수호신들이엿다, 산하에묻힌 고혼들과 몇안남은 그때의 용사들은 80 고령에도 그때를 회상하며 고국을지켜낸것의 보람을 홀로이 뇌새기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을 생각해서 살아돌아와 변영된조국을 바라보면서 그져 살아있어 그것이 공훈이아니겟나 오직 살아남은것만으로도 공훈에비견됨을 홀로 말없이 자찬하고 홀로 마지막세월을 흠미하노라, 참전 백골부대원이 좋은글에 붙이며,

참전국군이 2007-07-08 06:24:36
포항 형산강과 비학산 육박전투에 참전하신 국군과 학도병들께서 이글을보시면 몇자남겨주세요, 적 창검이 내가슴을향할때 맨손으로 움켜잡고 피범벅이된채 넘어져기절한 나의 두다리를 끌고내려와 생명을살려준 두분의학도병을 찾고있습니다, 나는그당시 분대장 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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