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팔걸이를 하고 웃고 있는 사진과 단체 사진의 단골 배경이 된 뒷 풍경은 거의가 선교사 사택주변 이지만 그 시절엔 교감 선생님 관사로 사용되었다. 교감 선생님 보단 교감 선생님 아들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킬킬거리던 사춘기 때였다.
여학생이 바글 바글 끓는 여. 중고 캠퍼스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나타나면 소리를 마구 질렀는데, 그 남학생은 무지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귀 밑까지 빨개진 얼굴로 우리 앞을 지나던 또래의 잘 생겼던 남학생의 교복과 교모와 단정한 걸음걸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마 내가 가장 심하게 소리를 치면서 방방 뛰었을 거라고 친구들은 분명히 말할 것이다.
느티나무가 포근하게 자리 잡은 동산에 앉아 친구들과 비밀 이야기도 나누고 혼자만의 한숨도 흘러 보냈는데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당시만큼 멋진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여름이면 녹색정원이 되었고 겨울이면 스위스의 별장이 옮겨온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팔을 돌려 안아도 남던 교목인 느티나무 고목과 아름드리 넝쿨, 네잎 클로버들의 천국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 둘 씩 짝을 지어 치마에 풀물이 들도록 퍼질러 앉아 지친 맘과 몸을 풀었다.
돌로 된 건축물들은 이래저래 걱정 근심도 많던 사춘기 시절을 달래주었고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도서관이 자리하고 고등학교 예절관 같은 건물에선 가정 솜씨 물을 진열하고 전시하기도 했다. 언니가 도와준 갈래머리 소녀가 예쁜 자주색 방석이 메인에 놓여 있을 때의 환희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쉬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친구들을 끌고 가서 보여주던 내가 그리고 별 저항 없이 나의 자잘한 것들을 순응하며 감싸준 다사롭던 친구들이 그립다.
미션 스쿨이었으니 종교 과목도 시험과목 이었고 월요일 아침인가 수요일 아침에는 "경건회" 라는 전체 예배 시간을 가졌다.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강당에 모여서 헤어진 다른 반 친구들과 쪽지를 나누거나 킥킥 대며 눈감고 기도하는 대신 앞에 앉은 친구들 교복에 낙서하는 장난으로 보내곤 하던 불량기도 다소 있었던 때였다.
교실로 이어지던 계단에 쏟아지던 왁자지껄한 소리들은 박제가 되었을까?
여고언니들의 반나체 차림에 관심이 많아서 발레를 구경하느라 수업종이 치는 줄도 모르고 보다가 출석부로 엉덩이를 맞기도 하던 순수하기 그지없던 친구들은 어디에서들 잘 살아가겠지.
한 겨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일제히 창밖으로 두 눈은 달려나가 한 두 마디 감탄이 쏟아지고 내내 눈길을 거두지 못한 몇몇의 아이들은 사진 찍으러 나가자고 애교를 부리곤 했다. 첨엔 못 들은 척 하시던 선생님도 이구동성으로 손바닥 함성을 쳐대면 도덕 선생님이셨던 담임은 속아 넘어가시는 척 "그래 그러자!" 하시며 문을 열어 주셨다.
함박눈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쌓이면 사진 찍는 것은 둘째고 눈싸움과 뒹굴기 하던 기억도 이젠 바랜 사진첩에서나 만나는 과거가 되었다. 때로는 그 시절이 눈물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작년 스승의 날 즈음하여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중학교 3년 내내 나의 담임이셨던 정선식 선생님은 학교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해리포터의 교장선생님처럼 인자한 얼굴로 나타나셨다. 모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신 거였다. 당황함과 반가움에 펑펑 울면서 메일을 보냈더니 바로 답장을 보내주셨다.
내년에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언질을 주셨는데 어느새 1년을 담쟁이 넝쿨처럼 넘기고 말았다. 내가 답장할 차례인데 아직 미루고만 있다. 삼년 내내 한 담임이셨던 것이 못내 싫기도 하고 나의 못난 점까지 아신다는 생각에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정선식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사사건건 구설수에 오르며 내내 시달려야 했던 미남이셨다. "악식이 온다." 하면서 선식이란 이름을 악식으로 바꿔 부르면서 성선설 성악설 수업 시간이면 함박웃음을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열 세살 소녀들은 어떻게들 변했을까?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신 거에 비하면 난 은혜를 모르는 제자임에 틀림없다. 자취하는 집으로 가정방문 오셨을 때 어찌나 황당했는지 선생님은 모를 것이다. 다음날 부끄럼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데 조회 시간에
"맛있는 것 하면 선영에게 가져다 줘라, 자취하는데 얼마나 집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는지 놀랬다."
"동태찌개를 하거들랑 식기 전에 냄비 째 들고 가라."
그땐 그런 노골적인 표현들이 싫기만 했는데 지금 돌이키니 선생님의 자상함이었다는 고마움에 목이 메어 온다. 미남 선생님의 눈길을 손길을 애태우며 학교를 오고 갔던 그 마음 한 자락을 꽁꽁 묶어 교장실로 보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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