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일요일 새벽의 기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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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일요일 새벽의 기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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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4시, 침략군은 일제히 공격 개시

^^^▲ 625당시 부모를 잃고 함께있는 오누이^^^
남침 전야 남북한 정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4시에 중부와 서부의 침략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부쪽 공산군은 이에 조금 뒤져서 반시간 가량 뒤에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38선 전역에 걸쳐 포성이 작열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대다수의 장병들이 주말 외출을 하고 있던 때를 타서 전 전선에 걸쳐 침공을 한 이날 새벽, 한국군과 공산군 사이에 국부적인 충돌도 없었고 전면적인 공격이 있으리라는 판단도 없었다. 따라서 새벽잠을 깬 후 이 뉴스를 들은 국민들은 또 국부적인 38선 충돌인 줄만 알았다.

면밀한 남침 계획

여기서 괴뢰군의 침략 준비를 소상히 살펴보자. 그들은 48년 2월에 소위 인민군, 경비대, 보안대를 창설한 이래 6.25 남침까지 인민군 10개 보병사단(제1,2,3,4,5,6,10,12,13,15)과 제105전차사단, 고사포연대 및 3개의 38경비여단(제1,3,7여단), 한만국경 경비대, 보안대, 철도경비사단 등 보병 약 12만과 경비대 약 3만 4천의 지상병력 및 탱크 242대, 자주포 176, 122밀리야포 172문, 82밀리 포 464문, 45밀리 포 586문을 마련했다.

이외에도 YAK-9형과 IL-10형 등의 전투기 211대, 조종사 2000명 및 해군함정 30여척, 육전대를 포함한 해군병력 1만 및 제 105의 양 전차여단으로 남침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광분 끝에 준비한 병력이 확보되자 구체적인 남침 계획에 착수했다.

평화통일이니 남북총선거니를 선전하는 한편 조만식선생 부자와 생포된 이주하, 김삼용의 교환을 제의하는 등 위장전술을 쓰면서 병력을 서서히 38선 전역에 배치하였다.보병병력과 전차부대를 배치하는 한편 예비병력을 제2선에 배치, 해주에 7사단, 간성에 8사단, 회령에 15사단, 신의주에 13사단, 숙천에 10사단, 평양에 17전차 예비대, 또한 제 766유격대를 간성에서 승선 대기시켰다.

6월 18일 러시아어로 된 정찰명령 제1호가 비밀리에 내려졌다. 북한공산군 제4사단 참모장에게 남한 친입이 개시되기 전 남한군의 배치상황을 조사하고 또 그 군사시설에 관한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정찰행동을 할 것과 공격이 개시되면 서울로 통하는 방위선에서 한국군 저항의 중심지대를 정찰토록 지령하였다.

이어 22일에는 한국어로 된 작전명령 제1호가 발표되었으며 제1, 제3, 제4사단은 장갑부대를 선두로 서울을 향하여 의정부 방면을 공격하고 그 외의 사단은 동부를 공격하며 주공격선을 중서부 전선을 통한 서울공격에 투입하며 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는 1950년 6월 23일까지 완료할 것을 지령하였다.

북한의 남침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동안 한국은 고요한 평화 속에 단꿈을 꾸고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 한국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고 어떤 부문의 생산고는 해방 전을 능가하고 대부분의 산업은 해방 직전의 수준을 육박하고 있어 눈앞에 다가온 경제자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6월 17일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방한한 기회에 38선을 시찰하고 귀국하고 발표한 성명에서“공산군의 침략은 없을 것이다”라고 언명하여 한국 정부 당국자와 국민들로 하여금 조금 남아있던 경계심마저 풀어버리게 했다.

그 당시 한국군의 전투병력은 육군 보병 제 1,2,3,5,6,7,8사단과 수도사단을 합쳐 약 10만이었고 장비는 장갑차 27대, 105밀리, 81밀리, 60밀리 각 구경포 700문, 로켙트 1900문에 전차는 단 1대도 없었으며 이들 병력과 장비는 38선 경비를 위한 불시배치로서 8사단을 동해안 지구에, 6사단을 춘천과 원주지구에, 7사단을 동두천 방면에, 1사단은 개성지구에, 수도사단은 서울지구에 배치되고 있었고 2사단이 대전지구, 3사단이 영남지구에, 5사단이 호남지구 등 제2선에 배치되고 있었다.

또한 해군은 소형 함정이 30여척이나 전투함은 거의 없었으며, 공군은 T6형 연습기 10대, L4형과 L5형 비행기 12대였으며 전투기는 단 1대도 없었다.

<3회는 한강선의 저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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