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2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스크롤 이동 상태바
[역사탐방] 1962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혁명과업 성취되면 양심적인 민간 정부에 정권 이양

전쟁법 공포

박정희 의장은 1962년 3월 16일 정치정화법의 통과에 즈음하여 이 법은 부정부패한 정치인의 재 대두를 방지하고 참신한 정치도의를 확립함으로써 진정하고 굳건한 민주주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곧 5.16혁명 직후, 혁명 정부가 “우리들의 혁명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민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약속한 혁명공약 제6항의 실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국민들에게 이해와 협조를 촉구하였다.

또한 박의장은 “이 법률은 일부 인사들의 정치 활동을 최소한도로 규제하려는 것이며 그들의 공무담임권이나 선거권 또는 직업종사 등에는 어떠한 제한도 가하려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자동케이스식 입법으로 한데 묶어 문책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또 “일단 정치활동을 금지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제, 문화, 사회, 행정 등 각 분양에서 혁명 과업 수행에 현저한 공헌이 잇다고 정부에서 인정한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그 금지를 해제할 수 있게 되어 있다.”라고 부언하였다.

이날 오후에는 구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의 적격여부를 심사할 정치 활동 정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장에 이주일, 위원이석제(법사 위원), 조시형(내무위원장), 유양수(외무 국방 위원장), 김동하(재경 위원장), 김윤근(교체 위원장), 손창규(문화 위원장) 등이었다.

3월 30일 제 1차로 2천 9백 7명의 심사 대상자를 발표하고 31일 제 2차로 1천 2백 85명을 공고함으로써 총 4천 1백명을 공고하였다. 이에 추가하여 4월 15일 3백 7명을 추가 공고하고 이미 공고한 대상자 중 2백 15명을 정정하여 총 4천 3백 69명이 적격 심판 대상자로 되었다.

5월 28일 오후 6시반 박 의장은 정치 정화위원회가 내린 적격심판 결과에 대한 확인 조치를 완료하였다. 총 신청자는 2천 9백 58명이었으며, 적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1천 3백 37명이다.

이주당 사건

1962년 6월 1일 오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구민주당 계열을 중심으로 한 어마어마한 반국가사건을 밝혔다. 앞서 김상돈, 김대중, 조중서 등 구 민주당 간부 3명을 비롯한 40여명을 구속하여, 항간에 의혹을 사오던 사건이 반정부 사건이라고 발표하자 각 신문은 이를 일면의 톱기사로 장식했다.

발표에 의하면 이 사건은 1961년 11월경부터 모의되어 왔으며, 효창공원 등에서 김상돈, 조중서 등을 중심으로 이성렬, 인순창, 김인측, 이진숙, 김용옥 등 핵심분자들이 40여차나 밀회, 6월 13일을 기해 무력 쿠데타를 일으키는 동시에 민주당 계열을 중심으로 한범국민 궐기로 정부를 전복, 집단 지도제의 과도 정부를 거쳐 8월 15일에 민정이양을 한다는 음모를 꾸며왔다고 한다.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은 수사의 결론으로 “구 정치인에 대한 관대한 조치와 처우로 인하여 정치적 재기를 획책한 것이며, 또한 사건의 중대성과 큰 규모에 비추어 엄중한 추궁을 계속하고 있으며 미 검거 범인을 완전 검거함으로써 이러한 요인을 발본 색원할 것” 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 사건의 수사의 단서는 김인측 대령에게서 나왔음을 밝히고 “전방 5개 연대와 후방의 고사포대대 등을 포섭할 것을 획책하였으나 손을 대지 못하였으며 군 부대에서는 관련자가 없다” 고 설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는 41명에 달하고 있으며 자금관계는 이제까지 조중서가 댄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추후 전모를 밝히겠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41명의 반혁명 음모 분자의 명단을 밝혔는데 그 구속자 중 중요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김상돈(전 서울시장) 조중서(전 민주당 조직부장) 김대중(전 민주당 선전부장 김인측(예비역 육군대령) 이성렬(전 백의사 간부) 인순창(전 백의사 간부) 박상필(김상돈 정보비서) 김용옥(전 서청 제주 부단장) 박진효(전 국제연합유격전우회장) 김영익(전 중앙대 비서실장) 이진숙(전 경찰간부) 박선철(전 민주당 중앙위원) 이성곤(전 한청 중앙위원) 유화청(전 자유당)외 27명이다.

조직에는 1 조중서를 중심으로 한 구 민주당 조직과 2 범국민 조직이라 하여 종교단체, 혁신계열 RK지 포함하였으며 무력조직으로 민주당 행동파와 깡패 등이고 3 군부대 조직으로 나누었는데 특히 군부대 포섭자금으로 거액을 조중서가 김용옥에게 수교하였다.

조중서가 핵심인물로서 김상돈과 협의하고 군부관계 조직책에 김용옥, 무력에 이성렬, 당 조직에 노재도, 범국민조직에 김모를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 내부엔 포섭된 자가 없었으며 구 민주당 혁신계열에서 30여명을 포섭했다.

이들의 쿠데타 방법에는 1 각 조직을 육성 통합하여 지휘부를 효창 공원에 두고 전방에서 5,개연대, 후방에서 고사포 1개 대대를 포섭키로 했다. 2 서울 진입은 미아리, 망우리 등 2개처로 무력대항군이 도망할 수 있도록 경부선을 개방해 놓는다.

3 유격 전우회원(KLO)이 1찬 5백명이 있는 것으로 보고 박진효, 인순창이 이들을 포섭 지휘하여 요인들을 즉결 처분키로 하고 그 명단을 작성했다. 4 사후 수습은 김인측이 ekaekdc하고 자금은 조증서가 구 정치인과 민주당 계열인사에게서 염출한다.

5 후속 부대는 범국민 총궐기대열이 사제 수류탄, 목석 등으로 경찰서 등을 습격, 치안을 혼란시킨다. 6 지도층은 검거에 대비하여 암호와 위장문서를 소지, 사용키로 한다. 거사 후로는 과도적 기구로 “민족단결 국가 총동원회”를 만들 것을 김인측이 창안하였다.

그 산하에 하원격인 국민지도자회의, 집행부인 혁명주체세력회의를 두고, 상원격인 민족영수회의를 둔다. 이사건에서 음모의 주모자 격으로 알려진 김인측(45)은 황해도 출신으로 CIC 내정처장, 서울지구 CIC 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말은 그의 군력은 김창룡 중장과 일군 헌병에 같이 근무한데서 시작하여 정복계통에 근무하다가 5.16 직후인 6월 중순경 육군대학 수업 10여일을 앞둔 교육기간 중 육군 대령으로 예편되었으며 이에 불만을 품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하였다.

장면 전 총리 관련?

또한 7월 15일 이 사건에 장면 전 총리가 관련되었다고 알려졌는데, 만일 반혁명이 성공할 경우 자신이 다시 국무총리로 되돌아간다는 조건하에 사건 주모자들에게 백만환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장씨를 중심으로 환문하고 장씨의 비서와 대질한 자리에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7월 25일 장면은 육군 본부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로 불구속 송치되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