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키케르', '시저'가 살려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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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키케르', '시저'가 살려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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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서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다가 안토니우스의 부하에게 죽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저는 G.J.케이사르(BC100-44)의 영어 이름이다. 그는 삼두정치를 편 사람으로, 세계 제국적인 시야로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실시하였으나, 공화정 로마의 전통을 짓밟은 자로 간주되어 암살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 정치가이며, 장군, 문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M.T.키케르와 사상적, 문학적, 정치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시저는 폼페이우스와의 싸움에서 반대편에 섰던 키케르를 죽이지 않았다.

키케르의 철학은 절충적인 처세 도덕론으로 그리스 사상을 로마에 도입했으며, 현존작품으로 "카틸리나 탄핵" "국가론" "법률론" "담론," "신에 관하여," "의무론" 등의 철학서와 "노년론" "우정에 관하여" "탄핵연설" 같은 작품들이 있다

시저가 암살되자, 키케르는 원로원의 중진이 되었지만, 거의 승산이 없는 옥타비아누스 편이 되어서 안토니우스와 싸웠다. "탄핵연설"이 그 당시에 쓴 작품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안토니우스는 당시 63인 그에게 죽음을 명했다.

그는 시골로 도피했으나 친구의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이탈리아를 탈출하려고 배에 오르다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해안에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부하에 의해서 죽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는 많은 사료들을 남겼다.

그는 로마의 정치가, 사상가, 웅변가이기도 하지만, 정치 생활을 하면서 사상적, 철학적, 신학적 사상에 대한 많은 기초자료를 남겼다. 그의 서간집들도 당시의 사회와 정치를 알게 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그의 언어, 문장은 라틴어 산문의 모법으로 평가되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로마의 철학적 사고가 깊은 원로원의 중심이 된 것은 동방에 유학하여 아테네, 소아이사, 로도스에서 선학(先學)의 가르침을 받아서라고 본다. 그가 쓴 "베레스 탄핵연설"은 당시 로마 속국의 지배에 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는 플라톤을 본받아서 대화로서 이론을 심화시켰으며, 그의 철학은 절충적인 처세 도덕론으로 그리스 사상을 로마에 도입하게 했다. 그 당시 로마의 문학은 라틴어의 눈부신 진보를 이룩하면서 산문이 실용적인 방법으로 가고 있었다.

키케르는 원로원 법정 등에서 말을 훌륭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또한 그의 논문 역시 명쾌하게 결론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수사를 자유로이 구사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많은 서한은 당시 로마의 정계실태와 함께 복잡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카틸리나의 음모 사건은 빈민들의 불만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고 꾀한 사건이다. 그것을 분쇄하기 위해서 쓴 것이 4편으로 된 "탄핵 연설"이다. 또한 그의 에세이는 변론술, 정치론, 윤리, 철학 등에 빛나는 작품들이다.

그가 만년에 돌아올 개인적인 감상을 적은 것으로 "노년에 대해" 라는 에세이 작품이 있다. 그 작품 속에 이러한 말들이 있다. "사과가 아직 푸를 때는 나무에서 따기가 힘들지만 익어서 맛이 들 무렵에는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라는 말을 썼다.

인간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청년에게 있어서는 억지로 찾아오는 것이지만 노인에게 있어서는 성숙의 당연한 결과이다. 지금의 내 심경은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성숙이라고 생각하는데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다.

내가 한 걸음씩 죽음으로 다가감에 따라 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바라보면서 닻을 내리려는 선원의 충만한 심경과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약 800통 가까운 서한을 남겼는데 그러한 작품에서 그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편지들은 모두 지적이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며, 때로는 이기적이며, 예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대중지향이었다. 공적인 면에서는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도 대중의 의견을 따르려고 했으나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끝가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시저나 폼페이우스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철학자로서의 사상적 지위는 누구보다도 높은 인물로서, 그의 언어 문장은 라틴어 산문의 좋은 기준을 보여주어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철학서와 에세이 작품들은, 지금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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