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한은 이번에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걸림돌로 지적했다. 때로는 제재와 한미 연합훈련을, 때로는 인권 개선 요구를 비난할 때 줄곧 내세워온 북한의 ‘적대시 정책’ 주장에 대해 미국의 전직 외교 당국자들은 실체가 모호한 ‘지연전술’일 뿐이라고 일축했다고 VOA가 25일 전했다.
북한 문제를 다뤄온 전직 당국자들에게 북한의 ‘적대시 정책’ 철회 주장은 수십 년간 반복돼 온 수사다.
가장 최근엔 러시아와의 전략 대화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지난 20일 발언에서 또다시 등장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북한의 ‘적대적 의도’ 혹은 ‘적대시 정책’ 비난 대상을 “움직이는 목표물”에 비유했다.
적대시 정책 리스트에는 북한이 순간순간 염두에 두고 있는 미국의 어떤 행동도 포함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령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은 1990년대에 북한이 주장한 대표적인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었다고 리비어 전 수석부차관보는 회고했다. 여기에 한미 연합군사훈련, 대북 제재 등을 추가하는 등 북한은 협상의 성격과 목표에 따라 ‘적대시 정책 리스트’를 수시로 바꾸고 늘려왔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모호함 때문에 미 협상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에 협상의 걸림돌이라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분명히 정의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조셉 디트라니 전 6자회담 미국 측 차석대표는 북한이 25년 동안 비난해온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북한에 자주 물었지만 대답을 들은 적이 없으며 아직도 그 뜻을 모른다고 말했다.
미국에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 촉구하면서도 정작 요구 사항을 구체화해달라는 질의에는 답하지 않는 이런 양상은 최근 진행된 미-북 협상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 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실무협상 때도 미국은 안보 보장, 종전 선언, 적대시 정책의 정의가 무엇인지 북한에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전직 미 당국자들은 북한의 이런 태도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풀이합니다. 미국이 취하는 어떤 행동과 조치도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에 포함시켜 철회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관리들을 주로 협상장 밖에서 자주 대면했던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 재단 대표는 북한이 수많은 불만을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비난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한 범위가 정해져 있다며 인식 차를 보였다.
자누지 대표는 미북 간 외교 관계 부재로 평양에 미 대사관이 설치돼 있지 않다는 불만에서 시작해, 대북 제재, 미-한 연합군사훈련, 미군의 핵 위협, 인권 상황 비난과 개선 요구 등을북한이 수년 동안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언급해온 항목들로 꼽았다.
다만 북한이 상황에 따라 비난 대상을 바꾸거나 늘려왔다는 전직 미 협상가들의 지적과 달리, 이미 적대시 정책으로 규정한 광범위한 항목들 가운데 한두가지 요소에 그때그때 강조점을 두는 것일 뿐 큰 틀에서는 일관성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고위급, 실무급 접촉을 두루 거친 미 전직 고위 관리들은 북한의 ‘적대시 정책’ 논리에 일관성이 있었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비난과 요구 수준을 훨씬 넘어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터무니없는 조치들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그 수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북한이 ‘적대시 정책’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를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에 참여했고 이후 국무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북 핵 문제 등을 다뤘던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적대시 정책’을 명확히 규정하는 대신 일부러 모호하게 놔둠으로써 범위를 확대하려는 게 북한의 의도라고 말했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북한의 ‘적대시 정책’ 주장은 40년 동안 계속돼 왔으며 어떤 의미를 담은 게 아니라 일종의 ‘지연전술(stalling tactic)’로 이용됐다고 말했다.
특히 비핵화 의도가 전혀 없는 북한이 비핵화 요구를 하는 미국의 어떤 행동이든 ‘적대시 정책’으로 트집잡아 이를 일축하는데 주력해왔다고 지적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 실제로 북한의 그런 우려를 최대한 덜어주려는 노력을 했고, 자신이 초안 작성에 참여해 이를 문서화하는 성의까지 보였지만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 재단 선임연구원도 한국과 미국민, 그리고 미국의 이해를 훨씬 자주 공격한 적대적 행위자는 북한이며, 대화를 피하는 쪽도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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