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민주혁명 역사의 현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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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혁명 역사의 현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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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침, 서울 시내는 흥분에 싸였다"

 
   
  ▲ 4.19 혁명  
 

4.19 민주혁명

1948년 정부 수립 후 12년동안 집권했던 이승만은 60년 4월, 학생을 주동으로 한 혁명에 의하여 실각되고 5월 29일 남몰래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는 45년 가을, 해방된 조국에 처음 환국하였을 때에는 국외로 망명하여 일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헌신한 노애국자로서 좌익세력을 제외한 많은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었다.

그는 미군정의 남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미.소공위를 반대하고 민족진영의 결속을 호소하면서 마침내는 유엔을 통하여 가능한 지역내에서의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초기에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라는 국민의 여망 속에서 민주 우방국들의 지지와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민주주의적 정당 정치나 정권 교체보다도 1인 독재와 영구집권을 바라는 정치가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선거시마다 불법 부정한 수법으로 영구 집권을 꾀하다가 이것이 절정에 달한 것이 곧 3.15 정.부통령 부정 선거였다.

피로 이룩한 4.19 혁명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민중의 봉기가 있자 이를 계기로 10년간의 독재에 억눌려왔던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는 도처에서 폭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요에 가까운 데모가 전국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3월 16일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17일에는 성남고교생 4백여명이 “경찰은 학생 사살에 책임을 지라‘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로 자숙하라’ ‘구속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고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한편 4월 6일에는 서울에서 민주당과 공명선거 추진위원회 등이 주동이 되어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정권의 총퇴진을 요구하는 민중 데모가 일어났으며, 9일에는 부산에서도 같은 규모의 데모가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쉴사이 없이 국민의 반정부 데모가 감행되던 4월 18일, 서울 고려대학생 4천여명은 경찰의 폭력제지를 실력으로 분쇄하면서 국회가 있는 서울의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이들 고대생들은 전국 27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의 회담에서 결의한 4월 19일의 서울시내 전체 대학생의 봉기를 하루 앞당긴 4월 18일 단독으로 데모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신입생에게 나누어 주려고 준비하였던 고대 마크가 인쇄된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국회 앞에서 연좌 데모를 감행하였다. 날은 바뀌어 19일 아침은 밝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날 아침, 서울 시내는 흥분에 싸였다.

오전 9시 30분경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생 1만여명은 노도와 같이 국회 의사당을 향하여 진출하기 시작했다. 연세, 고려, 동국, 성균관, 중앙, 건국 등 전 대학생이 궐기하여 서울 중심가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한결 같이 정 .부통령 선거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목메인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국회 의사당이 있는 태평로를 향하여 동에서, 서에서 밀려오는 노도와 같은 학생들의 대열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시민들의 눈에도 경찰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 일부의 학생 대열은 이 대통령과의 단판을 요구하면서 경무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해무청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뚫고 경무대에 육박하자 경찰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서 마지막 발악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체를 넘고 앞으로 앞으로 돌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학우들의 시체를 둘러메고 빗발치는 탄우속으로 전진하였다. 총탄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은 죽음을 초월한 영웅이었으며, 조국의 민주주의 소생을 위하여 자유와 정의에 목숨을 바친 정녕 노한 사자들이었다.

경찰의 총격은 학생들의 처절한 죽음을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사자와 같이 노한 학생들일지라도 맨주먹으로 총칼을 무찌를 수는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학생들은 물러서야만 하였다. 10여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학생들은 독재의 불법, 부정을 함께 절규하던 학우의 시체를 차에 싣고 부상자를 앞세우고 시내를 시위하면서 정부의 만행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같은 비극은 내무부앞에서도 벌어졌다. 을지로 입구에도 젊은 사자들의 붉은 피가 뿌려졌다.

구호에 출동한 의과대학생들은 급조한 구급차들에 적십자 표지를 그려붙이고 연달아 각 병원으로 달리면서 부상한 학우들의 치료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한편 흥분한 군중들은 서울신문과 반공청년단 본부를 불지르고 수많은 파출소와 자유당 본부를 파괴하고 소방차를 태워 버렸다.

오후 3시,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정부는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시내는 일단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희생된 시위 군중의 수는 무려 1백 1명, 부상자가 4백 56명이나 되었다. 이날 애국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자는 내무장관 홍진기와 서울시 경찰국장 유충열 및 경무대 경호관 곽영주 일당이었다.

이들 발포 원흉들은 그후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오던 중 5.16 군사혁명에 의한 혁재에서 사형이 확정 집행되었으나 무기 징역으로 복역 중이던 홍진기만은 군사 정부에 의하여 석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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