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익어 가는 계절의 길목에서
스크롤 이동 상태바
여름이 익어 가는 계절의 길목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버찌, 복숭아, 오이, 호박 익어가고 백일홍, 봉숭아, 접시꽃, 패랭이 피었네

 
   
  ^^^▲ ▲ 범이라 부르는 벚나무에 열리는 버찌
ⓒ 김규환^^^
 
 

태풍(颱風) 예보가 나오는 걸 보니 여름인가 봅니다. 여름에 이르렀는지 태풍이 한 번 쓸고 지나간 남동부 지역은 큰비마저 내렸습니다. 동해 상으로 빠져나가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어 다행입니다.

여름은 모기만 없으면 밤이 훨씬 좋은 계절입니다. 모깃불 피워두고 감자 삶아서 신김치에 먹고 벌레가 있어도 달빛 흔들리는 밤이나 서리 해와 컴컴한 밤에 먹는 복숭아는 얼마나 맛있었습니까? 서늘한 마룻바닥에 누워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여름은 이래서 참 좋습니다.

부채로 한 두 번 바람을 일으켜 주면 겨드랑이와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데 웃텅을 홀딱 벗고 등목 한 번 하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어찌나 선선하고 고맙던지 모릅니다. 낮엔 느티나무 같은 그늘이 그리워지고 시원한 화채와 냉국이 부릅니다.

 

 
   
  ^^^▲ ▲ 패랭이꽃의 전설
ⓒ 김규환^^^
 
 

여름이 왔다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체력이 달리면 더 힘내서 음식을 먹으면 살이 더 찌더군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 하쟎습니까? 덥다고 시원한 것만 드시면 님은 장이 차가워져 탈이 나기 쉽습니다.

이왕 더운 것 더위와 정면 승부를 하십시오. 땀 뻘뻘 흘리며 뛰어도 보고 뜨거운 음식으로 몸에 쌓인 피로를 밖으로 다 내 보내십시오. 그러고 나서 목욕한번 하고 나면 시원해지잖아요.

적극적으로 더위와의 한판 승부에서 이겨내는 슬기로운 한철을 보내시면 수확의 계절에 뭐라도 거둬들이지 않을까요? 부디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서울 한 빌라에 익어가는 복숭아
ⓒ 김규환^^^
 
 

올 여름 휴가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휴양림은 방 예약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마냥 어렵답니다. 굳이 멀리 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곳으로 잡으세요.

휴양림 못지 않은 데가 고향입니다. 고향에 가면 이곳저곳 빠삭하게 파악할 수 있어 어느 계곡이고 내 집처럼 쓸 수 있으니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고향에서 지내면 옛 친구도 만나고 집안 어른들과 친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추억 여행은 아무래도 시골마을에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멀리 떠나고 싶으시면 올해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섬섬옥섬(섬섬玉섬)을 찾아 떠나십시오. 갯벌과 세발 낙지도 만나시고 주꾸미도 드셔보세요. 병어회도 맛있고 멸치회도 괜찮습니다. 해물된장찌개도 국물이 썩 좋습니다. 더 멀리 가시려거든 두세 시간 배를 타고 흑산도든 홍도든 해금강 외도를 다녀오시길 권합니다.

 

 
   
  ^^^▲ ▲ 옆 집 옥상에 피어 있는 호박꽃 수꽃과 애호박
ⓒ 김규환^^^
 
 

양(羊)이 그런 답니다. 추운 겨울엔 서로 떨어져서 추위서 어쩔 줄 몰라하고 더운 여름엔 밀착하여 그 열기를 이겨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들의 습성이니 이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올 여름은 특별한 당신이 되어 보십시오.

사람들 북적이는 곳에 가면 사람에 치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름 휴가는 길므로 한적한 곳에 쉴 자리를 마련하고 책도 읽고 다시 자신과 주위의 삶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요.

음식물을 양껏 가져가서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금 양을 줄여 가서 부족하면 현지에서 조금 사다 먹으면 고향이든 지역 경제가 조금 풀리고 현지민들과 사이도 조금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쓰레기는 타는 것 안타는 것 잘 구분하셔서 오실 때 댁으로 꼭 가져오시거나 사람 보이는 곳에 잘 처리하시면 좋겠어요. 휴가철 지내고 나면 냇가나 계곡을 쳐다보기도 싫어집니다. 비닐, 빈병, 깡통, 음식물에 텐트까지 강산이 신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답니다.

 

 
   
  ^^^▲ ▲ 안암동 어린이집 꽃밭에 핀 봉숭아
ⓒ 김규환^^^
 
 

여름이 익어 갑니다. 벚나무에선 빨갛고 쓰디쓰던 열매가 까맣게 익어 갑니다. 한 번 따서 드셔보세요.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서 줘보세요. 추억 반 맛 반이 되어 다가 올 지도 모릅니다. 신기한 체험이 대단한 것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남아 있을 겁니다.

복숭아도 붉은 빛을 띠는 것 보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요. 보리타작 소리가 요란했을 옛 마을이 그립습니다. 보리가 지천이었으니 몰래 한 말 퍼다가 복숭아랑 바꿔 먹던 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 노지에서도 오이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오이냉국 먹고 싶습니다.
ⓒ 김규환^^^
 
 

시장에는 감자와 양파가 적절한 만남을 즐기고 있더이다. 노란 오이 꽃이 피어 손가락 만한 외(오이)가 달려 있어 길 가다보면 사람 발길을 붙들어 잡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굳이 시냇가까지 갈 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베물고 싶어지더군요. 힘들여 씹지 않아도 그 풋풋한 향이 입안에 퍼져 혀를 마취시키곤 했습니다.

벌과 나비가 꿀 찾아 집 밖을 쏘다닙니다. 둔하기로는 첫째 가라면 서러워할 호박벌도 이꽃 저꽃 옮겨다니며 꽃가루 묻히기 바쁩니다. 호박꽃은 어린 아이들의 노리개였죠. 꽃을 따서 빙빙 돌려도 보고 까만 고무신에 얼른 털어 담아 빙빙 돌려 땅 바닥에 세게 내리치면 호박벌 한 마리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던 때가 엊그제 같지 않나요? 호박잎 싸 쪄서 먹고 싶은 아침입니다.

 

 
   
  ^^^▲ ▲ 백일홍 꽃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비부인. 안암동 어린이집 꽃 밭에서
ⓒ 김규환^^^
 
 

여름 꽃은 더 화려해집니다. 긴 하루를 머문 해를 가득 물고 노랗던 것이 붉은 빛을 많이 띱니다. 붉다못해 빨개서 강렬한 광선에 쳐다보기조차 눈부십니다. 백일홍도 그렇고 접시 꽃도 그렇습니다.

때 이르게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앞에 봉숭아가 만발했습니다. 올핸 꼭 아이들에게 매니큐어보다 봉숭아물을 들여주렵니다. 벌써 씨를 머금고 있네요. 한 열흘 기다렸다가 얼른 몇 개 따와서 컵에다 심어 놓으면 올해는 세 번은 볼 수 있겠네요.

개운산에 버찌 만나러 갔다가 패랭이 꽃 보고 왔습니다. 벌써 여름은 피고 익고 알차게 영글어 나를 들뜨게 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여름을 잘 나시기 바랍니다.

 

 
   
  ^^^▲ ▲ 접시꽃과 담쟁이
ⓒ 김규환^^^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을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