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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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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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가 돌아온 뒤인 5월 16일 군사 혁명의 태동

군사혁명의 태동과 조직의 완결

군부 내의 반목과 정군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정부와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표면적으로는 정군 운동을 강조하면서 사직당국의 안목을 흐리게 하는 동시에 무력 혁명의 준비를 진행 시키면서 조직 강화와 동지 규합에 적극적인 활동을 진행 하였다. 따라서 혁명 모의에 참여한 핵심 동지들은 11명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육군본부 부관감실 오치성 중령은 제 6군단 포병단과 육군 대학 등에 동지를 포섭,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그들의 조직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1960년 11월 9일 서울 신당동 박정희 소장 자택에서 두 번째의 무력 혁명의 모의를 위한 회합이 있은 후 이들은 거사를 위한 동지 규합에 착수하였던 바 1961년 4월 초순에 이르러 중앙, 전방, 후방에 걸쳐 그들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지 및 동조자의 포섭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보안상의 이유로 더 이상 조직의 확대를 하지 않기로 하고 군사혁명에 필요한 조직을 완결하였고 다만 5.16 거사 직전에 약간의 보강이 있었다.

중앙 조직은 제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하여 11명의 핵심체에 육군본부 등 부대에서 정선된 장교들과 서울 근교 부대가 본체를 이루고 전방 부대에서 제6군단 포병단과 후방에서 육군대학의 고급 장교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이 박소장 영도하의 군사혁명에 가담하기로 한 중앙조직의 장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오치성, 김종필, 김동환, 이석제, 정문순, 신윤창, 유승원, 홍종철, 박원빈, 문재준, 강상욱, 김재춘, 김제민, 이백일, 최명도, 오학진, 한국찬, 장수영, 이형주, 최홍순, 안태갑, 김재후, 김성룡, 이지찬, 김용건, 박순권, 정치신, 김원희, 이낙선, 박종규, 손종호, 차지철, 이창희, 김유성이며 한편 제6관구 사령부는 참모장 김재춘 대령과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의 노력으로 혁명군 지휘소로서의 조직을 갖추었다.

제1공수 전투단은 단장 박치옥 대령과 대대장 김제민 중령에게 세부 조직을 일임하기 위하여 1961년 3월 하순경 그들의 포섭이 몇차례 시도되었으나 여의치 않다가 강상욱, 박원빈 두 사람의 합동 공작으로 김제민 중령이 포섭되어 일차적 조직활동이 그에게 위임되어 4월 초순에 이르러 공수단 중대장급인 차지철 대위 등이 직접 중앙 핵심체들과 접촉하게 되어 공수단의 조직이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특히 11명의 중대장급으로 구성된 특공대까지 조직되었다.

제 33사단은 연대장 이병엽 대령과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의 노력으로 행동 부대로서의 조직이 진행되었으며, 포섭은 제1차와 제2차의 단계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제1차로 제 100연대의 유기홍 소령, 101연대백대숙, 채희덕 소령, 제 102연대의 박계성 소령과 제2차로 각 연대의 위관급이 대량 포섭되었다.

제 30사단은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에 의하여 4월말까지 행동 부대로서의 조직이 완료되었으며, 동조자들은 부사단장 문정식 대령, 제 90연대장 박상훈 대령, 헌병부장 강오현 소령 등이다. 제6군단 포병단은 소위 11명의 중앙 핵심체의 한사람인 신윤창 중령이 동 포병단으로 취임하여 단장 문재준 대령, 군단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등의 협조를 얻어 행동 부대로서 5개 포병대대를 조직 하였다.

육군대학에서는 정문순 중령에 의하여 포섭된 윤필용, 차규헌, 김달훈 중령 등이 거사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준비가 군인들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을 무렵 혁명의 배후에는 몇몇 민간인이 거사 자금의 조달과 포고문, 격문 등 수 많은 인쇄물의 담당 등 음양으로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는데 이들 민간인은 주로 박정희 소장과 제2군 사령부 참모장 이주일 소장과 김종필 중령에 의하여 담당되었던 것이다.

후방조직

제2군 사령부 참모장 이주일 소장에 의하여 후방지역에 대한 조직이 진행되었으며, 다만 부산지구만은 박소장이 직접 하부하여 군수기지 사령부 참모장 김용순 준장과 제휴하게 되었다.

대구지구는 제2군 사령부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을 임명하고 동 통신참모 박승규 대령으로 하여금 긴밀한 보조를 맞추게 하는 한편, 행동대로서 제 208공병 대대장 김진국 중령, 제 75통신 대대장 성우환 중령 5관구 통신참모 김학묵 중령, 제 2군사령부 의장대장 이정형 소령, 그리고 기타 동지로서 제2군 사령부의 작전참모 차장 이신득 대령, 통신참모 차장 허건공 대령과 제5관구의 통신 운영과장 유치헌 중령 등을 포섭하여 거사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광주시는 제31사단장 최주종 준장이 담당하였다. 또한 청주시는 제 37사단장의 김진위 준장, 논산 및 제2훈소에서는 동 소장인 최홍희 소장, 참모장 한관흥 대령이 조직화되었다.

전방조직

1961년 4월 7일 서울 명동의 강상욱 중령 자택에서 박소장을 위시한 중앙 핵심멤버들이 모인 연석회의에서 야전군의 포섭 및 임무에 대하여는 조창대 중령에게 일임되었으며 조중령은 귀임 즉시 야전군 사령부와 관하 각 사단에 걸쳐 광범위한 조직망을 펼쳐 나갔다.

야전군 사령부에서 조창대 중령을 비롯 7명이 동지로 규합되고 각 사단의 조직망은, 제9사단에 작전참모 조주태 중령, 제29연대 부연대장 김병서 중령과 28연대장 한병갑 대령, 그리고 제 1사단의 작전참모 한윤찬 중령, 제5사단장 채명신 준장, 제12사단장 박춘신 준장을 비롯한 그의 막료인 부사단장 정순화 대령과 작전참모 이희성 중령과 제6군단의 박배근 중령, 제5군단장 박임항 중장과 동부대의 이종홍 중령 등의 포섭 결속에 성공하였다.

최종 모의

몇차례 거사일정의 변경을 가져오게 되자 점점 비밀유지에 난색을 보이기 시작한 혁명 계획은 5월 12일 대구에서 상경한 박정희 소장의 최후 결정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박소장은 상경 즉시 비행기편으로 제5사단장 채명신 준장을 찾아가서 거사일이 박두하였음을 알리고 만약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 아낌없는 협조를 요청하여 채 준장의 동의를 얻었으며, 서울에 돌아온 박소장은 마지막 계획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동지들과 함께 거사 날짜의 확정과 기타 세부 계획을 수립하였다.

술집 경복에는 옥창호 중령, 김종필 중령, 김형욱 중령, 오치성 대령, 이석제 중령, 유승원 대령, 김동환 중령 등의 핵심멤버들이 모여 최종 거사일을 두고 왈가왈부한 끝에 박소장이 상경시 이주일 소장과 합의한 5월 16일 오전 3시로 확정을 지었다.

이와 같이 5월 16일을 거사일로 결의한 이유는 5월 14일이 일요일이므로 정부 각료들이 주말 휴가에 여행 등을 할지도 모르고 또 부대 장병들이 외출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것이며 5월 15일은 장면총리가 제1군 창설 기념식에 참석하기 때문에 그가 돌아온 뒤인 5월 16일로 결정한 것이다.

5월 16일 혁명의 날 확정

박소장은 거사 날짜가 확정되자 즉시 해병대 동원을 책임진 김동하 예비역 소장을 그의 자택으로 방문하고 거사 일시의 통고와 제반 계획을 검토하였으며, 그는 다시 밤 10시경 서울 북창동 소재 왜식점 남강에서 이미 연락을 취해놓은 송찬호 준장과 박치옥, 김재춘 대령 등과 합석모의를 계속하였다.

이날 남강에서 합의된 사항은 5월 16일 0시를 기하여 행동을 개시 새벽 3시까지는 목표물 점령을 완료하는 것이며 행동 개시에 앞서 5월 15일 밤 12시까지 핵심원 전원은 영등포 소재 제 6관구 사령부 참모장실에 일단 집합하여 박소장이 5월 16일 0시 정각에 나타나 그로부터 최종 작전 명령이 하달되면 각 행동대로 분산 그들을 격려하기로 하였으며, 각 행동부대의 출동 병력은 제 30, 33사단에서 각 1개 대대씩, 공수단에서 1개 대대, 그리고 제 6군단 포병단에서 5개 대대, 해병대 제 1여단에서 1개 대대가 출동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면 병력 동원에 방해분자를 제거(가급적 감금) 하고서라도 거사를 감행한다는 제2안까지 마련되었으며, 군사 혁명의 핵심자들은 개괄적인 업무 분담에 있어서 작전은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행정 및 공보는 김종필이 맡기로 하였다.

5월 13일 밤 약수동 김종락의 집에서 박소장 주최로 다시 모인 김종필, 오치성, 길재호, 유승원, 옥창호, 김동환, 이석제, 김성룡, 박종규, 이낙선 등 재경 핵심원 전원과 제 30사단 및 제 33사단의 작전참모 이백일, 오학진 중령 등이 모여 혁명군의 진주와 병행하여 정치적 특수 임무를 결정하였다.

1. 정부 요인의 체포. 2. 포고문 작성 및 반포. 3. 보도 방송. 4. 가두 선전 등 특수 임무의 분담을 마친 이들은 다음날인 5월 14일 일요일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의 자택에서 행동 부대의 책임자들과 최종적인 회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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