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 답안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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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답안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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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실현한 새마을 우반동

 
   
     
 

나라(조선)가 세워진 이래 오직 율곡과 반계 두 분만이 실무를 알았다. 그런데 율곡은 실천 가능한 것부터 손댔지만, 반계는 왕정이 해야 할 근본문제까지 파고들어 일제 개혁을 추구하였으니, 그 뜻만큼은 굳고 컸다.

- 이익의 “성호사설류선(星湖僿說類選)” 중에서 -

반계(磻溪)는 변산반도 바디재(옥녀봉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우반동(愚磻洞) 기슭과 질펀한 들판을 거친 다음 줄포 앞바다에 이른다. 우반동은 빼어난 산세를 배경으로 산림, 하천, 평야, 해양에서 나는 각종 산물들이 집산되는 마을로서 수공업과 상업 역시 활발했다. 지금은 토사 때문에 항구기능이 가려졌지만, 줄포는 해방 전만 해도 중국과 일본으로 열려있었다.

우반동은 걸물 세 사람을 품에 안았다. 마의태자 김일(金鎰 10세기 무렵),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73)이다.
1. 마의 - 태자의 아들 형제가 세거(世居)하며, 부안김씨 종가를 열었다.
2. 교산 - 1601년 이후 홍길동전 혁명의 산실로, 이는 한글소설 효시였다.
3. 반계 - 1653년 이거(移居)하여, 개혁마을을 열고 반계수록을 완성했다.

신라는 56대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왕건은 경순왕 김부(金傅)에게 맏딸 낙랑공주를 주었다. 김부는 재위(927-935) 때 왕후 박씨에서 세 아들을 두었고, 다시 낙랑공주 왕씨에서 다섯 아들을 얻은 후, 비(妃) 안씨로부터 아홉 번째 아들을 받아 모두 9명의 왕자를 남겼다.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가 남긴 DNA 김씨왕국은 오늘날까지 왕성하다!

맏이 마의태자는 아버지를 거역했다. 그는 설악산 기슭에서 “후신라”를 도모하다 한(恨)을 아들에게 남기고, 금강산에 들어가 삶을 마쳤다. 태자의 장남 김행(金幸 또는 今俊)은 다시 북상하여, 함흥만 근처 영흥에서 여진족을 지도하며 부친의 유지를 이어갔다. 마침내 6대손 아골타(1068-1123)는 중원까지 진출하여 금(金 1115-1234) 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에 올랐다.

조선 태조가 그의 증조 때부터 영흥에서 세거해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의 부친은 원(元) 나라의 벼슬 천호(千戶)였고, 1356년 고려로 귀순했다. 결국 이성계에 의하여 왕씨 고려가 멸망(1392)되었으니, 신라망국의 한은 “원 쿠션”으로 풀린 셈이다. 마의태자 나머지 두 아들은 서진하여 우반동에서 세거했다. 그들의 자손은 고려에 이어 조선의 신민(臣民)이 되었다.

후신라의 금은 몽골의 원(1206-1387)에, 원은 중화의 명(明 1368-1661)에, 명은 다시 “후금”의 청(淸 1616-1911)에 의하여 왕조가 멸망되었다. 청나라 황제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였다. 병자호란(1636) 때 인조는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 절했다. 그 후 인조가 남한산성에 숭렬전(崇烈殿)을 짓고(1638), 백제 시조 온조 왕을 사모한 것은 저간의 사정이었다.

그때부터 조선 지도층의 비망록(agenda)은 “청 타도”를 목표로 하는 북벌(北伐)이 되었다. 누구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이 그 정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소현세자는 오히려 청을 통하여 부국으로 나가자는 입장이었고, 대신 등극(1649)한 효종은 부국보다 강병을 서둘렀다. 그러나 송시열은 피폐한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반계 유형원이 내놓은 북벌 답안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축으로 삼은 내부혁신이었다. 토지공개념, 작은 정부, 법제혁파 등을 통한 경영학적인 정책이 반계수록(磻溪隧錄) 26권에 걸쳐 펼쳐져 있다. 그는 여기서 철리, 사회, 정치, 행정, 경제, 군사, 교육 등 입체적 접근과 개혁적 방안을 제시했다. 우반동의 반계서당은 장서 만권을 갖춘 “개발연구소”였다.

반계는 일찍이 부친을 여위고, 호란과 북벌로 혼란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출세를 접고, 청나라 접경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부터 탐방하며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둘에 이르러 경기도 양평을 떠나 전라도 부안으로 들어갔다. 우반동에는 그의 선조 유관(柳寬)이 청백리로서 하사받은 전답이 있었고, 반계는 이를 토대로 복지마을의 시범을 보여줬다.

반계구상은 백년 후 영정조 대에서 일부 국정에 반영됐지만, 삼백년 지나 민족중흥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1917-79) 정권의 “새마을”에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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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2007-04-09 10:17:42
좋은 기사내용입니다 스크립해 갑니다

김씨 2007-04-09 14:10:57
우리 조상님 얘기가 나오네. 마의태자는 우리 31대 조상인데.....
족보에 이 기사 첨부해 놓아야 겠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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