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관자께서 함께 하시어!
역사의 주관자께서 함께 하시어!
  •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DynamicManagementSociety회장
  • 승인 2019.08.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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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스테파노(한양대 명예교수)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김인호 스테파노(한양대 명예교수)/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

나이 탓인가? 예전엔 별 생각 없이 던졌던 말들이 문득 문득 되살아나는 게 있는데, ‘선의의 거짓말(a good lie)’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우리 주변에는 선의의 거짓말에 대하여 거짓말은 그 자체가 아예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 자체가 절대로 성립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이 유익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적어도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한은 선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상당수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선의(善意)의 거짓말」이 존재한다면 ‘악의(惡意)의 진실’도 있을 법하다. 

만약 선과 악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 각각 상대적 개념이라면 ‘선의의 진실’과 ‘선의의 거짓말’ 뿐만 아니라 ‘악의의 진실’과 ‘악의의 거짓말’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선과 악이 애초부터 각기 별도로 존재하는 개념인가? 이에 대해 답하기에 앞서 우선 모든 존재의 시원(始原)인 태초의 천지창조의 순간을 떠 올려보자. 

애초에 무(無: void)의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기고' 빛이 있는 상태는 낮(day)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빛(light)이 결여된 상태는 어둠(darkness)이며 어둠의 상태를 밤(night)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는 빛과 어둠이 따로 존재하는 이원론(dualism)이 아니라 빛만이 존재하는 일원론(monism)임을 웅변해 준다.

이 논리에 기초할 때, 다만 선(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이 결여(lack)된 상태가 악(惡)이고, 진실(眞實: faith)이 있어야 할 곳에서 진실이 결여된 상태가 거짓(false)임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선은 언제나 진실하고만 짝을 이루게 되고, 악은 항상 거짓하고만 짝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선의의 거짓말이나 악의의 진실이란 말자체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음을 분명히 해준다.  

선과 악 그리고 진실과 거짓에 대한 논리적 분별의 경우와 같이 정의와 불의 그리고 옳음과 그름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대해서도 같은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세상에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보는 데에서도, 이념이나 권력쟁취의 목적(ends)을 위해서는 그 어떤 형태의 수단(means)도 정당화된다는 마키아벨리(Machiavellism)의 주장이  옹호되기도 한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아예 거짓과 거짓말을 전략・전술수단으로 활용하여 인간이 지닌 이해 분별 판단력은 물론 양심까지도 마비시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음(rightness)과 그름(wrongness)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하여 자기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구현시키고자 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있다. 그리고 거짓과 거짓말이외에도 동성애, 사형제도, 안락사, 낙태, 피임, 수간, 유산(abortion) 등등에 대해서도 서로 상충되는 무수히 많은 주의주장들이 세상엔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주장들을 놓고,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야한다는 상대주의(relativism)와 각자마다의 의견과 견해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며 다양성을 강조하는 다원주의(pluralism)도 있다. 상대주의 하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며 모든 게 다 수용되게 되다보니 서로 상충․모순 된 것들도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상대주의가 지향하는 상호이해에 의한 공존은 일시적 허구(虛構)에 그치게 되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이견과 반목과 투쟁과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 수 있다.  

현재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사상으로는 크게 상대주의/다원주의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Marxism), 프로이트주의(Freudianism), 다윈주의(Darwinism), 실증주의(empiricism), 모던이즘(modernism), 포스트모던이즘(post-modernism) 등등 골치가 아플 정도로 넘쳐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글로벌촌(global village)는 사상의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지가 벌써 오래전이다. 이들 중에서도 현재 가장 두드러지게 전 세계에 혼란과 반목과 불안을 조장하는 주의와 사상들을 잠시 보자.

1)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신․지적노동보다는 육체적 노동을 절대시하는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으로 배태되었지만 정신․지적노동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원천적 문제로 인해 1980년대 초중반 디지털혁명으로 대량산업사회가 급속히 지식정보화사회로 이행하자 불과 몇 년 사이에 대부분의 공산국가가 붕괴되게 되었다.

2016년 쿠바는 카스트로의 사망으로 그 종언을 맞았고, 이제 마지막으로 김일성 왕조의 붕괴조짐이 무르익고 있으며 한편 모든 예배장소에 입장하기 전에 반드시 시진핑에게 인사부터하고 들어가라고 강제하는 중국 시진핑의 하느님에 대한 도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현재 미국 트럼프대통령을 시켜 급속도로 중국공산당 해체수순을 밟도록 소명을 주신 것으로 여겨진다.  

2) 본능(instinct)과 무의식(the unconscious)을 강조하는 프로이트주의(Freudianism)는 인간의 매사를 본능 특히 섹스와 결부시켜 설명하면서 ‘Sex is beautiful’이라고 할 수준으로까지 인간을 타락시키는 논리를 제공해 주면서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은 물론 중・노년층까지도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동성애 수간 등 온갖 형태의 성적 타락과 음란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 면에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기가 막히다. 북한을 갔다 온 정객, 자칭 민주화운동가, 기업가, 목사, 중, 신부 등 종교인들과 더불어 모든 언론인들이 보여주는 이중적 행태는 그들이 미인계의 계략에 함락당해 간첩 질을 한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아무튼 이들은 인간이 지닌 숭고한 지적능력(intelligence)과 자유의지(free will)를 부정하며 오직 본능(instinct)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펴며 특이한 DNA 구조를 지닌 동성애자들에 대해 애정 어린 눈으로 연민을 가지고 대해주고 이해해야한다고까지 항변할 정도다. 

이는 도덕성 피폐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선진국 등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미 수용했거나 선거공약으로 내 걸 정도로 그 영향력이 거대하다. 

그간 이런 사조를 선도해 온 미국은 오바마정권에 이르러 드디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당시 부통령은 그의 관저에서 동성결혼주례를 선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미 해군여장성은 자신이 레스비언(lesbian)임을 밝힐 정도로 악의 만행을 자행하며 미국사회를 피폐화시켜 왔다. 그러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이들에게 철퇴에 가까운 조치를 취하자 미국언론의 대부분인 좌파언론들이 온갖 악의 무리들과 더불어 트럼프의 재선 실패를 위해 각가지 허위 조작 날조 선동 등으로 대항하는 입장을 내보이며 트럼프의 재선을 방해하고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내일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줄 불확실성 중의 하나로 보인다.       

3) 창조론(creationism)보다는 진화설(evolutionism)을 강조하는 다윈주의(Darwinism)는 천지창조 이래 인간이 이룩한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이라며 창조론을 부정한다. 진화설은 단세포동물에서부터 진화하여 고등동물에까지 이르렀다며 그 근거들을 제시하지만, 이는 자연계 내에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오직 고(高)수준의 질서에서 저(低)수준의 질서로만 변해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 흔히 무질서의 정도로 이해되며 변화능력의 역수 1/capacity to change로 표현됨)법칙과 정반대(正反對)인데, 이는 우리가 늙으면 다시 젊어 질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바 그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 엔트로피법칙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반면에, 그간 진화설에서 제시했던 화석근거들은 근거로서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이래 진화설을 주장한 다윈(Darwin)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까지 추켜세우는 상황에서 진화설이 현재 우리사고의 저변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끔찍한 생각마저 든다. 

특히 미국이 창조론의 청교도정신이 담긴 1776년 독립헌법대신에 1965년에 도덕다원주의(moral pluralism)입장을 수용한 수정헌법에 따라서 국공립학교에서 진화설대신에 창조론을 가르치면 현장에서 구속시키는 데서는 진화설이 얼마나 이 시대를 쥐고 흔드는 강력한 시대사조인가를 인지하게 한다.  

4) 매사를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실증주의(empiricism)에서는 오직 오관(五官)을 통해 얻어지는 경험만을 강조하는 듯한데, 인간의 오관은 마다마다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 인간의 귀는 다만 14-20,000헬츠 사이의 것만을 들을 수 있어, 30만 헬츠(herz)인 극초단파의 박쥐소리나 14 헬츠 미만의 태아 울음소리를 결코 들을 수 없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감각기관이며, 
- 인간의 눈은 빨주노초파남보 외 자외선과 적외선 등 무수히 많은 빛을 감지 못하며, - 인간의 코는 냄새에 쉽게 중독되는 경향이 있으며, 
- 인간의 입은 자극(puncture)을 매운(hot) 맛(taste)으로 받아들이는 한계를 내보이며,
- 인간의 피부는 아주 찬 것을 아주 뜨거운 것으로 느끼는 촉각의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오관을 통해 감지되고 인지된 것이라면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실증주의는 여전히 현대과학세계를 지배하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제일주의를 신봉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주의주장의 옳고・그름은 바로 사람들이 어떤 사실(a fact)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기준(value judgment criteria)을 따르느냐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경험담 하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2011년 7월초로 기억된다. 

미국 샌디에고 근교의 한 섬에 있는 리조트에서 세계전략경영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특별회의 둘째 날 저녁, 논문 발표 등 하루의 공식 일정이 끝나고 자유로운 만남의 시간을 옥외 바닷가와 면해 있는 한 정원 뜰에서 가졌는데 7월인데도 바다 밤바람이 꽤 차가웠다. 정원 여기저기에는 찬바람을 막아줄 중앙 배관식 가스난로 주위에 응접세트들이 여기 저기 놓여있었다. 

필자는 그 한 곳을 차지하고 미국인 남자교수와 미얀마 태생의 또 다른 미국 남자교수와 함께 맥주를 곁들이며 담소를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가 부러웠는지 한 미국인 여교수도 동석하길 원해서 4명이 맥주와 안주를 즐기며 이야길 나누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 맥주발이 돌면서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필자가 퀴즈 같은 얘길 하겠다며 먼저 이야길 꺼냈는데 그 얘기의 요지는 이렇다. 

“어느 집주인이 막일꾼을 구하려고 오전 7시에 나가 일당 60달러로 품삯을 정하고 일일꾼들을 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일꾼이 더 필요하여 9시에 나가보니 일거리 없이 서성이는 사람이 있기에 그에게도 ‘당신도 우리 집에 가서 일을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당신에게는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도 일하러 갔다. 집주인은 일꾼이 더 필요하여 낮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도 나가 각자 일한 만큼 품삯을 주기로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다. 오후 7시가 되자 집주인은 모두를 불러놓고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맨 처음 온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품삯을 주기 시작하였다. 

오후 5시에 와서 2시간 일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60달러를 받았다. 그래서 오전 7시부터 12시간 일한 사람은 자기는 더 받으려니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12시에 온 사람도,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그리고 오전 7시에 맨 먼저 온 사람도 모두 60달러씩을 받았다. 그러자 오전 7시에 온 사람이 ‘막판에 와서 두 시간밖에 일한 사람을 하루 종일 수고한 나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그 집주인은 그에게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60달러로 정하지 않았소? 나와 정한 품삯을 이미 받았으니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사람들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하였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내 후한 처사가 왜 당신의 눈에는 불의로 보입니까?’ 하고 말해 주었다” 

이상의 이야기를 마치고 필자는 그들에게 ‘각 일꾼들의 노동의 질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다음 질문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 귀하가 오전 7시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이라고 할 때, 귀하보다 뒤늦게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60달러씩준 것에 대해 어떻게 느낍니까?  

▪만약 불만을 느낀다면, 왜 불만을 느끼는 걸까요? 그들로 인해서 귀하가 받을 몫이 줄어들었는가요? 내가 덜 받은 건 아니지만 그들이 더 받았다고 생각되어 배가 아프다.
▪만약 불만을 안 느낀다면 그 이유는? 주인과 나하고의 약속은 그대로 지켰기 때문에,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임금을 어떻게 주느냐는 내가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니다.
  
◎ 그렇다면 이번에는 각자가 각각 약속대로 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즉, 

- 제일 일찍 7시에 온 사람은 약속대로 60달러를 받았고, 
- 오전 9시에 온 사람은 50달러를(왜냐하면 '단위시간당 노동의 질이 동일하다'고 전제했음으로 시간당 품삯은 5달러이지요),
- 12시에 온 사람은 35달러를,
- 오후 3시에 온 사람은 20달러를,
- 5시에 온 사람은 10달러를 받았을 경우에는,

귀하가 제일 일찍 7시에 온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아주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일한 만큼씩 품삯을 받은 경우를 정의(justice)라고 부른다면, 일한 만큼보다 덜 받은 경우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 정의가 실현이 안 되었으므로 정의가 결여된 불의(injustice)를 당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불의를 당한 만큼 반드시 더 받아내어 정의의 몫을 확보하겠지요. 못 받은 만큼 불의를 당한 것이고, 그 때에는 기분 나쁘고 억울하며 불공평하다고 느끼면서 강력하게 따져서라도 못 받은 몫을 꼭 받아내려고 하겠지요.

또 만약 일한 만큼보다 더 품삯을 받은 경우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 더 받은 것만큼은 거저 받은 것이므로 자비(charity)를 입은 것이겠지요. 

당초 약속보다 더 받은 경우, 더 받은 만큼 자비를 입은 것이고, 자비를 입은 것만큼 기분 좋고 감사하다고 느끼겠지요.  

그런데 만약 자비를 못 입은 경우에는 어떨까요? 자비를 입으면 감사하고, 못 입으면 그만 일뿐, 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불평하거나 억울해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럴 수가 없겠지요.

이상 위에서 본바와 같이 정의의 몫을 받았을 땐 당연하다고 느끼고, 불의를 당했을 땐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며, 자비를 입었을 땐 감사하다고 느끼는 이 명제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명제(universal proposition)이겠지요.

자, 그러면 이제 이 보편명제에 기초하여 일한 시간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60달러씩 받았을 경우 각자가 어떻게 느껴야 될 것인가를 다뤄봅시다.  

- 오전 7시에 온 사람이 60달러를 받았다면 당초 약속대로 받았으므로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고, 
-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60달러를 받았으므로 50달러의 정의의 몫에 대해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또 10달러만큼의 자비를 입은 만큼 감사하다고도 느껴야 하겠지요. 
- 12시에 온 사람은 35달러의 정의의 몫과 25달러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25달러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하고, 
- 오후 3시에 온 사람은 20달러의 정의의 몫과 40달러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40달러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 하고, 
-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10달러의 정의의 몫과 50달러만큼의 자비를 입었으므로 50달러만큼 감사하다고 느껴야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60달러 씩 받았을 경우에는 아무도 불평하거나 억울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지요. 

심지어는 제일 일찍 오전 7시에 온 사람의 입장에서도 당초 약속대로 60달러를 다 받았기 때문에 그냥 당연하다라고만 느끼면 그만이지, 불공평하거나 억울하다고 느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약속대로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하며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그의 생각은 옳은(right) 것일까요 그른(wrong) 것일까요? 

물론 그른 생각이지요. 

그른 생각을 갖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른 결과가 올 것이며 반대로 옳은 생각을 갖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옳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뿌린 대로(give) 거두는(take) 정의(justice)의 질서가 세상에 엄존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일 품삯을 주는데 있어서, 정의로운 분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남이 얼마를 어떻게 받든 간에, 각자가 일한 만큼의 몫을 받는다면, 즉, 각자가 성과에 기여한 만큼에 따라서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의롭고(just) 공정한 (fair)분배이며, 
2) 일한 만큼의 몫보다 더 받는 경우 더 받은 몫은 순전히 주는 자가 베푼 자비(charity)의 몫이므로 자비를 입으면 고맙고 감사할 일이고, 못 입었으면 그만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설령 자비를 못 입었다하더라도 자기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은 할 수 있어도 결코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비는 누구로부터도 강요될 수 없는, 베푸는 자의 자유의지로 베푸는 지고의 덕목인 때문이지요.  
3) 그러나 약속보다 덜 받았다면 그만큼 불의(injustice)를 당한 것이고, 불의를 당한만큼 더 받아내어 반드시 정의의 몫을 확보하려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명제야말로 논리적으로 명쾌한 옳은(right) 판단기준 임을 보여주는데 옳은 판단기준의 견지에서 다음과 같은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자기 몫만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늦게 온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몫보다도 더 받은 걸 보면서도 시기심이나 질투심으로 배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남이 잘 되니까 마음 뿌듯하고 기쁘다고 느끼는 사람들로만 이 세상이 꽉차있다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남이 입은 자비를 시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들로만 꽉 찬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는 천국이겠지요. 

✓만약 남이 얼마를 받느냐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 몫 (정의의 몫)만 받으면 된다는 사람들로만 이 세상이 꽉차있다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곳에서 과연 시기 질투 분쟁 다툼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겠지요. 모두 서로 남에게는 신경을 안 쓸 테니까 시기 질투 분쟁 다툼 전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최소한 천국의 경계에 놓여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약 자기 몫은 다 받았는데도 자기보다 늦게 온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몫보다 더 받은 걸 보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사람들로만 이 세상이 꽉차있다면 또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자기 몫은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받은 자비에 대해 배 아파하는 불의 한 사람들로만 꽉 찬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생지옥이겠지요. 

결론적으로 천국과 지옥은 어떤 사실을 옳은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이 품삯 이야길 들고는 세 미국 교수가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명쾌한 강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몇 번이고 감사와 고마움을 필자에게 표했고, 필자 역시 이런 지적 깨달음을 주신 윗분께 모든 찬미와 찬사를 드렸는데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같은 맥락에서 이 땅의 모든 이가 불의와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옳은 판단기준을 지닌다면 대한민국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그릇된 판단기준을 고수한다면 생지옥이 될 것이다.

남이 잘 되는 걸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자비의 마음까지는 설령 못 갖더라도 내 몫만 받으면 족하다는 정의의 마음을 가진 분들로만 대한민국이 꽉 찬다면 최소한 천국의 가장자리에는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몫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 잘되는 걸 배 아파하는 정의가 결여된 불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대한민국이 그득하다면 그야말로 생지옥일 것입니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되새기는 이유는 2016년 10월부터 2017년 2월까지 대한민국을 온통 뒤흔들며 국가를 완전히 혼란・혼돈상태에 빠뜨렸던 박근혜대통령과 최순실의 국가농단사건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고픈 건 참겠는데, 배 아픈 건 못 참겠다’는 악한 불의한 생각을 가진 상당수의 사람들이 ‘재벌 것 빼앗아 공평하게 나눠먹자'며, 선동하여 일으켰던 거짓과 악의 촛불시위요 거대한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이 직감되어 왔던 촛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화문 촛불현장에 가 본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이 과연 평화로운 광장의 촛불시위였단 말인가! 그곳이 어떤 곳으로 느껴지던가 말이다.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끔직한 광장촛불 시위에서 그네들은 오히려 언론 장악을 통해 ‘이게 나라냐, 헬 조선 등등’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반국가의 작태를 지속하고 있으며 지금은 까놓고 국민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빨갱이 나라로 끌고 가겠다고 호언하며 서둘러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형세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가지고 100위권 밖의 세계 최빈국을 흠모하며 그리로 끌고 가겠다는 문재인은 그 종자의 뿌리가 과연 어딘지, 부끄러움도, 수치심, 자존심도 없는 괴물처럼 느껴진다. 입만 열면 거짓말, 입에서 나오는 건 무지와 시대착오적 사념에 사로잡힌 해괴한 말들뿐이지만 그나마 말만하고는 뭔 말을 했는지 신경도 안 쓰며, 주변에는 기가 막힌 자들만 모아놓고 국정 운운 하며 국정은 방치한 체 나라를 완전 거덜 내고 있는데 이제 곧 머지않아 그 끝을 볼 것 같은 느낌이다. 

온갖 형태로 안보, 국방, 경제, 외교, 국정, 국가파탄을 자행하는 국제 또라이로 국제 왕따 당하며 국제바보 취급까지 받으면서도 히죽히죽 웃는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철면피인지 아니면 모자라는 것인지, 필자도 창피와 분노를 느끼며 때론 한 가닥 연민도 솟곤 한다. 

총선승리를 위해 포퓰리즘에 놀아나는 우매한 노년층 청장년층 군 졸병들과 공짜메니아 들을 선동하는 것도 모자라, 기업가를 노동자 착취 주범쯤으로 치부하면서도 기업가들까지도 강압적으로 반일 극일의 도구로 쓰려는 무지와 무모함에서는 국익(國益) 따윈 안중에도 없는 저들이다.

6.25 이후 한 순간도 쉼 없이 민주화를 외쳐대며, 배고픈 건 참겠으나, 배 아픈 건 못 참겠다며 그렇게도 정의, 정의, 정의를 외쳐대던 그 민주화무리들이 빨갱이들이었다니?

거짓과 허위, 날조, 조작으로 대한민국을 해코지 해 오다가 드디어 적법 대통령을 내쫓고 대한민국을 작살내고 있는 반(反)헌법 반(反)국가 현행범들의 종말이 과연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대한민국의 해방이 1945년 8.15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미국에 의해 불현듯 실현되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 안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미국대통령에 의해 순식간에 위장민주화 빨갱이들을 기기묘묘한 해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다.  

한반도의 뒷수습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어, 선(善)하고 강(强)한 자유(自由)대한민국을 이루도록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천상지혜와 지식을 듬뿍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필자 소개 

김인호(金寅鎬, In-Ho Stephen KIM)
한양대 명예교수, Dynamic Management Society회장

세계산업주도권 이동현상과 대한민국산업화 성공경험을 기술변화와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니즈맞춤혁신 틀로 Dynamic Management를 이론화한 세계경영전략분야의 석학.

2010년 세계산업주도권이동(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POSCO와 SK Telecom의 연구비지원)의 전문도서가 독일 Lambert Academic Publishing에서 출간되어 amazon등을 통해 판매되기 시작하고, 2011년부터 북경대 경영대(GSM)과 난까이 경영대의의 석・박사 정규과목으로 가르쳐지고 있음. 2015년에 Dynamic management관점에서 대한민국 재벌(財閥)구조의 진화과정과 한국경제의 부상(浮上)을 다룬 논문(Samsung Group의 연구비지원)이 영국 Wiley의 Encyclopedia (3판, 2015)에 게재되어 Dynamic management가 세계경영학계와 산업계로부터 관심을 모음. 뒤이어 기술변화와 니즈진화에 적응하는 이익추구논리를 다룬 SSCI 논문들(한국중소기업청의 연구비지원), Dynamic management view: Logic of profit seeking (2017), Direct causal mechanisms of profit: Dominant paradigm of profit seeking (2018)와 그 실용화 도구/방법론인 Business model schema: Business model innovation tool (2019)이 세계유수경영저널 Technology Analysis & Strategic Management(SSCI)에 게재되면서 세계경영학계로부터 널리 공인받고 있는 가운데 이익추구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profit seeking)을 축으로 통합이론체계를 갖추어 Dynamic Management가 AI 초지능시대의 경영패러다임으로 세계경영학계와 컨설팅업계 및 산업계로 본격적으로 확산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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