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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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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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생동안 다섯차례의 죽을 고비 거쳤다?"

^^^▲ 김대중 전 대통령^^^
DJ가 자신의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며칠전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DJ는 ‘국정원 과거사위가 출범 2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납치사건에 대해서 조사 발표가 지연되고 있다’며 ‘당신들이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적당하게 할 경우 역사가 반드시 문제를 삼을 것이다’는 협박성 발언을 쏟은데 이어 ‘진상을 그냥 적당하게 발표하는 것은 허락지 않을 것이며 참을 수 없고 그것은 역사와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고 밝힌 바 있다.

‘행동하는 양심’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는 김대중은 ‘일생동안 다섯(5) 차례의 죽을 고비’를 거쳐왔고 첫 번째의 수난은 공산당에 의했고 나머지 네 번은 독재자(박정희. 전두환)에 의해서였다‘며 그의 저서 ’대중경제론‘에 기록되어있다.

최근 그가 밝힌 “납치사건”이 곧 4번째 죽을 고비'는 독재자에 의해서란 의미인바 연방제통일을 향한 그의 과대망상(?)의 ‘5차례 죽을고비’를 역사의 기록에서 발췌했다.

첫번째 죽을 고비

김일성과 긴밀하게 접촉한 여운형 중심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좌익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좌파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파란 많은 정치생애의 첫발을 내 딛는다. 건준은 미군정청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5년 9월7일 해산 당했다. 여운형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휴양당하는 신세가 됐다. 따라서 건준의 맥은 극좌파의 손에 넘어갔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을 선포하고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신속히 조직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공산주의 색깔이 보다 강화된 인민위원회에 호감을 갖고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여 이 조직의 행동대 격인 민주애국 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으로 맹활약했다. 그는 이 무렵 경찰이 목포시 인민위원회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고 검거에 나서자 좌익인사 백남운이 대표로 있던 남조선 신민당에 가입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다. 남조선 신민당은 1946년 11월 23일조선 공산당 ,인민당과 함께 남조선 로동당 (남로당) 으로 합당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한 1946년 10월 31일 민애청 목포지구가 주도한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등 4개 파출소 습격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고 20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김대중은1949년 2월 21일 조선노동당 섭외부장, 민전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전남도경에 점거되 수사를 받는다. 그러나 해군 목포헌병대장 박성철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다.

A급(20명)은 체포 즉시 처단, B급(수백명)은 수감, C급(수천명)은 훈계 후 감시하게 되어 있었다. A급 상위 랭킹에 김대중이 있었다. 나는 당시 김대중을 체포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잘 아는 해군 중위 박성철이 정보를 미리 알고 입수, 2시간 전에 이미 체포한 뒤였다.

두 번째 죽을 고비

"주님 6.25 당시 공산군 감옥에 갇혔던 저를 220명 재소자 가운데 140명이나 학살되는 가운서 탈옥해서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또 다른 서적에는 100명 중 20명죽고 80명 탈출하는데 섞여서 살았다고 적고 있음.(옥중서신에서)

세 번째 죽을 고비

교통사고--단순 교통사고임. 교통사고가 자신이 박해 당한다는 허구를 조작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대통령된 뒤에 지팡이 안 짚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입증됨.
(월간조선 1월호)

네 번째 죽을 고비

이후락 현해탄 납치사건은 말 그대로 단순납치사건. 죽일 의도는 전혀 없었음.
(월간조선 2월호)

다섯 번째 죽을 고비

80년 광주사태와 관련된 사형선고 이후 그는 87년 6.29 선언으로 사면 복권되고 후보 단일화의 열망을 뒤로 한 채, 전국 도시에서 대중연설을 통해 “다섯 차례나 ‘죽을 뻔’했다며 첫 번째 인천 유세에서는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대중이가 16년 만에 "살아서" 돌아 왔습니다.!

두 번째 청주 유세에서 “꼭 "죽을 줄 만 알았던 내가 살아서" 여러분 앞에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광주 유세에서 "살아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해준 2000여 광주 영령과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가 대중연설의 단골메뉴였다.

역사란 후세가 평가하는 것으로 당대는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감정이 개입되어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고 최근 DJ가 주장하는 국정원 과거사 진상위원회의 “납치사건진상규명”은 당시를 입증한 이후락(당시 중정부장)의 ‘단순 납치사건’으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조작 왜곡 된 역사의 기록은 후세에 올바른 교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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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언 2007-03-17 11:06:02
바로 죽을것으로 판정함

익명 2007-03-22 11:27:15
김대중은 박정희가 자기를 죽이려고 납치를 해오는 동안 주일 미군 비행기가 김대중이 납치를 당한 것을 알고서 김대중을 실은 배를 따라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이후락 씨는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지만 부처님이 눈에 자꾸 떠올라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였다고 했다. 김대중을 납치해 오고 나서 이후락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더니 대 노 하여 당장 집에다 대려다 주라고 해서 집 앞까지 대려다 주었다고 이후락 씨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김대중은 자기를 박정희가 몇 번을 죽이려고 했다고 했다. 전라도 무안에서 트럭으로 사고를 내서 죽이려고 했다고 했다. 그 트럭 운전사가 지금 부산에 살고 있다고 조갑제 씨가 말했다 김대중의 거짓말이 여기에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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