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0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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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0년 대한민국 역사에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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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와 4.19의 분화구

민주당 분열과 신.구파의 다툼

3.15 정.부통령 선거의 후보를 둘러싼 신.구파간의 소속의원들의 줄을 이은 탈당과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던 조병옥 박사의 급서로 위축되어있던 민주당은 4월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일한 집권 후보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7.29총선거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제2공화국의 초대 집권당이 되었다. 집권 경쟁에서 신파에 패배한 구파는 8월 20일 구파 민 민.참의원 합동의원 총회를 개최하고 ‘구파 민주당’으로 교섭단체를 구성, 등록할 것과 장면 내각에 입각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23인위에 대체되는 7인위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신파의 조각 협조 요청으로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여 분당을 전제한 입각 재고를 결정하였는데 신파가 분당 전제의 입각을 반대하여 양파의 조각 협상은 결렬되고 신파의 단독 조각이 발표되었다. 이로서 민주당 구파 동지회는 ‘신민당’으로 발족을 선언함에 따라 신.구파의 다툼으로 민주당은 분열되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야당 국회의원들을 거액의 수표를 던져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진보당 사건, 보안법 개정을 비롯하여 경향신문 폐간, 보궐선거의 승리 등으로 자유당의 오만은 극도에 달하였다.

선거일이 임박하자 자유당의 행패는 더욱 심해지고 서울에선 이정재와 곽영주가 지휘하는 깡패들이 반 자유당계 인사의 등록을 방해하여 곳곳에서 폭행을 가했다. 이와 합세하여 임화수는 강제로 조직한 반공예술인단을 동원하여 자유당 선전에 섰고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주지않고 제작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전국 각지에 순회 상영시켜 이승만 선전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4월혁명의 시작이 된 데모를 가르친 격이 되었으니 야릇한 운명이라고나 할까, 소매치기 출신인 임은 미래의 문교장관을 꿈꾸면서 이정재, 곽영주와 긴밀히 맺었다. 경찰의 비호를 받은 깡패들의 행패는 여수와 광주에서 민주당원 살인사건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더욱이 반공청년단에 가입된 이들 깡패들은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깡패 두목 이정재와 이승만의 경호원으로 별정직 치안국장이란 별명을 가진 곽영주와 소매치기 출신으로 특무대 끄나풀이었던 임화수와 효자라고 선전하여 죽은 어머니를 팔아 민의원이 된 신도환 등 4인은 3.15선거를 전후하여 부정선거의 선봉대로 활약하였다.

3.15일 전국의 유권자 11,196,490명 중 10,559,482명이 투표하여 투표율 94.3%로 자유당이 압승, 했으나 이날 오후에 마산에서 데모가 터졌고 3.15 부정선거의 결과는 17일 판명되었다.

3 .15 마산 사건

인구 15만명이 평화롭게 살고있는 항도 마산의 3월 15일 아침, 내표를 달라고 아우성치며 투표소에 들어가겠다하여 두들겨 맞고 나온 사람, 3인조가 무엇인지 짝을 찾아 헤매는 순박한 시골 아낙들, 이것이 이른바 3.15 선거의 마산 풍경이다.

고려대학생 데모로 터진 4.19 혁명의 분화구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선 마산의 3.15데모가 소용돌이치고 4월 11일 김주열군의 처참한 참살시체로 인한 마산의 제2차 데모에 이어 4월 18일 서울의 고려대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데모를 진행하였다. 이날은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고 교정에는 성북서장과 수십명의 사복 경관이 우글거렸다.

12시 50분 오전 수업을 마친 약 4천명은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미리 준비한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자유 정의 진리’의 교훈 아래 반민주주의를 성토하고 1.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뛰쳐나갔다.

국회의사당 앞을 출발한 데모대는 시청 앞을 거쳐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였다. 이날따라 경찰의 백차가 앞장을 서고 좌우를 에스코트하고 신문사의 보도차도 앞을 달렸다. 데모대가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며 어두워져가는 을지로를 누비던 중 경찰 백차가 을지로 4가에서 돌연 종로 4가쪽으로 데모대를 인도했다.

데모대의 선두가 천일극장 근처에 이르자 5.60명에 이르는 괴한들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각기 손에든 쇠갈고리와 쇠망치 등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자유당이 사육하고 있던 정치깡패들이었다.

맨손으로 이들과 격투를 벌이던 학생들은 몇 개의 몽둥이를 빼앗아 저항하다 호각을 불며 나타난 경찰을 본 후 약속이라도 한 듯 사라져 버렸다. 밤 8시경 50여명의 부상한 학우들을 부축하고 애국가와 교가를 소리높이 부르며 교정으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남아 이들을 염려하고 있던 유진오총장 이하 교수들이 제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자 학생들은 울었고 교정으로 함께 온 수많은 시민들은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이날 깡패 습격으로 인하여 한상철이라는 학생이 피살되었고 다음날인 4월 19일 고대생들의 울분은 4.19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1960년-3은 4.19 민주혁명. 허정 과도정부. 이대통령 하야. 이기붕 일가 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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