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인들 '체 게바라' 75회 생일맞아 대대적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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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인들 '체 게바라' 75회 생일맞아 대대적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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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영웅은 아직도 살아 있다

 
   
  ^^^▲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1928-1967)^^^  
 

1928년 6월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1928~1967)가 75회 생일을 맞이했다. 그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쿠바의 권력자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공산주의의 혁명적 영웅으로 계속 군림해오고 있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베레모와 수염 기른 모습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져 오고 있다.

수만 명의 쿠바인들이 체 게바라의 75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거리 행진을 벌였다고 영국 비비시 방송 인터넷판이 15일 보도했다. 방송은 수많은 군중들이 체 게바라의 장엄하고 큰 대영묘(大靈廟)가 있는 빌라 클라라 중심지인 산타클라라에 운집해서 그를 기렸다고 전했다.

쿠바 국영 방송국은 하루 종일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였으며, 그의 대영묘 앞에서는 문화 축제가 열리는 등 국가적인 행사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다고 방송은 전하고 있다. 카스트로 대통령은 “그는 위대한 지식과 문화를 가진 비범한 인물”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쿠바 그래머 스쿨 학생들은 체 게바라를 “젊은 개척자”라고 부르고, “공산주의 개척자, 우리도 ‘체’와 같이 되겠다”는 구호를 외치며 매일 아침 깃발을 들고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쿠바는 ‘체’가 사망한 이후 국내외적으로 혁명적 덕목과 희생정신 그리고 국제주의 주창한 사람의 상징으로 영웅 만들기를 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가 게릴라들과의 투쟁을 위해 떠나기 전 피델 카스트로 정부 5년 동안 중요 지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는 1967년 10월 쿠바 혁명 정신을 퍼뜨리기 위해서 건너간 볼리비아에서 볼리비아 군에 의해서 사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7년에 쿠바로 되돌아 왔다.

 
   
  ^^^▲ 혁명가 체 게바라체 게바라는 왜 혁명가가 됐나
ⓒ 네이버포토^^^
 
 

왜 체 게바라는 혁명가가 됐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던 1954년 9월 멕시코에서 본명이 “체 게바라”로 바뀌게 되었다. 그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53년 쿠바의 몬타가 병영 습격 사건에서 살아 남은 일단의 혁명가들로 알려지고 있다.

4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53년 3월 무사히 졸업한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천식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과대학을 갔지만 그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학 시절인 52년에 의대 친구와 함께 10개월 동안이나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을 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을 하고 의사로서의 편안한 삶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다 구체적인 사건은 중남미에 비교적 작은 나라인 과테말라의 54년 선거에서 “하코보 아르벤즈”가 승리 대통령이 되자, 과테말라 경작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미국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로부터 내놓게 해 국유화시킨 다음 이 경작지를 다시 인디오와 가난한 집에 재 분배를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개혁적 조치는 물론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체 게바라는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고, 그는 이 학습을 통해 가난하고 착취 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 제국주의와 결탁해 자본을 형성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지속시켜 나간다는 인식을 갖게된다. 그는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서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을 착취하는 현장을 이미 목격한바 있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고, 이로부터 라틴 아메리카는 물론 세계의 가난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혁명 이론과 행동을 구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쿠바와 체 게바라

쿠바에서 망명을 온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만난다. 이것이 카스토로와의 역사적 만남이며 이 만남으로 체 게바라에게 인생의 큰 전기를 맞는다. 이 당시 미국의 휴양지이자 배설구(?)의 역할만을 해왔던 쿠바는 바티스타 독재 정권하에 있었다.

피텔 카스트로와 쿠바 망명 혁명가들과 합류한 체 게바라는 1956년 11월 멕시코에서 조그마한 그란마라는 배를 타고 쿠바로 혁명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향했다. 이때 바티스타 정권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나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살아 남았다. 계속되는 정부군과의 투쟁 속에서 1958년 라플라타 병영 습격을 해 최초의 게릴라전의 승리를 잡았다. 바티스타 정권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시체를 공개하기까지 했으나, 죽었다던 게릴라들은 어느새 살아나 다시 독재자의 뒷덜미를 잡았고 1959년 1월1일 드디어 바티스타는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도망을 쳐 드디어 쿠바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왜 쿠바에서 권좌에 앉지 않았을까?

혁명에 성공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를 사회주의로 이끌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로 할 것인지 결정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9년 6월 체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 유고, 인도네시아를 둘러보고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9년 11월 28일, 체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가 된다. 총재가 되고 나서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본인의 월급을 5천 페소에서 1천 2백 페소로 1/4로 줄인 일이었다. 이를 본 많은 부르주아들은 미국 마이애미로 줄줄이 도망쳤다고 한다.

1960년, 체 게바라는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했다. 그가 방문해서 본 것은 반드시 사회주의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부터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과 잦은 갈등을 일으켰다.

미국은 1961년 1월 8일 쿠바와 국교 단절 조치를 취한다. 쿠바가 자국내 미국 재산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통상 확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1965년 1월 콩고, 기니, 가나, 알제리, 탄자니아와 이집트 등을 방문한다. 그는 방문한 자리에서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준다....."고 소련을 비난했다. 그해 3월 쿠바로 돌아왔을 때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격렬한 토론에 임해야만 했다. 이제 카스트로는 혁명이 성공한 뒤의 쿠바를 이끌어야만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아직도 혁명가로 행동하는 체 게바라를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체 게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유희가 되는 경제'를 꿈꾸었으며 화폐,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개념까지 부정하는 극좌파적 이상을 표출 시켰다. 소련도 그의 정책과 이상에 비판을 해댔다. 노동자 농민들도 자발적 임금 삭감을 유도한 체 게바라를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65년 4월 그는 쿠바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후에 그는 콩고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라틴 아메리카 해방과 나아가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서 쿠바 시민권을 포기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21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민중의 자유, 부의 분배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시점에서 저 먼 곳의 사라진 한 혁명가는 우리들에게 웅변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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