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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존재는 개인에 있어서 마음의 고향을 상징할 뿐 아니라, 가족 구조의 정서적인 기둥을 이룬다. <장화,홍련>은 이러한 모성의 갑작스런 상실뒤에 남겨진 공백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순혈주의를 통한 정서적 일체감을 강조하는 동양의 가족구조에서,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에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염정아)의 존재는 모성의 지위를 강탈하려는 타자의 위협으로 인식된다. 계모와 두 소녀의 긴장 관계는, 이미 권위를 상실한 무기력한 가부장제의 껍데기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가족 내부의 권력투쟁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적 특성과 실험
6월 13일 개봉하는 영화 <장화,홍련>은 올 여름 시장의 성패를 좌우하는 호러 영화 릴레이의 첫 주자다. 그러나 이 영화가 상업적 가치 못지 않게 장르적인 완성도에서 주목을 끄는 이유는 바로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이름 때문이다.
작품의 규모나 배우들의 네임밸류가 비중을 독점하는 여느 상업영화와 달리, 이 작품은 철저하게 감독 고유의 스타일이 지배하는 감독의 영화다.이미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의 전작들을 통하여 불안정한 현대인의 이중성을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로 풀어내던 감독의 개성과, 국내의 고전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고딕 호러라는 장르가 하나의 작품을 통해 조합된다.
김지운의 영화는 항상 모호하고 실험적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 자체가 난해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일정한 장르의 규격화에서 살짝 비껴나 있으며, 때로는 어디로 튈지 알수없는 좌충우돌의 내러티브를 통하여 등장인물들을 극한의 혼돈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감독은 감정적인 몰입을 자제하고, 시니컬한 시선으로 관조할 뿐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시대성이나 사회성은 종종 배제된다. 대신 일정한 상황속에 인물을 몰아넣고 그들의 심리적 변화를 주시한다.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장르의 진폭이 큰 김지운식 영화에서 일관된 공통점은 이처럼 인간을 탐구하는 '건조한 휴먼 드라마적' 색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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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호러를 표방한 <장화,홍련>에서도 외부와 고립된 저택은 그 자체로 중요한 배경이 된다.영화의 90퍼센트 이상은 이 저택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세련되지만 웬지 답답하고 습한 느낌을 주는 저택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한다. 이것은 김지운의 전작들에서 보여지던 독특한 공간 설정의 변주이다.
일정한 공간안에서 구체화되는 김지운 영화의 캐릭터들은 예민하고 소심하다. 타인과의 소통에 서투른 인물들의 오해와 반목은 불신을 잉태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사교성이 결여되어있고, 감정표출에 서투르다는 점이다. 이것은 감독인 김지운 자신의 페르소나들에 다름 아니다.
<장화,홍련>에서 계모 은주와 수미 자매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결핍이다. 영화내에서 등장인물들간의 소통은 종종 선문답같은 짧은 대화와 의도된 침묵으로서만 이루어진다. 각자 차갑고 냉정한 겉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계모의 과도한 결벽증이나 수미의 동생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내면은 이미 붕괴되어 있는 상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뭔지 알아?
<장화,홍련>은 스토리나 미장센의 측면에서 종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스>를 연상시킨다. 고립된 저택을 배경으로 한 하우스 호러라는 점이나,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와 두 남매 사이에 벌어지는 가족 붕괴의 비극, 그리고 존재감을 상실한 아버지의 모습 등은 상당부분 유사하다.
<장화,홍련>은 일단 처음부터 외부인(계모)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놓는다. 애증으로 엮여진 그레이스- 두 남매간의 관계와 달리, 계모와 수미 자매에게는 혈연이라는 정서적 완충 지대가 없다. 배타적인 정서에 근간을 둔 적대감은 쌍방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부터 원전의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뒤집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중심인 것 같았던 쌍방간의 갈등구조가 무너지고, 도식적인 선악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영화의 내러티브는 한 걸음 전진한다. 모든 갈등의 근원같았던 계모 은주마저도 또다른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에 이를때야 비로소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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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공포를 만들어내는 근원은 악령이나 귀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식스 센스>나 <디 아더스>등의 성공에서 보듯이, 영화는 등장인물(혹은 영혼)들릐 복수보다, 그러한 비극을 잉태한 한맺힌 사연의 실체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다. 그 진실은 등장인물들의 복수보다 더욱 공포스럽다. 그들의 사연이 관객과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할때, 비로소 이야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뭔지 알아?' 극중의 은주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과거로부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특히 내 집과 가족이라는 가장 정서적인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협이다, 절대적으로 내 편이라고 신뢰하던 대상에게, 타자성이 유입될때 공포는 배가 된다. <샤이닝>에서 가족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광기의 아버지 잭(잭 니콜슨)처럼, 가정 비극은 우리 일상의 무의식적인 평화를 위협받는다는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다.
새로운 걸작, 혹은 불완전한 실험?
김지운의 영화는 항상 대중성과 장르적 완성도에서 미묘하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코미디적인 요소로 대중성을 확보한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도 코믹 연출에 포인트를 맞춘 것은 아니었다. 웃음을 가급적 배제한 정통 호러 영화인 <장화,홍련>에서도 김지운 특유의 장르 해석과 캐릭터의 성격 규정은 돋보인다.
그의 영화들의 진행 속도는 느리다. 항상 일정한 복선을 설치해놓고, 어느 순간 탄력을 받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때때로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에 코믹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누그러뜨리는 것도 대중성과 장르성 사이의 타협처럼 느껴진다. <장화,홍련>에서도 영상 스타일의 수위를 놓고,곳곳에서 갈등의 흔적이 느껴진다.
<장화,홍련>은 옴니버스 영화<쓰리> 이후로 두번째로 시도하는 호러 영화에 대한 도전이다. 한국적인 호러 영화에 김지운식 감각을 덧붙인 그의 실험이 과연 봉준호식 농촌 스릴러 <살인의 추억>처럼 성공한 대중적 실험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6월 13일 이후의 결과를 주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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