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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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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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 위치한 아트코리아방송 미디어센터에서는 16일 오후 ‘운봉 이규완 민화작가의 색채여행 16’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조선의 회화 책거리

그 외에도 조선후기에 책거리 그림이 유행하게 되는데 책거리는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물품을 그린 그림으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민화의 제재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책거리 그림의 형식은 장식장에 귀한 물건을 진열한 그림으로 중국의 다보각경, 다보격경의 그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의 장식장에서 책을 위주로 진열하는 책장 그림으로 새롭게 변형을 시켰습니다. 이름도 책거리라고 불리었으며.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학문을 숭상시 했던 조선인의 열정을 유교적인 이념과 부합시켜 조선의 회화로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보겠습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정조의 책거리와 문체반정

책거리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리 강했던 정조대왕 으로 정조는 우리나라의 문체를 타락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청나라의 패관소설과 잡서의 통속적인 글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고전적 문체로 돌아가기 위해 취한 조치로서 문체반정의 뜻을 밝힌 그림이라고 보겠습니다. 아쉽게도 당시의 책거리는 한 점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립박물관 소장<<책가도>>를 통해 비슷한 면모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책거리 안에 책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어서 정조가 학문의 진흥을 강조했던 것과 더불어 학문을 중요시 여기던 조선인의 학구열이 뜨겁게 표출된 그림이라고 보겠습니다.

유교 문화와 화려한 책거리

그러나 정조의 의도와는 달리 궁중이나 상류계층에서 제작된 책거리그림은 대부분 청나라에서 수입된 화려한 도자기나, 문방구, 서양의 기물들을 책장 속에 책과 함께 배치했습니다. 그러한 데에는 당시 조선이 다채색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백자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며. 이는 검약을 미덕으로 삼는 유교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한 조선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다르게 실제 왕실이나 사대부에서는 다채색의 도자기를 선호하는 이중성을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길상적 염원과 책거리

조선후기 책거리 그림은 서민미술의 민화로 확산되면서. 정조가 처음 의도한 학문으로서의 책가도가 아닌 출세와 같은 기복적인 성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책거리그 4 림은 점차 책보다 과일, 꽃, 가구의 비중이 높아지고 학문의 취지였던 의도와는 달리 장수, 다산, 등 부귀영화에 부합하는 모란꽃 그림과 과거시험에 합격을 기원하는 기복적인 길상문으로 변형되었으며. 복을 비는 소망이거나 출세에 대한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민 민화의 그림에서는 서가를 없애버림으로써 틀에 박힌 정형의 반듯함에서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고 학문보다 길상적 염원과 생활의 정감을 내세웠다고 보겠습니다..

유교적 의미 감모여재도

조상숭배를 위해 유교식 제사를 지낼 때 에도 그 의식을 행할 사당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사당을 지을 수 도, 신주를 모실수도 없었기에 제사상 앞에 지방을 써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는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살아있는 것과 같다는 유교적 의미에서 그림으로 그려 지방제사를 지낼 때 활용되었으며. 중요한 것은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기에 제사상 앞에 그림을 대신 걸어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그림을「감모여재도」(사당도)라 하는데 그림들은 족자, 병풍으로 제작되어 평소에는 접어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설치하면 된다는 점에서 경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동이 가능한 휴대용 사당인 것입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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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길상으로 바라본 감모여재도

중국에서는 사당도(祠堂圖)를 가당도(家堂圖)라고 부르며. 중국의 가당도는 제수가 차려진 제단이 그려져 있지 않으므로. 그림 앞에 별도의 음식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감모여재도”는 제사상이 푸짐하여 활기와 풍요로움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제수에 쓰인 음식으로서.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인, 포, 생선, 나물, 곶감 등이 아닌 다산과 길상을 상징하는 수박과 참외, 석류, 포도 등으로 차려져 있습니다. 또한 좌우의 꽃병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이 꽂혀있고 사당 안 벽에는 패랭이꽃이 그려져 있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제수 그림은 죽은 사람이 아닌 현실적으로 산 사람을 위한 상차림 입니다. 서민들은 “감모여재도”를 통해 조상을 숭배하면서도 제수를 통해 자신들의 행복을 기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용두어신과 용문

그 외에도 선비들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와 함께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그림으로 건강하고 공부를 잘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등용 5 (登龍門)이 그려졌습니다.

서안에서 황하(黃河) 물줄기를 따라 100 Km 거슬러 올라가면 용문(龍門)이란 협곡이 있습니다. 해마다 복사꽃이 만발하여 꽃잎이 떨어져 물위를 흐르는 봄철이 되면 황하의 잉어들은 용문으로 모여듭니다. 그 황하의 하진(河津)을 일명 용문이라 부르는데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잉어들이 폭포를 오를 수가 없습니다. 강과 바다의 큰 물고기들이 용문으로 모여드나 오르지를 못하는데, 그러나 기어히 폭포를 뛰어오른 잉어는 용으로 화신하여 등천한다고 하여 등용문에 비유하였습니다.

물고기가 차츰 용머리로 변하면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있는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을 용두어신(龍頭漁神이라 말하며, 이 것은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된다는 어변성용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후한서 이응전>>의 등용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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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과 등용문

이응은 후한 때 관리로서 환관 <<고려후기와 조선시대 내시를 말함>들과 맞서 싸우며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던 정의파 관리였습니다. 당시 환관들은 이응의 이야기만 들어도 벌벌 떨었고, 청년관리들은 그를 만나는 것을 등용문이라 비유하고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응전 주해(註解)>>에 의하면 용문은 다음과 같이.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며, “용문(龍門)은 과거급제 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출세의 문턱에 서는 것을 뜻한다고 보겠습니다.

입신출세를 상징하는 어해도

어해도의 주인공인 물속의 생물들 역시 과거급제와 출사(出仕)<<벼슬하여 관직에 나감>>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폭포 위를 뛰어오르는 잉어그림이나 쏘가리 그림들은 과거급제와 입신출세에 관련하여 크게 선호되었습니다. 그중 입신출세를 상징하여, 폭포 위를 뛰어오르는 어해도는 약리도로서, 황하 상류에 위치한 산서성의 협곡으로 뛰어난 경관을 지닌 용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곳은 폭포위에 뛰어오르는 것에 성공한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데서 연유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유교와 관련된 그림들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민화그림으로 선정하여 이야기를 한 것 으로서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유교가 조선민화에 끼친 영향2 (김한정 기자)

끝맺음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유교는 수 백년 전의 그것과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며, 그렇기에 과거 전통의 유교사상을 오늘날의 주류사상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시대 유교문화(최봉영, 사계절, 1997)

조선민화에 끼친 유교의 영향, (정병모, 미술사학 23)

유학사상(최근덕, 성균관대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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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03-22 01:29:43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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