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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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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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항소 이유서-1

사 건 : 2003 노 102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
피고인(항소인) : 지 만 원

상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항소 이유를 밝힙니다.

1. 본건 문구(文句)는 [진실한 사실]의 표현입니다.

(가) 본건 공소사실에 의하면 [. . .쌀 , 마늘 사건 등으로 농민을 분노케 해놓고, 거기에 노동세력, 홍위세력 등 좌익들이 불을 당기면 광주사태의 확대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습니다. . . ]라는 문구가 진실한 사실이 아니라 허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심에서 피고인이 제출한 증1 내지 증17의 자료만 가지고도 이 부분 문구가 틀린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증거자료들 중에는 5.18사료편찬위원회가 발행한 5.18광주 민주화운동 자료총서들도 상당량 포함돼 있습니다. 이 증거자료들과 항소심에서 추가로 제출하는 자료들은 1980.5에 광주에서 발생한 소요, 폭동, 총격, 방화, 파괴, 인명 사망 및 부상 등으로 대표되는 비극적 사건에 관하여 시민군 및 진압군의 주장, 양측 목격자들의 진술, 신문보도, 잡지들의 심층분석, 양측의 입장 및 제3자의 입장에 서있었던 사람들의 회고기록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록 그 양은 방대하지는 않다 해도 문제의 문구가 진실한 사실이냐, 허위냐를 가늠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핵심적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정도의 자료만 분석해 보아도 위 문구가 허위사실의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며, 피고인은 위 문구가 진실한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 1980. 5부터 23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그 비극을 겪은 광주시민을 위로하려는 국민적 배려 때문에 더 이상 선동이다, 폭동이다, 좌익의 개입이다, 북한의 침투다 하는 등의 표현이나 논의를 터부시해온 반면, 12.12 사태에 뒤이은 정치성향의 군인들이 저지른 헌법위반 행태에 분개한 정의감 있는 시민들에 의해 주도된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며, 운동에 참가한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현양(顯揚)하는 방향으로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피고인이 이러한 국민 일반의 위로의 심정이나 광주 시민의 잊고 싶은 정서에 어긋나는 표현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마음 아픈 일이지만 위로와 화합을 위한 배려 때문에 언제까지나 역사의 진실한 평가를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한 사실과 진실을 지적할 수 있는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구나 광주사태에 대한 역사평가는 지금과 같이 국가안보가 염려되는 혼란한 시기에 그것이 갖는 국가안보적 의미 때문에라도 시급히 그리고 폭넓게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 피고인의 신념입니다.

피고인은 피고인의 문구를
(1) 소수 좌익의 문제
(2) 북한 특수부대원(간첩)의 문제
(3) 선동의 문제
(4) 폭동의 문제
(5) 시민에 대한 상당한 영향의 문제 라는 5개의 키워드로 분해한 후, 원심에서 제출한 증1 내지 증17의 자료들 중에서 분량을 고려하여 대표적인 부분만을 발췌하여 [5.18사건의 사료(史料)]라는 일람표(table)에 번호1 내지 번호158에 이르기까지 정리하여 제출하였습니다.

(다) 당시의 상황은 무장까지 갖춘 사람들과 군인과의 전투였고, 1980. 5. 18.부터 동년 5. 26.까지의 전세는 무장한 사람들이 압도했으며 5.21일에는 그야말로 전 도시가 그들 손에 장악돼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한 살인, 난동, 방화 파괴, 무기탈취, 교도소 습격,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광주일원의 수많은 전투에 대한 조직적인 지휘는 소요기간 9일 내내 광주를 무법천지요 무정부 상태로 변화시켰으며 이를 방치하면 강명도씨가 증언한 것처럼(증19), 그리고 당시의 군이 판단했던 것처럼, 북한의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됐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전방을 비울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번지고 장기화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던 당시의 정부로서는 이를 최소한의 군사력으로 최단시간 내에 진압해야만 했다고 봅니다.

전투에서 누가 더 가혹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폭력 데모를 저지하는 광경을 보면 민주화의 첨단을 달리는 서구 국가들이라 해도 그들의 경찰과 행정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의 민중폭동이 발생한다면 그들의 역사를 보면 우리보다 더 관대하게 진압했던 것이 아닙니다. 무기고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방화하고, 파괴하고, 경찰과 군대에 대하여 전투를 한 사람들을 정당시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라) 1989. 2. 15.일자 국민신문은 다시 5월이 오면 우린 승리한다(증11, 심층취재, 무서운 아이들, 남대협전투조직 53-56쪽)는 제하에 무시무시한 심층취재 기사를 실었습니다. 호남 일대의 대학들에 전투조직들이 자라나고 있다 합니다.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 목포대의 동백대, 순천대의 유월대, 호남대의 전사대 등 수천명 단위의 전투조직들이 힘을 키우면서 다시 5월이 오면 우린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합니다. 학생운동 출신의 광주-전남지역 20대 애국투사들 중 남대협 전투조직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하며, 이들의 수는 지금 얼마나 달하는지 외부에서는 잘 모릅니다.

이들의 존재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에 대해 언제든 제2, 제3의 5.18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일단 소요를 일으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북한에서 귀순한 강명도씨가 지은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증19)라는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실들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240쪽에는 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사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장기화하려던 무기를 든 일부시민들과 남침에 대비, 전방병력을 빼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병력으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소요를 진압하려는 군부대의 진압의 관계를 놓고 지식인들은 활발한 토론을 하여야 합니다.

(마) 피고인은 광주사태란이라는 어두로 광주사태에 대한 피고의 신념을 피력했습니다. 이는 광주사태에 대한 피고인의 정직한 신념이자 사관입니다.

1980. 5. 21. 당시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은 이와 같습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시위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궁극적이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는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증10, 29쪽, 5. 21.)

1982. 3.에 육군본부에서 조사발표한 내용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대 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 광주로 침입하려다 삼엄한 경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간첩 이창룡을 검거한 사실, 3명의 독침 사건,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하는 점, 도청 난동자들의 조편성이 빨갱이 식 조직이라는 사실, 구호들이 적색 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괴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증4, 33쪽 좌측 중간, 증9, 142쪽 하단).

피고인이 본건 문구에서 밝힌 사관(史觀)은 피고인이 새로 만들어 낸 사관이 아닙니다.

(바) 광주사태의 잘못된 보도에 관한 이런 취지의 조사내용도 있습니다.
광주사태는 1995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오보와 거짓 진술 등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그 사례 10가지만 제시한다. 허위진술과 과장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을 아무런 검증과정 없이 여론재판 목적으로 보도하여 광주사태를 왜곡했다. 거짓 증언과 거짓 보도는 정당한 것으로 여론몰이 되고, 당시 전두환씨 측 증언은 강변 또는 궤변이라고 여론몰이를 했다”(증6). 여기에서 제시한 10개의 거짓 기사 내용들은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광주사태에 대한 판단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우 큰 사례들이었습니다.

광주사태 진압에 참가했던 장병들의 이야기

언론을 동원한 인민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헌법 제1조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려는 공권력을 범죄자로 매도하고, 총을 들고 국가 공권력을 파괴하려는 폭도들을 민주화 투사로 뒤집고 있습니다(증7, 5월호 45쪽 중간), 정당하게 작전명령을 수행했는데 그것을 내란죄라 하면 도대체가 군인이 발붙일 곳이 없지 않습니까?(증7, 51쪽 중간), 현장에서 작전을 했던 제가 청문회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시나리오를 짜서 방영했으니, 일반시민들이 볼 때는 군인들을 얼마나 나쁜 집단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청문회는 사전에 짜여진 각본이었습니다. 왜곡시킨 자료와 증언만 받아들이고 부대원들의 진실된 증언은 제외시켰습니다. 저는 청문회에 나가기 위해 10번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습니다. 제 마음대로 증언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시나리오가 이미 작성돼 있었습니다(증7, 49쪽 중간). 이러한 생생한 사례들은 연구자들이 분석해야 할 일이지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시류에 따라 인민재판 식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사) 광주사태 당시 계엄사령부는 외부에서 투입된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자기 지역구인 광주인근지역을 둘러보고 돌아온 문형태 국회국방분과위원장은 공산당이 시내에 들어와 있거나 외부에서 과격분자들이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증8, 위컴회고록. 증20, 제2쪽 하단에 필요부분만 발췌)고 말했습니다.

당시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인물들 중에는 김대중(증9, 350), 문익환(증9, 352), 서경원(증9, 359), 한완상(증9,353) 등이 있었다고 수사당국이 발표한바 있습니다. 당시의 정부는 광주사태를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발표했으며(증22, 디지털 조선 2003.1.21 9줄),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도 재심을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사면자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당시의 대법원은 당시의 김대중씨를 좌익으로 규정했고, 광주사태를 좌익인사인 김대중씨가 내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돈을 주어가면서(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과 같이 수사에서는 김상현씨를 통해 정동녕에게 500만원을 준 것만 밝혀냈음) 배후 조종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대법원은 이에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 후 김대중씨는 이를 군부가 억울하게 뒤집어씌운 누명이라고 뒤집음으로써 지금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국법을 초월하여 마카오 대남 테러 기관인조광무역상사를 통해 적장에게 비밀자금을 주었고(증23 1-7줄), 금강산 사업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군자금을 대주었으며,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북한과의 연방제지향에 도장을 찍었으며, 북한의 무력증강을 감싸주고 숨겨주는 반면, 북한의 영해침범과 서해테러를 감싸주고, 전쟁은 없다며 대한민국의 반공 정신을 허물고, 지뢰제거, 훈련축소 등 방위시스템을 허무는 일 등을 합법을 가장하여 강행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많은 국민은 그를 좌익으로 인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좌익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전혀 하자가 없다고 봅니다. 이는 1980년 당시의 수사기관 및 대법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1980년도의 사실을 다시 재확인하는데 23년이 걸린 것입니다.

광주사태에 관여한 문익환 목사 역시 당시의 수사기관 및 법원은 좌익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에서는 소위 민주화 인사, 통일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미화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는 좌익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문익환 기념우표를 발행할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증24, 한국일보 2000.9.6 1-2줄. 증25, 엠파스 제1항). 1980년 당시의 정부와 법원의 판단이 옳았던 것입니다.

서경원 역시 광주사태에 관련되었습니다. 그는 1988년 8월 북한에 2박3일간 밀입북하여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9년만에 나온 좌익입니다(증26, 디지털조선 1993.5.26 2줄. 증27 문화일보 1998.3.13 5-8줄). 이들 3인은 대한민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며 지금에서야 확실한 좌익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 1970-80년대에는 특히 반정부 소요사태가 극성을 부렸던 시대이며 사건마다 좌익과 간첩들이 배후에 개입돼 있다는 것이 당대를 살아온 국민들의 상식이였습니다. 광주사태만은 이에서 예외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광주사태에 북한이 깊이 관여했다는 것은 고위층에 가까웠던 탈북자들일수록 상식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대의 한국인들에게도 상식이었습니다. 고위급 탈북자 강명도씨는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증19)라는 저서에서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전해주었다(239쪽)고 쓰고 있습니다.

양자간의 갈등을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240쪽 상부)이라는 북한당국의 판단도 들어 있고, 북한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 삐라를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만들어 살포했다(241쪽 하단)라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인민군 고위간부(상좌:대령)였던 최주활씨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3개조를 광주사태에 내려보냈다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공작조 9개조가 남파된다는 첩보도 있었습니다. 광주에 잠입하려다 실패하고 서울로 오다가 잡힌 간첩 이창룡도 있습니다.

평양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을 모두 없애고 광주사태의 작전 상황을 생중계했으며, 이는 광주사태에 관여한 불순분자들에게 광주의 작전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으로 봅니다. 광주시에 나돌던 유언비어는 대부분 다 북한의 선동방송 내용과 일치했습니다.

(자) 지하신문이 5월 18일부터 발행됐습니다(증4, 25-26쪽).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상당한 자금도 필요합니다. 이는 광주사태가 광주의 주장처럼 과잉진압에서 순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미리 준비된 것임을 증명합니다. 광주사태가 사전에 준비됐다는 증거는 이 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국정원자료에 이에 관한 자료가 있다고 합니다).

스피커를 통해 북한 여성으로 인식할만한 여성이 전문적인 선동내용과 북한의 억양으로 선동을 했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전문 기술을 발휘하여 군중을 선동한 40-50대의 프로급 선동가들도 있었습니다. 광주시민들까지도 불순분자를 색출하여 계엄군에 넘겨준 사실들도 꽤 있었습니다.

총으로 사망한 민간인 162명중 72,2%에 해당하는 117명이 시민군이 탈취한 M-16과 칼빈 소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불순세력이 순수한 목숨을 이용하여 사태를 악화-확산시키려는 선동술의 하나로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발은 극히 소수이어야 오발입니다. 7.2.2%는 오발이 아니라 의도적인 사격입니다.

순수한 광주 시민이 어찌 의도적으로 광주시민을 쏠 수 있겠습니까? 이 통계자료는 지금까지도 적법합니다. 고소인단체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반증을 내놓은 바 없습니다.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자료라면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지나칩니다.

지독한 유언비어들 역시 순수한 광주시민이 할 리 없습니다. 강명도씨는 북한이 삐라를 만들어 보냈다고 했습니다(증19). 북한이 광주 인민봉기 20돐을 맞아 발표한 전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증28,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가 광주인민봉기 20돐을 맞이하여 전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제2쪽 중간)에도 어린 생명들을 무한궤도로 깔아 죽이고, 우리의 녀학생들을 칼로 젖가슴을 도려내 죽이고, 임신부들을 대검으로 배를 갈라 죽였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광주에 나돌던 유언비어와 맥을 같이 합니다. 광주사태 당시 국방부 및 사령부에 있던 대부분의 군인들은 광주시에 나돌던 유언비어가 평양방송 내용과 어쩌면 그렇게도 일치할 수 있는가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대검은 칼날이 없어 과일조차 깍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대검이 날이 시퍼런 줄로 알거나 더러는 대나무로 만든 칼로 압니다. 군의 증언자들은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의 40%가 호남출신이었다고 증언했지만 유언비어는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호남인들을 싹쓸이하러 왔다고 지역감정을 부추겼습니다.

공수부대는 10명이 1개조입니다. 대열을 이탈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됩니다. 그런데 유언비어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여인을 윤간-겁탈하고 죽였다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순수한 광주시민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비정규전 핵심전술의 하나인 유언비어를 전문으로 하는 불순분자들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시민을 본 광주시민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유언비어에도 흥분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게 선동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조직적이고 선(善)을 가장한 교묘한 전술을 사용하는 속임수에 속지 않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이상의 것들은 1심 답변서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차) 고소인들의 대표인 이동춘 교수 및 정수만, 5.18연구소장 직에 있는 나간채 등은 법정 증언에 나서 5.18에 대한 명백한 객관적 자료들과 과학적인 검시 결과에 대한 변호인의 질문을 외면하거나 모른다거나 아무런 대체 자료 없이 무조건 당시의 정부나 언론이 발표한 자료는 날조된 것이라며 부정하였습니다. 이는 이들 고소인들이 광주사태의 진실면(眞實面)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는지에 대한 한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검사 증인들의 의견

질문1: 증인은 [북한은 80년5월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 등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는 점에 대하여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답변: 이동춘: 신빙성이 없다
정수만: 아니다
나간채: 확인 못했다

질문2: 증인은 [(1)불순분자들이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2)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러 왔다 (3)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는 등의 유언비어를 순식간에 유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답변: 이동춘: 그런 유언비어 모른다.

정수만: (1)번에 대해서는 좌측 유방에 좌창 있는 사람 있었다, (2)번과 (3)번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그런 소리를 들었다.

나간채: 1,2,3번에 대해 그런 말이 유포되는 것들 들었다. 그러나 진압군의 조작일 가능성이 있고 선량한 광주시민이 퍼트렸다고 안 본다.

(주: 악성 유언비어를 선량한 광주시민이 퍼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피고인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그 악성 유언비어를 누가 유포했을 것이라고 믿는가에 대해서는 피고인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를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믿는 반면 나간채는 진압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불순분자들의 광주 개입을 무조건 부정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3: 증인은 [민간인 사망자 162명을 검시하여 사인을 규명한 결과 M1과 카빈소총에 의한 총상이 대부분인 117명이었으며, 타박상이 18명, 수류탄 파편상이 12명, 찔린 자상(刺傷)이 11명, 화상(火傷)이 4명이었다. 그런데 카빈 소총을 가진 경찰관은 모두 도주해 버렸고, 계엄군은 M16소총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정확한 것으로 생각하나요?

답변: 이동춘: 틀리다고 본다
정수만: 잘못된 검시(檢屍)다
나간채: 충분히 검토되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다

질문4: 증인은 [계엄군이 광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을 때, 시민군을 한사람 잡았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그 사람이 월산 제2동 지도원 동무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는 증언에 신빙성이 있는 증언이라고 생각하나요,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답변: 이동춘: 모른다
정수만: 조작일 것이다
나간채: 자료 못 보았다

질문5: 증인은 [그리고 5월23일에는 20일 새벽에 남해안으로 침투, 광주시내로 잠입하려다가 실패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이창룡이 서울시민의 신고로 검거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가요?

답변: 이동춘: 모른다
정수만: 모른다
나간채: 모른다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는 데에는 각자 입장에 따라 사관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검시결과와 같은 기본 자료를 아무런 대체자료를 내놓지 않으면서 무조건 부정만 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광주사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이 5.18단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 북한 간첩이 개입-유도했다고 보는 근거를 아래에 열거합니다.

1) [북한은 5.18때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증5, 5.18사건의 사료 1항)

2)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계엄사 157쪽 6-8줄).

3)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증19,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

4) 5.18 전후에 평소와는 달리 많은 간첩들이 잡혔다.
① 3.23. 한강하류로 수중 침투해 오는 간첩 3명 사살
② 3.25. 무장간첩선이 포항 앞 바다에 침입, 우리 어부 3명을 사살하고 도망하다가 해공군 작전에 의해 격침
③ 3.27. 금화지구 비무장지대에 3명이 침투, 그 중 1명만 사살
④ 5.12.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⑤ 5.15.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⑥ 5.20.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생포(증9, 계엄사 47쪽).
⑦ 6.21. 서산 앞바다 무장간첩선 침투, 9명 사실, 1명 생포

5) 북괴에서 정규방송을 제쳐놓고 시간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여 선동했고, 남해안으로 침입한 간첩 이창룡이 5.23에 검거되었고,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했고, 난동자 조편성이 빨갱이식 조직이었고, 차량에 적색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하여 공수부대 요원들까지 섬짓함을 느끼게 한 것은 분명 적색분자의 소행이었다(증9, 계엄사 142쪽, 5.18사건의 사료 40항, 53항 등).

6) 난동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을 한 자, 서울에서 왔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불순분자가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본다(증9 157쪽, 5.18사건의 사료 41항).

7) 주요 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수 시간 전에 내일 새벽 1시라고 알려준 것이 시민군에 알려져 23세의 김춘심이라는 여성이 집 차에 확성기를 달고 이 사실을 알렸으며, 난동자들이 작전시간과 작전대상을 미리 알아 계엄군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증9, 계엄사 161쪽, 5.18사건의 사료 42항).(패망한 월남에서처럼 5.18 당시에도 간첩이 계엄군에도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아무런 정황증거 없이 아니라고만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8) 박총리는 방송에서 대부분의 광주시민이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들이 퍼트리는 유언비어에 속고 있다고 말했다(증10, 총기 버리고 유혈사태 막자. 5.18사건의 사료 48항).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믿지 말자. 오열과 불순분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선무 내용이 방송됐다(증10, 대화로 모든 문제 해결가능. 유언비어 믿지 말고 자제해야. 5.18사건의 사료 50, 54항)

9) 북한의 가장 큰 대남 공작부 3호청사는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삐라를 만들어 광주로 보냈다(증19,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1쪽 밑에서 3줄).(주: 광주사태는 9일간의 사태였습니다. 북한이 몇 주간 삐라를 만들어 내려보냈다면 광주사태는 적어도 사태발생 몇 주 전부터 북한이 개입하기로 기획한 것일 수 있습니다)

10)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대 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 광주로 침입하려다 삼엄한 경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간첩 이창룡을 검거한 사실, 3명의 독침 사건,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하는 점, 도청난동자들의 조편성이 빨갱이 식 조직이라는 사실, 구호들이 적색 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괴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증4, 33쪽 좌측 중간, 계엄사 142쪽 하단).

11) 간첩설도 나돌았다. 누군가 전신전화국에 불지르자고 얘기하자 왜 불지르느냐, 이상하다, 혹시 간첩 아니냐고 경계하기도 했다(증4, 42쪽 좌하단).(주: 이렇듯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광주 시민 자신들도 간첩 행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동사무소 등 닥치는 대로 불사르고 파괴하는 행위,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교도소를 공격하고, 끝까지 결사 항쟁하는 행위들을 간첩행위로 보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12) 조사도 해보기 전에 정세균은 독침사건은 간첩의 소행이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광주사태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갔다(증12, 92쪽, 좌측 중간. 518간부의 회고록).

13) 수습위에서 총기를 회수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총기가 회수되지 않은 곳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는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움직였다. 기동타격대는 시위 외곽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 회수가 어려웠지만 무장조는 도청 민원실 강당에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무기 회수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자 그들은 물끄러미 처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 사내가 일어났다. 우리는 무등갱생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겁니다(증12, 93-94쪽, 5.18단체측 인사의 회고). (주: 36명이 M-16으로 무장하고 이런 매너를 보였다는 것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특수 집단으로 보여 집니다. 선생이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툭하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한 피고인은 이를 매우 잘 압니다. 광주시민은 나이가 든 사람에게 선생이라는 용어보다 어르신이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14) 우리가(공수부대) 전남대학교 교정에 처음 진주했을 때, 대부분의 구호가 붉은 글씨였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농민수탈금지. 우리 부대원들은 이를 분명 용공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믿었다(증17, 427쪽. 공수 작전병의 실명 수기).

15) 붉은 색으로 쓰여진 구호가 계엄군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섬듯한 내용과 붉은 글씨가 용공적 냄새를 진득 풍겼다(증6, 426쪽 제3단 7-19줄).

17) 우리나라 역사상 계엄군에게 총을 쏜 소요는 광주사태가 처음이다(증13, 69쪽, 좌측 하단).

18)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지하신문이 5.18-5.26 사이 9호까지 발행되어 계엄군 섬멸과 최규하 정권의 퇴진을 선동하였다(증4, 25-26쪽, 5.18사건의 사료 9항). (주: 지하신문 발행은 시설, 장소, 디자인, 내용 등을 갖추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합니다. 지하신문이 5.18 당일부터 발행됐다는 것은 5.18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임을 웅변해 줍니다. 순수한 시민이 순발적으로 이런 지하신문을 발행할 수는 없습니다. 5.18은 배후 불순세력이 미리 준비한 사건입니다).

19) 그런데 우려하고 근심했던 일이 터졌다. 하나는 26일 새벽 4시30분 서구 사구동 734-1 최던준씨(52) 집에 무장괴한이 침입, 최씨의 부인 최소례(35)와 아들 등 일가족 3명을 쏘아 살해했다. 다른 하나는 계엄군이 포위망을 압축해 온다는 소식이었다(증16, 476쪽. 광주 취재기자의 수첩 메모).(주: 이를 순수한 광주시민이 저지를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20) 시민군의 한 사람이 월산2동 지도원동무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증4, 41쪽, 5.18사건의 사료 18항).

21) 좌익수 170여명이 들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증10, 140쪽, 5.18사건의 사료 59항)

22) 소요가 진압국면에 들어섰을 때 계엄군에 발악적으로 저항했던 17명이 모두 희생됐다(증10, 143쪽. 5.18사건의 사료 64항).(주: 순수한 시민군이라면 이렇듯 발악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23) 사망자 26명은 남한에 연고가 없는 시체였다(증9, 141쪽, 5.18사건의 사료 38항)(주: 남한에 연고가 없는 사망자는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현재도 망월동 묘지에는 연고자 없는 12명의 묘가 있습니다. 하다 못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강탈해가다가 죽은 시민도 두둑한 보상을 받는데 어째서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24) 난동자들이 이리 시 폭파사건 시의 폭약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TNT를 도청지하실에 장전하고 광주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결사항전했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01시에 특공 진입하여 뇌관을 뺐다(증9, 140쪽, 5.18사건의 사료 36항).(주: 이는 시민의 차원과 민주화 운동의 차원을 훨씬 넘습니다).

25) 무기고를 탈취했고, 방위산업업체에서 장갑차를 포함한 군수장비를 탈취하여 공격했으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등 공공 시설을 불태우고 치안과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170여명의 좌익수와 3,800명의 죄수들이 들어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에 걸쳐 공격했다(증9, 134-140쪽: 이는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동 범위를 넘습니다).

26) 광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이 이루어졌고 시민군의 동시다발적인 매복작전들이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증4, 40-41쪽 및 증21, . (주: 매복작전은 북한이 전문으로 하는 무기이며 동시다발적인 작전 지휘는 순수 시민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음).

27) 불온목적의 유언비어들 즉 여자를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다 등은 순수한 시민이 지어낼 수 없는 프로급의 작품입니다(증4, 24쪽, 5.18사건의 사료 7항)

28) 총상으로 죽은 시민의 72.2%가 시민군이 가진 M-1과 칼빈에 의해 사망했다(증9, 140쪽 중간. 5.18사건의 사료 11항).(주: 이는 불순세력의 의도적인 소행이며, 그 목적은 광주시민을 흥분케 하는 술책이라고 봅니다. 이는 불순세력이 개입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라고 봅니다. 5.18단체는 이를 뒤집는 통계와 해석을 아직 제시한 바 없습니다)

29) 돈을 받고 벽돌이 든 리어카를 끌었다(증7, 43쪽 하단. 5.18사건의 사료 23항)

30) 계엄군에게 대화를 유도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 군의 격분을 유도하고, 군중이 공격하면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40-50대 나이) 뒤로 빠지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군중의 공격을 유도했다(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5항. 100항). (주: 이는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프로집단의 개입을 암시함)

31) 주머니에 돈이 든 어린애가 세무서 커텐에 불을 지르는 것을 잡았는데 어느 청년들이 불을 질러라 해서 질렀다 하더라. 타일러서 풀어주었는데 새벽에 세무서가 다시 불타더라(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6항)

32) 광주 전역이 시민군에 의해 장악됐고, 치안부재-무법천지가 됐다. 이들은 진지를 구축하고, 시민군을 편성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껌과 과자를 주며 합세를 권장했다(증9, 138쪽, 5.18사건의 사료 33항) (주: 특히 어린이를 전투에 합류시키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이이기도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전과 월남전 등에서 어린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이를 어찌 순수한 광주시민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33) 시민군들은 시체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시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도청 앞 관장에 시체를 진열시켜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모임을 유도했다(증9, 137-138쪽. 5.18사건의 사료 33, 34항). (주: 이는 공산주의식 심리전 수법입니다. 피고인은 군의 전략정보 교육을 받은 바 있고(1등), 군의 정보기관(1972-1974)과 국정원(1980)에 근무하면서 심리전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위가 아닙니다)

34) 비록 발단은 학생시위에서 출발했지만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 조종과 교묘한 난동을 통해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유발-흥분시킨 데에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책동이 있었다(증10, 141쪽, 5.18사건의 사료 63항).

35) 전옥주(32세)라는 여자가 확성기로 물러서지 맙시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 가두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독려했다(증11, 257쪽. 5.18사건의 사료 73항),

36) 5.21일 새벽 05:20분, 광주역 앞 군중 200여명이 집결하여 있는데 여자가 지금 일어나야 산다며 선동했다(증11, 647쪽. 5.18사건의 사료 84항).

37) 5.27일 03:00분 도청 앞에서 여학생이 방송을 통해 시민을 선동했다(증11, 6555쪽. 5.18사건의 사료 89항), 21일 자정에 여인이 확성기로 선동 방송을 했다(증14, 439쪽. 5.18사건의 사료 125항), 새벽 2시에도 여인이 시민을 선동하는 방송을 했다(증14, 406쪽. 5.18사건의 사료 114항).

38)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방송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같아 전율을 느꼈다(증13, 83쪽, 5.18사건의 사료 103항).

39) 여성이 확성기를 통해 애절한 목소리로 밤새내 시위를 선동했다(증4, 40쪽. 5.18사건의 사료 14, 32 항 외 대수 자료).

40) 여인들의 방송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겁먹게 했다(증17, 432쪽. 5.18사건의 사료 147항).

41) 5.26.12시경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기동타격대로 조직, 5-6명을 1개조로, 각 조마다 조장1명, 타격대원 4-5명, 군용 짚 차 1대, 무전기 한 대, 카빈으로 부장, 실탄 1클립으로 무장시켜 7개조로 편성했다. 지휘계통은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7개조)-조원으로 설정했다(증11, 266쪽, 5.18사건의 사료 80항). (주: 이는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민 저항이 아닙니다).

42) 윤상원 형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5월 19일까지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는데 그 후에는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민군의 시위로 성격이 바뀐다.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21일 그는 이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증12, 55-59쪽).(주: 윤상원은 사망했으며 5.18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43)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점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품팔이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지금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5월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증12, 65쪽, 5.18 주역이자 국회의원인 정상용의 회고).(주: 이는 5.18단체 측 인사의 증언이며 계엄사의 분석과 일치합니다. 기층민들은 스스로의 철학에 의해 나섰다기 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들 기층세력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주역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이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되는 게 아닐까요?)

44) 수습위원회는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놓았다(증12, 90쪽. 좌측 하단).(5.18은 김대중과 관련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45) 광주사태의 주요 원인은 지역감정과 학생 시위에 편승한 김대중 일당, 용공 및 불순 세력의 조직적인 배후조종, 광주로 내려간 재경 극렬 학생들의 선동 및 가세, 대정부 불만 및 지역감정에 불을 지른 악성 유언비어 때문이었다(증4, 30쪽 하단).

46) 이날(5.24) 집회에서는 철야데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의 참여를 절규했던 전모여인(32)을 간첩용의자로 붙잡았다. 시민들은 그녀가 한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주소 등 횡설수설하는 게 의심쩍다고 여겨 계엄분소에 넘겼다. 시민군은 정부 당국이 광주 사태를 간첩 등 불온 세력과 결부시킨 게 마음에 걸려 22일에 이어 이날까지 2명의 혐의자를 잡아 이첩한 것이다(증16, 474쪽 하단). (주: 간첩이 없었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습니다. 민들도 간첩이 끼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입니다. 간첩이 있으면 시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속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광주시민이라 해서 교묘한 선동 전술에 넘어가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47) 심지어는 열 몇 살 먹은 애들도 와요. 물어보니까 누가 돈을 주면서 앞에서 끌라고 했답니다. 힘없는 아이는 앞장세우고 시킨 사람들은 뒤에서 미니까 애가 앞장서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불순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하지만 단서가 없으니까 말을 하지 못합니다(증7, 43쪽 하단).(주: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공산세력이 늘 사용했던 기본전술입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국군을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죽인 야수로 몰기 위한 심리전입니다)

48) 광주 진압에 참가했던 장병 153명의 100%가 광주사태는 배후가 있는 폭동이며, 순수한 데모를 불순한 배후 세력이 조종. 폭동화 했다고 생각하며 이를 숭고한 민중항쟁이라고 생각하는 장병은 단 한 명도 없다(증7, 45쪽 중간).

49) 부대원들을 향해 난폭하게 달려온 차를 간신히 저지시켰습니다. 운전수를 잡아 이유를 물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맞아 죽는데 안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이 한다고 대답했습니다(증7, 53쪽 중간). (주: 배후조종이라고 생각합니다).

50) 5.18은 신군부가 유도했다(증15, 월간조선 1988.3월호 382쪽) (주:고소인들은 누군가에 의해 유도당했다는 게 명예훼손이라고 하지만, 5.18단체 측 고소고발인들 스스로가 신군부의 유도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5.18단체는 모든 유언비어와 자료들까지 군이 날조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억지요 날조라고 봅니다

하나 하나의 자료는 첩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첩보들을 모아놓고 보면 5.18에는 간첩들의 개입이 있었고, 그들의 책동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보는 단 1%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첩보들을 종합해보면 평가자에 따라 100%에 가까운 확률을 가지고 광주사태는 좌익이 배후 조종한 사건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간첩들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간첩을 경계해야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좌우 이념대결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이념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누가 간첩이라는 것은 밝힐 수 없지만 저것은 간첩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이를 공학계통에서는 'PROXY APPROACH'라고 표현합니다. 생산량을 직접은 측정할 수 없어도 전기사용량만 보면 생산량을 알 수 있습니다. 간첩을 직접적으로 잡지 못해 누가 간첩인지는 알 수 없어도, 간첩의 소행을 보면 간첩이 개입됐다는 사실까지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를 대지 못한다 해서 과학세계와 선진국의 분석분야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계학적 유추기법까지 금지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더구나 단 1%의 가능성에 대비하라는 안보계 절대절명의 표어를 허무는 인민재판은 금지돼야 한다고 봅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인민재판 식 역사평가는 한국의 안보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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