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공산독재로부터 해방 시킨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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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공산독재로부터 해방 시킨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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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그 설득과 소탈의 리더십

 
   
  ▲ 1981년 취임식 직후 레이건과 낸시  
 

1981-89년 간 미국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무너뜨리고 동유럽을 공산독재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쇠퇴해가던 미국 경제를 다시 일으킨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레이건은 그가 어떤 일을 할 당시에는 항상 과소평가 되었다.

레이건이 1966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 그가 주지사를 연임한 민주당의 패트 브라운을 쉽게 꺾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레이건은 주정부의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었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체제 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 1984년 성조기 앞에선 레이건 (성조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이 레이건임)  
 

8년 간의 주지사 임기를 마친 후 레이건은 1976년 공화당 대통령 지명전에서 나섰으나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언론은 나이 많음을 들어 레이건이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오랜만에 야인(野人)으로 돌아온 레이건은 카터 대통령이 미국을 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예측대로 카터 대통령 재임시 미국은 두 자리 수 인프레와 두 자리 수 이자율로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카터의 대외정책 또한 재앙에 가까웠다. 

 
   
  ▲ 알링턴 무명용사 묘역을 찾은 레이건  
 

1979년에 나카라과에는 쿠바가 지원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이란에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과격한 이슬람 정권이 들어섰다.

이란 사태로 인해 2차 석유 쇼크가 발생해서 가뜩이나 취약한 미국 경제는 더욱 휘청거리게 되었다. 속수무책의 카터를 비웃듯이 그 해 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해서 공산괴뢰(傀儡)정권을 세워 놓았고, 이란의 과격한 세력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침입해서 미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구금했다. 미국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 1987년 5월 마이애미에서 만난 레이건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선 레이건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자존심과 영광을 다시 찾고, 워싱턴의 연방정부에 집중된 권한을 주(州)와 지방정부, 그리고 지역사회에 되돌려 오겠다고 약속했다.

예비선거에서 하원의원, 주중(駐中) 대사 및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조지 부시를 쉽게 이긴 레이건은 부시를 러닝 메이트로 지명했다. 11월 선거에서 레이건은 민주당의 카터에 대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 1987년 6월 베를린의 브란덴브르크 문앞에서의 연설  
 

공산체제와의 전쟁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레이건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체제를 공존(共存)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소멸시켜야 할 악(惡)으로 보았다. 1982년 레이건은 기독교단체가 초청한 모임에서 소련을 ‘악(惡)의 제국’(Evil Empire)라고 불렀다.

레이건은 영국 방문시 하원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는 - -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 버릴 것”이라고 했다. 레이건은 자유민주주의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신했고, 미국이 전체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동시에 레이건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체제의 취약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취임 초부터 대대적인 군비(軍備) 확장을 추진했다. 퇴역한 전함에 최신 전자장치와 미사일을 장착하여 다시 취역시키는 등 재래식 전력(戰力)을 강화하는 동시에, 카터 대통령이 취소한 B-1 폭격기와 MX 미사일 등 최신무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전진(前進) 배치에 대응해서 퍼싱 중거리 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시켰다. 레이건은 또한 ‘별들의 전쟁’(Star Wars)이라고 부르는 미사일 방어체제를 개발하기로 했다. 

 
   
  ▲ 1988년 워싱턴에서 대처와 함께  
 

레이건은 아프간 반군(叛軍)을 지원해서 소련의 군사력을 소모시켰고, 니카라과 반공(反共) 게릴라에도 무기를 공급했다. 1983년 10월 카리브해(海)의 작은 섬나라 그라너다에서 쿠바의 군사고문단이 개입한 공산 쿠데타가 일어나자 레이건은 군대를 보내 공산정권을 전복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세워지도록 했다.

레이건은 소련이 수출하는 원자재 가격을 떨어뜨리고 소련에 첨단기술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소련을 군비경쟁으로 몰아가서 소련 경제가 파탄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레이건은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제시한 협상안을 거부해서 결국 소련이 백기(白旗)를 들도록 했다. 

 
   
  ▲ 1989년 1월 8년 임기를 마치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레이건  
 

레이건은 소련이 폴란드 자유노조를 탄압하자 무역제재로 폴란드의 공산정권을 압박했다. 레이건은 폴란드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레이건은 가톨릭 신자였던 중앙정보국장 윌리엄 케이시를 통해 ‘신성한 연맹’(Holy Alliance)을 구축한 것이다. 레이건이 재임 중에 요한 바오로 2세와 자주 만났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87년 6월12일 서베를린의 브란덴브르크 문 앞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연설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을 무너졌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었으니, 공산체제를 멸망시키려던 레이건의 꿈이 멋지게 실현된 셈이다. 

 
   
  ▲ 2004년 6월 서거 후 운구 행열  
 

경제적 자유를 위한 또 다른 전쟁

레이건이 취임했을 당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레이건은 정부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며, 규제를 완화해서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약속했다. 세금을 낮추어 소비를 진작시킴으로써 경제를 살리겠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정책을 ‘레거노믹스’라고 불렀다.

정부지출을 줄이기 위해 데이비드 스토크먼 의원을 예산국장으로 기용해서 불요불급한 정부예산에 칼을 댔다. 레이건은 취임 후 곧 발생한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강경하게 진압해서 정부가 노조의 집단행위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레이건은 연방준비이사회 의장이던 폴 볼커의 주장대로 화폐공급을 줄여 인프레를 갈아 앉히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1982년 말에는 실업율이 10%를 넘는 등 일시적 불경기가 초래됐지만 1984년부터는 놀랍게도 실업율이 줄어들었다.

레이건은 취임 첫해에 민주당의 협력을 얻어 소득세 인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정부지출 삭감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레이건은 국방비 지출을 대폭 늘렸지만, 의회의 다수당인 민주당이 복지예산 삭감에 반대해서 정부 재정적자가 늘어 난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국내외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재정적자를 감당해 야만 했다. 하지만 그 결과 레이건 임기의 마지막 해에 미국 정부의 부채는 2조 6천억 달러로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겼다.

1986년에 제정된 조세개혁법(Tax Reform Act of 1986)은 레이건이 취한 중요한 세제개혁으로 평가된다. 이 법은 전반적으로 소득세율을 내렸는데,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인하폭이 저소득층에 대한 그것보다 커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법률은 자본이득세율도 소득세율 인하에 상응하게 인하했으며, 반면에 조세감면 대상을 대폭 축소했다. 또한 주택 모기지 론의 이자에 대한 세금공제 폭을 인상해서 주택구매에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레이건 정부가 취한 세금 감면조치로 인해 중상층과 부유층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어 부유층을 위한 정책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세율인하로 인해 전체 세수(稅收)가 몇 년 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990년대 미국의 호황은 레이건 시절에 단행한 세금인하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부유층에 대한 감세(減稅)가 투자와 소비로 이어져서 결국 저소득층의 고용이 증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레이건에 대하여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은 경기회복은 1980년대 들어 유가(油價)가 하락하는 등 외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레이건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레이건이 취임 후 석유류 가격에 대한 정부통제를 없애서 유류 증산효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유가가 안정됐다고 말한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 새로운 정부규제는 대폭 감소했다. 물론 민간항공사업에 대한 규제가 카터 대통령 때 철폐되었듯이 규제완화는 레이건 취임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레이건 정부 들어 규제완화가 보다 큰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레이건의 경제철학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양대(兩大) 거두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와 밀튼 프리드먼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점에서 레이건은 영국의 대처 총리와 같았다. 하이예크의 ‘자유의 헌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대처가 보수당의 대표가 되자 런던의 경제연구소(IEA)로 하이예크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듯이, 레이건 역시 하이예크를 너무 좋아해서 자신의 연설문에 하이예크를 자주 인용했다.

대통령이 된 후 레이건은 하이예크를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환담했는데, 처음 만난 이 두 사람은 마치 오래 된 친구 같이 보였다고 한다. 레이건은 밀튼 프리드먼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레이건과 대처는 케인즈식(式) 경제정책과 뉴딜형 사회복지 모델을 폐기하고 하이예크와 프리드먼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채택했기에 미국과 영국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설득과 소탈의 리더십

레이건은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던 지도자였지만 결코 남에게 강요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없이 자란 레이건은 오래된 고향 친구나 친척이 없었다. 그런 레이건에게 아내 낸시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낸시가 외출하는 날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레이건은 매우 초조하게 낸시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데는 캘리포니아부터 그를 보좌한 에드윈 미즈와 마이클 디버의 힘이 컸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로운 인물들을 주변에 기용해서 팀웍을 이루도록 했다. 1980년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서 자신과 경쟁했던 조지 부시 부통령의 참모이던 제임스 베이커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한 것이다.

레이건은 샌드라 오코너를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원 판사로 임명했으며, 역시 여성이며 민주당원이던 조지타운 대학의 정치학교수 진 커크패트릭을 최초로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레이건은 중요한 정책결정이 아니면 각료에게 권한을 위임해서 국정이 스스로 굴러가도록 했는데, 그런 면을 들어서 레이건을 ‘위대한 위임자’(Great Delegator)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 해안 근처에 있는 목장을 매우 좋아해서 대통령 재직 중에도 자주 들렀다. 또한 레이건은 자신과 가까운 영국의 대처 총리 등을 캠프 데이비드 별장으로 자주 초청해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세계정세를 논의하기를 좋아했다. 레이건은 젊을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그런 탓에 문장력이 뛰어 났으며 연설도 대단히 잘 했다.

그래서 레이건을 흔히 ‘위대한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라고 불렀다. 레이건은 그때 그때의 여론조사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보좌관들이 어떤 문제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고 레이건에 보고하면, 레이건은 오히려 국민들을 설득(convince)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또 소탈한 성격을 갖은 지도자였다. 임기 초에 한 청년으로부터 총격을 맞고 생명을 잃어버릴 뻔했으면서도 결코 여유를 잊지 않았다. 총탄을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부시 부통령이 문병을 간 적이 있었는데, 화장실에 있던 레이건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서 자신이 흘린 물을 수건으로 닦아서 부시를 놀라게 했다.

레이건은 옛 영화를 매우 좋아했는데, TV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면 만사를 젖히고 몇 번씩이나 본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이 서방경제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이 보아야 할 문서를 레이건에게 주고 퇴근을 했는데, 그 다음날 출근해 보니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베이커는 시급한 보고서를 왜 그대로 두었냐고 레이건에게 따지듯이 물었더니, 레이건은 “짐, 미안하네. 어제 TV를 켰더니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가 나오지 않겠나. 그 영화를 안 볼 수 없어서 자네가 준비해 준 보고서를 못 보았네.”라고 말했다 한다.

레이건은 군인을 존중한 대통령이었다. 군 부대를 방문하기를 좋아했고, 공군 조종사 점퍼를 즐겨 입었다. 레이건은 한국 방문 중 긴장이 감도는 휴전선 부근 미군 부대를 방문했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1983년 9월 소련이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하자 레이건은 소련의 행위가 “야만적”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5공화국 말기에 레이건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 친서를 보내 개헌논의를 앞당기게 하기도 했다.

8년 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레이건은 남부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지만 행복한 은퇴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1993년부터 주위사람들은 레이건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고, 1994년 8월에 치료불가능한 알츠하이머에 걸렸음이 확인되었다.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음을 알게 된 레이건은 자기가 사랑하는 미국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당신들의 대통령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당신들에게 감사하며 - - 언제든 주님이 나를 부르면 우리나라에 대한 큰 사랑과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영원한 낙관을 안고 세상을 뜰 것이며, 자기는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가겠지만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새벽이 있을 것”이라는 친필 공개서한을 발표해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레이건은 2004년 6월4일 향년 93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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