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로 화한 시위 군중과 경찰관의 혈투전이 계속되기를 연 5시간-쌍방에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음은 물론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구 경찰서의 무기를 빼앗는가 하면 시위 군중의 일부 마치 성난 이리떼처럼 몰려다니며 경찰관의 집을 습격하고 그 가족에 행패를 부리며 가재와 식량 등을 어디로인지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좌익 극렬분자들의 계획적인 각본이거나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성난 군중들의 증오에 찬 만행이었으리라. 트럭에 분승한 일부 폭도들은 곤봉 같은 것을 들고 적기가 혹은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 각처를 누볐다.
이날의 폭동으로 대구 경찰서 수사 주임과 공안과장 및 서의 직원 6명, 또 달성서원 6명 등이 폭도에 의하여 즉사하는 참사를 빚어냈으며 대구시 전매국장, 도경국장, 그리고 경찰 수백 명이 치명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대구시는 문자 그대로 무법천지가 된 느낌이었다. 고급 관리나 주요 인사들의 집은 대부분이 폭도들과 성난 군중들의 거친 발길에 짓밟히고 있었으며 식량 등 많은 재산이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천지를 진동하는 총소리와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폭풍을 상기 시켰다.
가공할 비극의 날 1946년 10월 2일의 해가 저물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구시가 온통 쑥밭이 되고 말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 하나 석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혈이 낭자한 데모 부상자와 관의 부상자가 병원에 들이닥치고 있을 무렵에 시내 각 병원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조건부 치료를 제의하는 것이 아닌가,
의사와 간호원들은 “경찰이 발포를 중지하지 않는 이상 환자의 치료와 진찰을 거부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환자들이 입원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형상은 실로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사회 민심이 정말 관의 처사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비협조적이었는지, 아니면 폭동에 동정하는 현상의 일환이었는지 역사만이 알고 있을 알쏭달쏭한 사태였다. 이날 오후 늦게 서야 대구 지방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후 6시경에 미군 후원부대가 출동한 것을 필두로 부산과 기타 인접 지역의 응원 경찰대가 도착하여 가까스로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폭도들의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낮에 군중들에 의하여 점령되었던 경찰서가 탈환되고 폭도들은 해산 당하였다.
그러나 이 폭동으로 인하여 대구 경찰서 유치장이 파괴되어 각종 범법자 1백여 명이 도망 쳤다. 뿐만 아니라 이날 폭도들은 주요 통신시설까지 파괴해버렸으므로 중앙과의 연락도 두절되어 한때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이루었다.
그 이튿날인 3일에야 충청 남 북도에서 경찰관 7백여 명이 응원군으로 증파되어 사태 수습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도 미군들의 힘이 더욱 주요하였다. 당시 한종건 보안국장이 현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모오건 미군 중위 등이 비행기로 현지에 나타나 사태 수습을 위한 조사에 착수하는 등 야단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대구에서는 미군과 각지 경찰의 응원대를 맞이한 덕분으로 경찰서를 다시 찾고 치안상태를 회복하기는 했으나 사건이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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