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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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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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5.8 라인

1955년으로 들어서자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자동차의 수도 늘기 시작했다.

1954년에 15,950대였던 것이 1955년에는 18,356대로 늘어났고, 1956년에 가서는 25,328대로 급증하였다. 이렇게 되니 휘발유 소비도 늘어만 갔다. 1955년에 3,360만 갤론(67만 드럼) 사용하던 것이 다음 해인 1956년도에는 5,817만 갤론(116만 드럼)으로 73%나 급증했다. 이러다가는 석유파동이 염려되었다.

이런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었고 그 결과 긴급조치가 발동된 것이다. 1957년 5월 8일자의 전국 자동차 수를 넘지 못한다는 조치이다. 폐차가 되기 전에는 자동차 제작은 할 수 없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자동차공업이 존립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황색(黃色) 딱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래되었는데 자동차를 한 대 제작할 수 있는 허가서였다. 폐차를 하면 폐차한 대신 황색딱지를 한 장 받는다. 이 딱지를 갖고 가면 시발자동차 한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딱지 값이 컸다. 시발자동차 한 대 값이 약 400만환인데 딱지 값이 100만환이었다.

시발자동차회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폐차가 되고 난 후 가지고 오는 황색딱지만 가지고는 회사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에 매달렸다. 매달리는 곳은 상공부가 아니었다. 엄연히 자동차공업은 상공부 공업국 소관인데도 상공부에는 갈 필요가 없었다.

황색딱지를 떼어 주는 곳이 교통부 육운국이기 때문이었다. 육운국에 가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최고상까지 준 시발차인데, 그래도 명목만이라도 유지해야 하지 않습니까"하며 굽신거리고 애원을 했다. 그 결과 기분이 좋으면 황색딱지의 장수가 좀 많았고 무슨 사정이라도 있으면 줄어들었다. 장기적 계획도 없었다. 몇 달에 한 번 주는 것인데 주는 사람 마음대로였다. 증차계획은 물론 장관 결재가 나야 하고 대통령의 재가도 있어야 했다.

일방 부산에서는 신진(新進)공업사(사장: 金昌源)가 시발자동차에서 제작한 국산엔진을 구매하고, 자체적으로는 차체를 만들어서 "신진"이라는 택시용 승용차를 제작 판매하고 있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자동차 부품공업

다음은 자동차 부품공업쪽을 보자.

우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소규모 공장은 모두 파괴되었다. 더욱이 미군에서 군수품이 마구 시중에 흘러나온 통에 팔 곳도 없었다. <도표 9-5>는 1950년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자동차 부품공장들이다.

이 도표에서 보면 엔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부품들이 대부분이고 그 외는 스프링과 클러치 정도였다. 그 규모도 아직은 소기업 정도였으니 자동차공업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일 때이다.

 
   
     
 

제1차 5개년계획과 자동차 공업

5.16 군사혁명 당시 상공부에 공업국은 한개 국만 있었다(1962년에 공업1국과 공업2국으로 분리된다). 공업국 조직은 정책과인 공정과(工政課), 섬유과, 화학과, 중소기업과 그리고 기계과라는 단출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기계과가 담당해야 할 분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각 공장에서 쓰는 기계시설 일체의 제조공업이 기계과 소관이고,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호미, 낫, 탈곡기, 경운기, 펌프도 기계과 소관이고, 수송기계, 즉 비행기, 선박, 자동차, 자전거, 심지어 세발자전거, 장난감 자동차(金屬工藝品)도 기계과 소관이요, 각 가정에서 쓰는 TV, 라디오, 전화기, 세탁기, 선풍기 등 전기용품과 가위, 바늘, 재봉틀, 다리미, 곤로, 수저, 식기 등을 만드는 것도 기계과 소관이었다. 당시는 제철소, 제련소도 기계과 소관이었다.

이런 식이니 기계과장 한사람과 몇 명의 직원으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직원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는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다른 직원, 심지어 계장에게까지도 상의할 필요없이 완전 독립행정을 하게 되었다. 옆 직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상공부내에서는 기계과를 "크레믈린 課"라고 했고 소위 끗발도 셌다. 혼자서 결심하면 그것으로 상공부로서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농담처럼 기계과에는 장관이 몇 사람이나 있다고들 했다. 이런 상태에서 5.16혁명을 맞자 기계과는 인사쇄신(人事刷新)의 첫 번째 목표가 되어 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어버렸다.

당시 기계과 금속계장이던 유석기(劉錫琦)씨의 회고담에 의하면, 상공부 보좌관으로 부임한 金모 해병 중령이 기계과 직원 모두에게 즉시 상공부를 떠날 수 있도록 보따리를 싸라고 하고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불렀다고 한다. 제일 먼저 기계과장이 내려가자 김 중령이 "당신은 상공부에서는 필요없소"라고 해서 그 길로 짐을 들고 상공부를 떠나야 했다고 한다.

유석기 계장도 각오를 하고 내려가니, "당신은 남으시오"해서 살아났다고 한다. 기계과장이 사임한 날짜가 1961년 6월 8일이니 5.16혁명 후 20일이 지났을 때이다. 이렇게 되어 기계과장이 공석이 되었는데 상공부에 마땅한 인재가 없어 유석기 계장이 과장대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고회의에서는 종합제철 건설에 비상한 관심이 있었다. 이 분야는 금속전공을 한 유계장의 직접 담당이었으므로 계획서를 만들어 최고회의에 브리핑하려고 뛰어다녀야 했다. 브리핑이 끝나자 누군가가 유계장에게 "당신 직책이 무엇이오?"하고 물어 "금속계장입니다"라고 하니, "과장은 어디 갔어!"하며 언성을 높이더라는 것이다.

최고회의에서 계장 정도를 상대하고 있다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유 계장이 "과장은 공석중이어서 제가 과장대리를 하고 있습니다. 업무가 너무 과중합니다"라고 답변하니 "당장 금속과를 만드시오" 하고 호통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래서 1961년 12월 1일 금속과가 새로 생기게 되었고, 유 계장이 진급을 해서 과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제1차 5개년계획을 작성한다면서 법석을 떨던 가장 바쁜 시기인 1961년 6월 8일부터 10월 17일까지 4개월 동안 기계과엔 과장이 없었던 것이다.

유석기씨의 회고를 들어본다.

"상공부 기계과에는 자동차공업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직원이 없었다. 자유당, 민주당 시대에는 자동차 행정은 교통부 소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 후 상공부 소관이 되었다. 더욱이 상공부 기계과는 김 중령의 인사 소탕작전에 의해서 경험있는 직원은 모두 쫓겨나 버린 상태인데 느닷없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할 수 없이 직원들과 생각나는 대로 새로 지을 공장 이름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금속계통 전공이니, ◆ 종합제철을 건설키로 작심하였다. 나머지 분야는 상공부 각과와 업계에 문의하여 ◆ 방직기계 및 가공공장 ◆ 전기계기(계량기)공장 ◆ 전기케이블 공장 ◆ 자동차공장 등을 골랐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방대한 기계공업의 5개년계획이라고 하기에 내용이 충실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자동차공장을 둘로 나누었다. 중대형 자동차공장, 디젤엔진공장이 생기게 된 연유이다. 소형 자동차는 기존 업체인 시발자동차를 육성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5개년 계획사업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5개년계획 안을 최고회의에서 내가 브리핑했는데 무수정 통과되었다."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중공업분야는 얼마나 미미했는가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정된 사업도

▶종합제철사업은 단지 규모가 25만톤으로 채산성이 없다고 1963년에 취소됐고,

▶방직기계공장은 사업을 하겠다는 실수요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전기계기공장(전기계량기 제작)과 전기케이블공장은 금성사에서 추진했다.

▶나머지가 자동차공업육성 분야인데 경제개발 제1차 5개년계획의 자동차공업에는 2개 사업이 포함되었다.

"중대형 자동차공장 건설", "디젤엔진공장 건설"이다. 그런데 중대형 자동차 건설은 1964년 12월 사업자체가 취소됐고, 디젤엔진공장 건설만이 국영기업체인 한국기계에 의해 추진돼 나갔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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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중공업분야는 거의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수요부족 문제인데, 경제가 발달되지 않은 미개발국가(Under Developed Country)라서 모든 기계업종은 물론이요, 자동차공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수요량 부족 → 소량생산 불가피 → 고가생산 → 국산품 판매부진 → 외제품 수입 → 국산화 투자곤란 → 공장건설 불능」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이를 시정하지 않고는 기계공업 육성이나 자동차공업 육성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자동차 공업의 일원화(一元化)정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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